[뉴서울타임스] “아름다운 글 하나를 소개합니다. 놀라운 선교 비사!”
SNS를 통해 웬만한 크리스천이면 다 읽어본 선교 미담이 우광복 선교사 이야기다. 일제와 해방, 6·25전쟁을 시대적 배경으로 한다.
미국 선교부에서 파송된 젊은 선교사 부부가 충남 공주에서 아들을 낳고 한국의 해방을 간구한다는 의미에서 ‘우광복’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하지만 그 아버지는 선교활동 중 장티푸스에 걸려 죽고, 여동생 둘도 전염병으로 잃게 돼 결국 어머니와 미국으로 돌아가 살게 된다. 한데 어머니는 2년 뒤 한국으로 돌아와 40여년간 선교활동을 한다.
우광복(조지 윌리엄스·1907~1994)
그사이 미국에서 성장한 우광복은 해방 후 미 군정관으로 들어와서 하지 장군 통역관이 돼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필요한 인재 50명을 추천하게 되는데 이 중 48명이 기독교인이었다. 우광복의 이러한 공로로 제헌국회가 열린다. 이승만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목사인 이윤영 제헌 의원이 기도함으로써 대한민국이 출범케 됐다는 내용이다.
이 이야기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장차 올 메시아에 대해 시적 상상력으로 표현(사 11:1~8)한 것과 같이 우광복이란 인물의 삶을 통해 야훼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메시지를 담은 소망이라고 할 수 있다. 메시아사상에 뿌리를 둔 스토리텔링인 셈이다. 그렇다면 우광복은 실존 인물일까.
영명동산에 있는 옛 선교사 주택. 유일하게 남은 건물이다. 현재는 개인 소유.
이달 중순 충남 공주시 영명중·고등학교 뒷동산. 숲을 헤치고 올라가자 최근 손질한 묘비와 봉분 몇 기가 나온다. 서만철 세종꿈의교회 장로(전 공주대 총장)의 안내였다. 이 일대는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 미 북감리회 조선 공주선교부 터이다. 이제는 1906년 설립된 영명학교만이 선교 부지에 지속할 뿐이다.
우광복 묘 앞에서 공주선교부 얘기를 전하는 서만철 장로. 10여년 전부터 유적 보존에 힘쓰고 있다.
봉분 7~8기는 선교사와 그 가족 묘지다. 서울 양화진, 광주 양림동 등 한국 내 주요 선교부 묘지가 잘 관리된 것에 비하면 초라하다. 이나마 서 장로가 10여년 전부터 동역자들과 힘을 모아 길을 내고, 다듬어 유실을 막을 수 있었다. 그 봉분 가운데 의학박사 우광복(조지 윌리엄스)의 묘가 있다. 미국에서 소천한 뒤 유언에 따라 1995년 이곳에 안장됐다.
우광복(앞줄 가운데) 가족 사진. 오른쪽 소녀가 공주 영명동산에 묻힌 동생 올리브이다.
우광복 묘 앞으로 그의 여동생 올리브(1909~1917)가 잠들어 있다. 어린 시절 애틋했던 여동생을 풍토병으로 떠나보낸 우광복이 동생 옆에 묻히고 싶다고 해서 ‘고향’에 안식한 것이다. 우광복은 미 북감리회 선교사 프랭크 윌리엄스(한국명 우리암)와 앨리스 베이트(1884~1980) 부부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부는 1906년 제물포항으로 입항했고 이듬해 그곳에서 첫아들 우광복을 얻었다. 부부가 광복(光復)이라는 의미로 작명했으나 일제 강압에 광복(光福)이라는 성서적 이름으로 바꾸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우광복의 아버지 우리암(프랭크 윌리엄스·1883~1962) 선교사.
아버지 우리암은 선교사이자 공주 영명학교 설립자이기도 하다. 콜로라도 출신으로 덴버대학 졸업 후 감리회 충청지역 선교 책임자로 부임해 교육에 힘썼다. 영명학교 출신으로는 열사 유관순, 독립운동가 조병옥 박사 등이 있다. 우리암은 1940년 일제의 강압에 추방되기까지 34년간 공주를 중심으로 선교와 교육에 힘썼다. 그리고 광복 후 맥아더 사령관 추천으로 미 군정 농업정책고문관으로 입국해 건국 초기 농업과 교육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독립운동가이자 농촌운동가인 배민수(1897~1968) 목사가 우리암의 영향을 받았다.
1910년대 공주선교부 모습. 영명학교와 선교사 사택 등이 들어섰다. 현 공주시 중동 일원.
우리암 이전에 공주선교부에 부임한 선임자가 있었다. 미 오하이오주 출신 로버트 샤프(1872~1906) 선교사인데 1903년 조선에 부임했다. 그는 한국에 온 지 3개월 만에 먼저 부임한 앨리스 하몬드(사애리시·1871~1972)와 결혼한다. 미국 선교훈련 기관에서 알던 사이였다. 결혼 후 이들 부부는 1904년 개설된 공주선교부로 떠났다. 그러나 샤프는 강경·논산에서 복음을 전하다 발진티푸스로 죽게 된다. 부인 앨리스는 남편 사후 귀국했다가 1년여 만에 돌아와 남편의 뜻을 이었고 1939년 추방됐다.
영명학교 기숙사에서 잠자리에 든 학생들. 충남·전북권 명문학교였다.
한편 우광복도 영명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본국에 들어가 청소년기를 보내고 의학 공부를 했다. 선교사 자녀로 복음에 대한 열망과 소명이 누구보다 깊었다. 그는 늘 고향 한국을 잊지 않고 살며 한국 의료사역을 꿈꿨다.
1945년 9월 미군 1만여명이 남한에 진주했다. 책임자가 하지 사령관이었다. 하지는 그해 11월 한국에서 추방된 선교사들의 귀환을 청원했고 이때 우리암, 피셔, 앨리스 레베카(아펜젤러 딸), 윌슨 등이 입국했다. 우광복은 하지의 통역관 겸 특별보좌역을 맡았다. 언더우드 아들 원한경은 군정 고문, 노블의 아들 헤라클은 하지의 정치 연락장교였다.
트럼펫 연주하는 우광복과 이승만 대통령.
애초 우광복은 해군 군의관으로 인천으로 들어오는 기함을 타고 상륙했다. 한국의 위생문제를 파악하는 것이 주 임무였다. 그는 자신이 태어난 제물포 집을 찾았고 이때 미군을 환영하러 나온 세 명의 한국인과 미 실무장교가 언어 소통이 안 돼 쩔쩔매는 것을 목격하고 통역하게 됐다. 하지와 아놀드 장군은 군의관인 그를 군정 실무자로 발탁했다. 우리암은 “(일제강점기) 7년 만에 휴가를 받아 본국에 갔더니 사춘기 아들이 대학에 진학해 믿음 안에서 살아가고 있었다”며 “하나님께 맡기고 아내와 함께 한국 사역에 매진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분의 계획대로 부르심을 받아 결국 모든 일이 유익하게’(롬 8:28) 된 것이다.
바로 이 선교사 1, 2세대 그룹은 ‘미 군정 내 한국인 고위직 50여명 중 35명’을 기독교인으로 채웠다. 우광복에 관한 ‘선교 미담’은 샤프와 우리암 가족의 얘기가 뒤섞인 염원의 결과라고 봐야 할 것 같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친’(잠 22:6) 아버지 우리암의 열매가 우광복이다.
공주·세종=글·사진 전정희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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