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서울타임스] 성경에 나오는 ‘로뎀나무’는 한국에 없는 나무다. 한글 성경에는 로뎀나무, 노가주나무, 싸리, 대싸리 등으로 번역됐다. 팔레스타인과 사해 부근에 서식하는 로뎀나무는 싸리나무처럼 땅에서부터 가느다란 가지들이 자라기 때문에 풍성한 그늘을 만들지 못한다. 로뎀나무는 덤불에 가까운 모습이지만 사막에서는 그런 나무의 그늘이라도 고맙기 그지없다.
크리스천에게 ‘로뎀나무’는 매우 친숙하다. ‘로뎀나무 교회’ ‘로뎀나무 병원’ ‘로뎀나무 카페’ 등 다양한 이름으로 사용된다. 그만큼 익숙하고 긍정적이다. 로뎀나무는 지친 사람에게 쉼을 제공하는 그늘, 쉼과 안식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로뎀나무가 ‘보잘것없음’과 ‘비참함’을 상징한다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로뎀’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시궁창, 진흙탕’을 의미한다.
인생의 비루함 속에
로뎀나무는 구약성서에 4번 정도 짧게 언급됐지만, 엘리야 선지자가 그 나무 아래서 죽기를 간절히 구한 사건 때문에 대부분의 크리스천은 선명하게 기억한다. 성서는 엘리야 선지자가 이세벨의 분노를 피해 남쪽으로 도망하는 중 광야에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간구했다고 기록한다.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곳에 머물게 하고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왕상 19:3~4)
엘리야 선지자는 갈멜산상에서 벌어진 아합왕과의 대결에서 승리했지만 아합의 아내 이세벨의 서슬퍼런 노기를 피해 달아나는 극과 극의 모습을 보였다. 엘리야가 탈진해 숨어든 나무는 키가 크고 그늘이 많은 멋진 나무가 아니었다. 사막의 모래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수그리고 있는 로뎀나무 밑이었다. 이 나무는 가지가 빗자루같이 뻗어 있어서 그늘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리를 들이밀고 있는 엘리야의 모습은 광야 같은 인생길에서 처할 수 있는 가장 비참한 상황을 상징한다.
엘리야 선지자는 광야에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간구했다. 무엇이 그토록 엘리야의 마음을 무너뜨려 ‘차라리 목숨을 거둬 달라’고 기도했을까? 전날의 승리가 컸던 만큼 낙심과 좌절감도 컸을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 전역이 바알 숭배에 빠지고 타락의 길을 걸을 때 홀로 여호와를 섬겼던 그는 참담한 심경이었을 것이다.(왕상 18:21) 자신을 죽이겠다는 이세벨의 위협 역시 불안과 두려움에 떨게 했을 것이다.(왕상 19:2)
또 엘리야는 생명은 건졌지만, 사명을 뿌리치고 도망친 데 대한 수치심이 그를 더 앞으로 못 나가게 했을 것이다. 그는 며칠을 굶었지만, 허기를 느끼지 못했다. 육체의 허기보다 더 강렬한 영혼의 허기가 그를 압도했다. 모든 게 끝난 듯했다. 덤불 같은 나무 밑에서 들려오는 엘리야의 통곡과 신음소리를 상상해 본다.
“주님,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님과 맺은 언약을 버렸고 예언자들을 죽였습니다. 이제 저의 목숨도 빼앗으려 찾고 있습니다. 주님. 왜 저를 사역자로 부르셨나요. 저는 쓸모없는 존재예요. 차라리 제 목숨을 가져가 주세요.”
귀스타브 도레의 ‘엘리야에게 빵과 물을 주는 천사’.
엘리야는 분노와 절망, 영적인 피로로 탈진했다. 그는 ‘지금 내 생명을 거둬 달라’고 탄원했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천사를 보내어 떡과 물로 원기를 회복시키고 호렙산으로 불러 다시금 사명을 주셨다.
“로뎀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여호와의 천사가 또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왕상 19:5~7)
엘리야는 다시 일어났다.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을 느낄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지금 미래에 대한 불안과 탈진으로 엘리야와 같은 기도를 하고 있다면 “하나님, 제가 무엇을 하길 원하십니까”라고 묻고 기다려야 한다. 기다리는 그 행위는 다른 어떤 영적 훈련보다도 하나님의 음성을 더 잘 들을 수 있게 해준다. 결국 하나님은 우리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황 가운데서도 우리 삶 속에서 자기 뜻을 완벽하게 이루신다. 하나님은 고난과 절망으로 깨어져 어두워진 마음의 틈새에 빛으로 스며드신다. 아무리 절망 속에 있다 할지라도, 아무리 스스로 시궁창으로 들어간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다가가 떡과 물로 위로하시며, 다시 사명을 주실 것이다.
멸망의 빗자루
사막의 그늘을 제공하는 로뎀나무의 뿌리는 광야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유용한 땔감으로 사용됐다. 현대의 광야에 사는 베두인들은 로뎀나무로 숯을 만든다. “광야 날씨는 일교차가 극심하다. 낮에는 태양 때문에 숨쉬기조차 어렵고 밤에는 반대로 추위로 고생해야 하는 곳이 바로 광야다. 수천 년 동안 광야에서 지내 온 베두인들이 광야의 추운 밤을 보내는 노하우는 바로 로뎀나무 숯불에 있다. 로뎀나무 숯불 위에 5~10센티 정도의 흙을 얹으면 베두인식 맥반석 찜질 침대가 된다. 그 위에 잠을 자면 따뜻한 광야의 밤을 보낼 수 있는 것이다.” (류모세의 ‘열린다성경 식물이야기’ 중에서)
마크 샤갈의 ‘엘리야를 깨우는 천사’.
이런 특징을 배경으로 로뎀나무 숯불을 징계로 표현하기도 한다. 로뎀나무 숯불이 오래 타기 때문에 속이는 혀를 로뎀나무 숯불처럼 오래간다고 비유했다. “너 속이는 혀여 무엇을 네게 주며 무엇을 네게 더할꼬 장사의 날카로운 화살과 로뎀 나무 숯불이리로다.”(시 120 : 3~4)
“내가 또 그것이 고슴도치의 굴혈과 물 웅덩이가 되게 하고 또 멸망의 빗자루로 청소하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니라”(사 14:23)에서 ‘멸망의 빗자루’는 원어상 ‘멸망의 로뎀나무’(the broom of destruction)인데 이는 불의한 자들을 철저히 멸하시는 하나님의 불붙는 듯한 진노를 의미한다.
사막의 열기와 모래바람을 피하게 해주는 로뎀나무. 광야 같은 인생길 어느 길목에서 우리에게 쉼과 안식을 주려고 기다리는 주님의 손길이 머무는 나무로 기억하고 싶다.
이지현 뉴콘텐츠부장 겸 논설위원 jeeh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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