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은 주전 1900년 이집트 제 12왕조시대 문서에서 '아우샤멤'이란 형태로 등장한다. 그 후 아카드와 앗수르 문서에서 그 이름이 '우르살렘'으로 등장한다. 예루살렘은 이미 초기 청동기 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한 흔적이 있다. 특별히 중기 청동기 2기에서 1750년 이래로는 계속해서 사람이 살았다. 창세기의 아브라함 시대에는 '살렘'아라는 축약형으로 통용되었다(창 14:18). 각 시대별 명칭들을 보면, 다윗이 예루살렘을 정복하기 이전에는 '여부스의 도시'라고 불렸다. 다윗이 정복한 후 '다윗성' 혹은 시온', 예언저들은 '공의의 도시'. '거룩한 도성', '하나님의 도성'이라고도 불렀다.
예루살렘의 역사를 간단히 살펴보면, 여호수아는 예루살렘왕 아도니세덱과 전쟁을 버렸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사사기에 의하면 유다자손이 예루살렘을 쳐서 취하여 칼날로 성읍을 불살랐다는 기록(삿 1:8)이 등장을 하지만, 여부스 족속이 다시 예루살렘을 되찾았던 것 같다. 같은 장의 사사기에는 '베냐민 자손이 예루살렘에 여부스 사람을 쫒아내지 못하였으므로(삿 1:21)'라고 기록되어 있다. 결국 다윗에 의해서 이 성은 점령당하여 이스라엘의 수도가 된다. 그렇다면 다윗이 베냐민 지파에 속한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보다 중요한 조건은 예루살렘의 급수원이다. 예루살렘은 기드론골짜기 안에 있는 기혼샘과 엔로겔이라는 두 수원에서 식수를 공급받을 수 있는 지역이다. 두 번째 요인은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쉬운 전략적 측면이다. 예루살렘 주변에는 여러 개의 산과 계곡이 자리하고 있어서 전쟁이 발생하였을 때 방어에 용이한 지역이다.
남서쪽의 흰놈의 골짜기와 남동쪽으로 뻗은 기드론 골짜기,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전망산, 감람산, 멸망산과 아르모나 하 나찌브는 이스라엘의 천해의 요세처럼 만들어 주고 있다. 이렇게 북쪽을 제외한 세 방면은 모두 자연 방어선 역할을 하는 계곡들과 산들로 둘러 싸여있다. 세 번째 요소는 편리한 교통로이다. 예루살렘이 지니고 있는 지리적 이점은 이스라엘 내의 중요한 남북간 간선도로와 동서간 간선도로가 이곳에서 교차되고 있다는 점이다.
남북을 잇는 간선도로는 산지의 분수령을 따라 세겜, 예루살렘, 헤브론과 같은 중요 도시들을 거쳐 브엘세바까지 이르게 분수령길이다. 그리고 동서를 잇는 간선도로는 여리고에서 지중해 해안지방으로 나가는 벧호론 길로서 예루살렘의 북쪽 지역을 지난다.
이런 간선도로의 교차점이라는 이점으로 인하여 예루살렘은 모든 불리한 지리적 여건을 극복하고 정치, 행정, 종교의 중심적 도시로 성장할 수가 있었다. 네 번째 요소는 이스라엘 지파간의 이해관계가 없는 중립적 도시라는 점이다. 다윗이 이 도시를 점령할 당시 예루살렘은 가나안의 여부스가 차지하고 있었던 도시였다. 곧 이곳은 이스라엘의 각 지파에게 분배되지 않은 중립적 성격의 도시였다. 따라서 다윗이 이곳을 통일 이스라엘의 수도로 정한 것은 이스라엘 여러 지파 간에 생길 수 있는 갈등을 배제하려는 의도가 담겨있었다고 볼 수 있다.
다윗은 이 도시를 점령하고 난 후 도시의 이름을 '다윗성'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이 도시가 다윗 개인 소유임을 강조한 명칭이었다. 결국 통일 이스라엘의 수도로서의 예루살렘은 지파 간의 갈등이 없는 중립적인 지역과 다윗 자신의 개인 소유지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초기 명칭은 다윗의 정치적 입지가 공고해진 이후 곧 '예루살렘'이라는 공식적 이름으로 바뀌었다.
출처: [이수정의 이스라엘 이야기!!]
[뉴서울타임스] 조현상 기자 편집
<저작권자ⓒ뉴서울타임스.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