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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주현 선생 독립운동가, 정치인, 한의사…파란만장한 91년 삶

잊혀진 한의사 독립투사들 ⑨방주혁(方周赫:1879.3.28~1969.7.23)

등록일 2020년05월03일 01시02분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방주혁 선생과 애국지사들

[뉴서울타임스] 방주혁의 선친 방선곤 한의사는 경상남도에서 유명한 명의였다. 방주혁은 17세 때 한의학 공부를 시작했다. 22세까지 사서삼경(四書三經) 의서(醫書)를 모두 섭렵하고 아버지를 따라 경상도 전라도를 오가며 살았다. 25세부터는 서울에서 거주하며 의술을 펼친 것으로 확인된다. 그리고 28세에 참봉을 지낸 뒤, 그의 능력을 눈여겨 보아온 이유승(李裕承) 판서의 추천으로 시종관 벼슬에 전의(典儀) 직위에 내정되는데, 이때 국권 침탈(경술국치)이 일어나자 오히려 관직을 사양하고 자연인으로 돌아간다. 이유승은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이시영의 아버지다.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우당 이회영 선생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고종황제의 형 흥친왕(興親王) 이희(李熹)의 시의(侍醫)로 있으면서 이희와 가까이 지내게 되었고, 경술국치 이후에 만나 같이 아무 말 없이 눈물만 흘리고 되돌아 왔던 일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방주현 선생 독립운동가, 정치인, 한의사

그는 국권침탈 이후 민족독립을 위해 노력했다. 3.1운동 시기 천도교 창립자이면서 이 운동을 주도한 손병희가 찾아와 3.1운동을 전개하는 데 있어 중요한 천도교와 시천교를 통합시키는 역할을 해달라는 부탁에 활약하기도 했고, 건국 후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이 독립운동을 위해 국경도시에서 밀사 한웅을 민영식과 만나도록 보냈을 때도 위험을 무릅쓰고 독립자금을 주저 없이 내고 자리를 주선했다. 그러나 결국 이 일로 인해 동대문 경찰서에 끌려가 문초를 받았으나 민영식의 도움으로 풀려났다.

46세(1925년) 이후에는 중국의 상해 임시정부 동지들을 만나 독립운동에 참여코자 자진해서 중국에 수차례 걸쳐 들어가기도 했다. 이때 이유승의 아들 이시영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이로 인해 그는 일제로부터 요시찰 인물로 감시됐다. 자신의 자택(서울 중구 계동 73번지)을 독립운동가에게 제공하고 자신은 이보다 못한 집에 기거한 것도 유명한 일화다. 자신은 총과 칼로 맞설 만큼 용기가 없다며,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독립군을 돕는 일, 치료해주는 일, 따듯한 방에서 재우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해방 후 방주혁은 정치인으로서 활약했다. 이시영 부통령의 정치 고문, 민주당 최고위원 조병옥 정치 고문, 민주국민당 정치 고문을 지냈다. 국민구국정치운동을 전개했고,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정책 건의를 했으며, UN 사무총장에게 한국의 UN 가입 필요성을 건의했다. 심지어 이승만 대통령을 살해하기 위해 저격했다는 혐의로 기소됐으나 무죄 선고도 받았다. 4․19 이후 민주당 집권기에 정책시정 및 민의 반영에 노력했다. 5․16 이후에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3차에 걸쳐 시정의 개선점을 건의하기도 했다. 당시 나이가 80세가 넘었다는 것은 또 주목할 대목이다. 정치적으로 이 정도 이력이 남아있는 한의사는 필자도 처음 보는 것 같다.



그러나 방주혁은 정치인으로서만 살았던 것이 아니다. 이 시절 그의 본업은 여전히 한의사였다. 그는 한의사로서 대한민국에 큰 발자취를 남기는 데 성공한다. 한의과대학 설립, 한의사제도를 창립하는 일이었다. 1947년 행림학원이 만들어질 때 이 단체의 이사로 활동하며 한의과대학 설립에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동양의약대학 재단을 설립하고 문교부의 인가를 얻는 과정에서 박호풍 학장과 함께 중심적 역할을 했으며 동양의약대학 재단 이사를 역임했다. 동양의약대학은 지금의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이다.

1951년 6·25전쟁 발발 중에는 부산 피난 시절 한의사제도를 만들기 위해 김영훈(金永勳), 박호풍(朴鎬豊), 박성수(朴性洙)등과 함께 활발하게 활동했다. 전쟁이 끝난 후 서울시 화동 경기중학교 옆에 ‘자도한의원’을 개원하여 진료했다. 주소지 기록을 확인해보니 운현궁 근처 ‘계동 73번지’ ‘운니동 98-3번지’ ‘화동 경기중학교 앞’ ‘소격동 77번지’가 확인됐다. 방주혁은 제1·2회 한의사 국가고시 시험위원을 지냈으며, 1950년대 내내 대한한의사협회 고문을 역임했다.

1961년에 나온 한의학술정보지 의림(醫林)에는 방주혁이 83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기골이 장대하며 아침 일찍부터 진료를 시작해 저녁 9시까지 진료를 했으며, 피곤한 기색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묘사돼 있다. 후배 한의사들에게 본보기가 될 만한 이력으로 인해, 그는 대한한의사협회가 만들어진 후 고문으로 추대되어 존경을 받았다.

방주혁은 독립운동가로, 정치인으로, 또 한의사로서 혁혁한 공적을 쌓았음에도 불구하고 국가보훈처에 독립운동가로 등록돼 있지 않다. 유가족의 신청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보훈처에서 인정을 안 하는 것인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축현리 890번지 기독교상조회 공원묘지에 방주혁의 유해가 안장돼 있다.

정상규 작가는 다양한 역사 콘텐츠를 통해 숨겨진 위인을 발굴해왔다. 현재 ‘국가유공자 지원 시민단체 포윅스’ 대표를 맡고 있다. 저서로는 ‘독립운동 맞습니다’ ‘잊혀진 영웅들, 독립운동가’ 등이 있다. 


정상규의 히든 히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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