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서울타임스] “친엄마(나혜석)라는 사람이 찾아오는데 아이가 어떻게 안 만날 수가 있어요?”
상해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여걸 양한나는 독신으로 지내다 40대 중반에 ‘전투’하듯 결혼했다. 한나라는 이름은 도산 안창호가 지어줬다. 독립운동가들의 뒷바라지를 억척같이 하는 것을 보고 “한라산같이 굳은 의지를 지닌 사람이 돼라”는 이유였다. 본명은 귀념으로 부산 기독교 명문 가정에서 태어난 1남 10녀 중 셋째 딸이었다.
그런데 그가 1녀 2남의 ‘새엄마’가 됐다. 친엄마 나혜석(1896~1948·근대 서양화가)이 이혼 후 아들 학교를 찾은 것을 두고 남편 김우영(1886~1958)이 아이를 나무랐고 양한나는 두둔했다.
양한나 (1893~1976)
양한나는 어려서부터 별나고 대담하다는 소리를 듣고 자랐다. 그는 부산 일신여학교 시절 이후 기독교 민족주의에 눈떠 중국과 조선을 오가며 항일 투쟁을 벌였다. 어머니 한영신(1872~?)은 예수 믿고 콩나물 장사를 해가며 자녀들에게 기독교교육을 시켰다. 11남매는 부산진교회와 초량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자매들은 신여성이었고 독자 양성봉(1900~1963)은 부산시장과 농림부 장관을 역임했다.
부산 사회복지시설 자매의숙 시절 입소자 머리를 감기는 양한나(가운데).
양한나는 1910년대 학생 항일운동 주도, 20년대 상해임시정부 소속 항일 투쟁, 1930년대 부산YWCA 등 시민운동 및 교육운동을 전개했다. 일본 요코하마신학교, 중국 쑤저우여자사범대학, 이화여전 유치과 등에서 수학했다. 유치원 경영 등을 위해 호주장로회 알선으로 호주 유학 및 연수를 다녀오기도 했다. 에스더와 같이 민족의식이 뚜렷했다.
양한나의 결혼은 교우나 독립운동가들에게 폭탄선언과 같았다. 김우영은 동향으로 일제총독부 고위 관리였다. 해방 후 그는 반민특위에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 갇힌다. 양한나는 네 번째 부인이었다.
“새어머니는 그야말로 하나님 아버지에게 의지하고 사는 듯했다. 식사 전에 꼭 기도하는 것은 물론 저녁이면 식구들을 불러모아 가정 예배를 보곤 했다. …새어머니는 낮에 혼자 있을 때도 틈만 나면 낮은 목소리로 성경을 읽고 찬송가를 부르곤 했다. …또한 근처 여러 사람을 모아 몇 차례 떠들썩하게 예배를 봤다. 지금으로 치자면 부흥회였다. 조선인들의 집회에 일본 당국이 신경을 곤두세울 때였다. 형사 여럿이 집에 들락거렸으나 새어머니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양한나는 화가 나혜석 자녀의 새엄마로 그의 자녀들을 양육했다. 나혜석과 1녀 3남.
김우영·나혜석 부부의 둘째 아들 김진(전 서울대 법대 교수)의 10대 시절 회고담이다. 나혜석은 김우영과 이혼 후 자식이 너무나 보고 싶어 찾곤 했다. 그러나 김우영이 매몰차게 거절했다.
양한나와 나혜석. 각기 부산과 수원에서 미션스쿨을 다니며 기독교 민족주의운동을 펼쳤다. 하지만 ‘여자’로서의 삶은 너무나 달랐고 둘 다 특별했다. 차이가 있다면 양한나는 죽는 순간까지 기도로 하나님께 매달렸다는 것이다. 김우영도 할머니 손에 이끌려 교회 나가던 어린이였다.
지난주 서울 돈암동 돈암장 일원. 양한나가 일제 중추원 칙임관 김우영과 살던 서울집이 있던 곳이다. 전남과 충남도청 고위 관료였던 김우영은 서울 중추원 발령으로 사실상 한직으로 밀려나 돈암동에 정착한다. 돈암동 집은 나혜석이 김우영에게 자식을 보게 해달라고 읍소하며 찾던 곳이기도 하다. 친일파 김우영, 독립운동가 양한나, 신여성 나혜석의 관계…. 인간은 죄의 결박 아래 있으니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자유케 하심을 그들도 알았으리라.
김우영·양한나 부부는 1940년대 돈암동에서 두 차례 이사하며 살았다. 광주와 대전 관사에 비하면 초라했다. 돈암장 인근이라던 그들의 집터는 확인할 수 없었다. 저택 문간방살이를 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돈암장 행랑이 아닌가 싶은데 그 자리엔 서울시 건축상 등을 수상한 ‘예닮교회’가 자리하고 있다.
김우영은 체포됐다. 늦결혼 후 찬송가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부를 정도로 신앙심이 깊어갔던 양한나는 상해임시정부 동지 김영철에게 호소하듯 고백했다. “우리가 1920년대 초 임시정부에서 투쟁할 때 김우영이 일본총영사관 만주 부영사로 왔는데 그때 ‘의열단사건’이 터졌고 김우영 영사가 의열단을 도왔습니다.” 영화 ‘밀정’에서 다뤄진 이 얘기는 역사학자의 몫이긴 하나 어느 정도 학계도 인정하는 사실이다. 반민특위의 김우영 병보석도 이런 정상이 참작됐다.
‘상해임시정부 경상도 대의원 양한나’ 기록물. 20대의 그는 열혈 전사였다.
그러나 양씨 가문은 “양한나와 친일파 김우영과의 결혼은 안창호·김규식 등이 독립운동 자금 모집에 이용하기 위해 그녀를 설득한 결과이며 1958년 김우영이 사망하기까지 두 사람은 정상적인 결혼 관계가 아닌 것처럼 보였다”고 주장한다.(양한나 연구자 이송희 논문 2002년)
반면 양한나가 김영철에게 말했다는 아들 김진의 기록은 이렇다. “김 동지, 내가 하나님 믿는 사람인 거 알죠. …이 양한나가 김우영에게 시집가게 된 데는 다 하나님 뜻이 있을 겁니다. …내가 아는 그는 민족을 생각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우리처럼 목숨을 걸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생각만은 그런 사람입니다.” 선처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양한나에 대해 이송희 교수(신라대)는 “그의 기본정신은 기독교적 민족주의와 여성주의였으며 특히 고아와 여성 정신병자에게 사랑을 베풀었다”고 평가했다.
호주선교부 설립 부산 일신병원 구내 구라탑.
양한나가 졸업한 부산 일신여학교. 리모델한 모습으로 박물관이기도 하다.
‘열혈 기독여성독립운동가’라는 면류관에 어울리지 않게 돈암동 허름한 집과 셋방살이 그리고 사람들의 수군거림 등을 감내해야 했던 양한나.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5계명을 지켜 아버지께 순종하겠다는 마음으로 결혼했다”는 그의 말을 되새겨보면 그는 기도 가운데 우리가 알 수 없는 ‘응답’ 을 받지 않았을까 싶다.
약력
· 일신여학교 졸업 및 마산 의신학교 교사
· 요코하마신학교 졸업
· 부산여자청년회 설립
· 상해서 독립운동
· 이화여전 졸업· 호주 유학
· 부산과 통영에서 유치원 교육
· 한국애국부인회 부위원장
· 수도여자경찰서장(1946년) 역임
· 자매의숙 설립 및 공창폐지운동
· 장한어머니상(1964), 용신봉사상(1967), 국민훈장동백장(1976)
· 부산진교회 기장묘역 안장(1976)
글·사진=전정희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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