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서울타임스] “대추 엄마예요? 언니예요?” 온라인 수업을 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카메라 앵글 안으로 학생들의 집 구성원이 찬조출연을 할 때가 있다. 상대적으로 통제가 잘 안 되는 개와 고양이는 단골 조연이다. 자기 집 강아지가 불쑥 뛰어 들어와 머쓱해 하는 학생에게 물으니 자기는 ‘대추 언니’란다. 누가 입양했느냐에 따라 가족 간 호칭과 역할이 달라지는 법인데, 강아지 ‘대추’를 돌보는 주된 업무는 학생 어머니의 몫인가 보다.
하긴 “동생을 낳아줄 것이 아니면 강아지라도 사내라”는 어린 아들의 성화에 나도 졸지에 강아지 ‘엄마’가 된 적이 있다. “테리 어머니, 어디 계세요?” 예방접종을 하러 들른 동물병원에서 강아지 엄마로 불렸던 첫날 얼마나 당황했던지. “저는 저 개의 주인이지 엄마가 아닙니다.” 정색을 한 나의 반박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은 오히려 ‘테리’에게로 향했다. 모두 표정이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에고, 저 강아지 불쌍해.”
그분들의 우려와 달리 나는 결코 테리를 구박하거나 주인처럼 군림하지 않았다. 놀랍게도, 생후 한 달 된 강아지를 입양해 돌보는 동안 나조차 자연스럽게 ‘테리 엄마’가 돼갔다. “테리는 아가라서 많이 자야 해. 그러니 깨우지 말자.” 필시 장난감이 필요했을 아이는 졸지에 ‘동생’을 얻게 된 상황이 못마땅했고, 덕분에 테리 돌보기는 오롯이 내 몫이 되고 말았다.
물론 한 아이의 엄마가 된다는 것과 ‘강아지 엄마’가 된다는 것은 같지 않다. 헌신의 정도나 관계의 깊이에 있어 비교 불가능한 범주이다. 누군가는 인간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처음으로 아이를 낳아 엄마가 됐을 때도, 졸지에 ‘강아지 엄마’가 돼 개를 기를 때도 똑같이 느꼈던 감정이 하나 있다. 내가 그 생명을 돌보기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게 됐다는 것이다. 그 생명과 관계하기 전에는 없었던 사랑이 생겼다는 것이다. 이 새로움에 이름을 붙인다면 ‘나보다 어리고 연약한 것에 대한 민감성’이라고 할까.
그동안 사람들은 이 성품을 ‘모성’이라 불러왔다. 인류 역사 이래 엄마들이 생명을 잉태하고 낳고 길러왔으니 돌봄의 성품을 그리 부르는 것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육아에 참여하는 아빠들이 늘어나는 요즘엔 아빠들도 이 민감성을 학습한다. 아니, 인간 안에 본디 있었던 특성이 육아 경험을 통해 발현됐다고 하는 게 맞겠다. 엄마, 아빠만이 아니다. 자신을 ‘대추 언니’라고 선언하는 여학생도, 토요일마다 만나는 보육원 ‘동생’이 있다고 내게 말해준 한 청년도 모두 돌보는 과정을 통해 이 민감성을 갖게 됐다.
언젠가 인상 깊게 시청한 드라마 ‘마더’에서 세 딸을 모두 입양해 기른 한 엄마가 ‘엄마됨’을 이렇게 정의한 적이 있었다. “다른 작은 존재한테 자기를 다 내어줄 때, 엄마가 되는 거예요.”
얼마나 아름답고 깊은 정의인가. 내가 아닌 ‘다른 존재’ 그리고 나보다 강하지 않은 ‘작고 연약한 존재’에게 자기를 다 내어줄 이유가 ‘사랑’ 말고 또 있을까.
돈을 벌어야 하니까,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나에게 이득이 될 것 같아서 수행하는 이해타산적 관계들이 넘쳐나는 세상 한복판에서, 오직 사랑의 이유로 작고 어린 다른 존재에게 나를 온전히 내어주는 성품을 갖는 것. 그건 몸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신 하나님의 성품이고, 우리를 위해 기꺼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성품이기에 성별이나 결혼 유무와 상관없이 그리스도인라면 모두가 가져야 할 성품이 아닐는지. 그래서 우리는 모두 은유로서는 ‘엄마’여야 하는 것이 아닐는지.
백소영(강남대 기독교학과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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