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서울타임스] 개항과 함께 한반도에는 콜레라와 천연두 등 전염병이 끊이지 않고 창궐했다. 세균과 위생에 대한 교육은 1885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입국한 후에야 의료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됐다.
옥성득 미국 UCLA 교수는 15일 페이스북 메신저로 진행된 인터뷰에서 “19세기 말 개신교 선교사들이 내한했을 때는 천연두와 콜레라 등 전염병에 대해 정부가 손도 쓰지 못하는 상황이었다”면서 “의료 선교사들이 전염병 예방과 환자 치료에 나서면서 교회가 희망과 치유의 공동체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당시 조선에선 쥐가 콜레라를 옮긴다며 대문 앞에 고양이 그림을 붙여 놓을 정도로 전염병 대책이 허술했다. 콜레라는 1878년 부산항에서 첫 환자가 나온 이후 1902년까지 네 차례나 더 창궐했다. 1886년에는 두 달 만에 서울에서 60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옥 교수는 “갑오개혁 때 의정부에 설치된 중앙행정기관인 내무아문은 제중원 원장 올리버 R 에비슨 선교사를 방역 책임자로 임명했다”면서 “선교사들은 위생 규칙을 발표한 뒤 세균학을 강의했는데 음식과 물을 반드시 끓여 먹고 손과 입을 철저히 씻으라고 교육했다”고 했다. 이어 “수백 명이 모이는 신앙사경회 때도 하수구와 우물 간 거리 두기, 간단한 정수법부터 세균을 피하는 법, 건강한 육아 방법을 교육했다”면서 “교회와 선교사를 만나면 목숨을 건질 수 있다는 여론이 형성된 건 이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옥 교수는 “당시 콜레라에 걸리면 기독교 병원으로 가라는 방이 붙었을 정도였다”며 “선교사들이 세운 병원과 교회는 피난처가 됐고 방역에 성공한 뒤, 정부도 선교회에 감사 편지와 포상금을 보내 노고를 치하했다”고 밝혔다.
일제는 전염병을 통치 수단으로 악용했다. 그는 “일제는 콜레라 전염 통제를 빌미로 한국인의 몸을 더 쉽게 구속하고 식민 정부의 권한을 확대했다”면서 “1910년 폐렴과 페스트를 방역한다면서 총독부와 경찰, 헌병 등 공권력을 앞세워 통제를 강화하며 핍박했다”고 했다.
옥 교수는 “코로나19 상황에서의 교회도 성장과 생존에만 초점을 맞출 게 아니라 위대한 의사요 교사이자 구원자인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한국사회의 총체적 질병과 무지, 죄악을 치유하는 새로운 사역의 길을 찾으라”고 권했다.
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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