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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냐, 학교냐”… 주일예배 참석 고집 기숙사서 쫓겨나

소강석 목사의 꽃씨 목회

등록일 2020년03월31일 16시54분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뉴서울타임스] 1970년대 말 처음으로 군산 명석교회(현 군산 사랑의교회)에 나갔을 때 누가 곁에서 신앙 지도를 해 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무슨 열정이었는지 주일예배뿐만 아니라 수요예배, 주일저녁예배, 새벽기도회까지 다 다녔다.

하루는 새벽기도에서 나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러보고 싶었다. 그러나 입에서 아버지라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시골에서 힘들게 농사 지어 쌀 팔아서 학비 보내주고 기숙사비 보내주시는 아버지께 미안해 하나님 아버지라는 말이 안 나왔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으셨다는 것을 믿는데 아버지라는 말만큼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 제가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이고 정말 예수님을 믿는 자녀라면 옆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처럼 제 입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불러보게 하옵소서.”

잠시 후 가슴이 갑자기 뜨거워지면서 나도 모르게 입에서 “아버지, 아버지”가 나오며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고등학교 2학년 말이었다. 교회 시멘트 바닥에 눈물을 펑펑 쏟으며 “아버지, 아버지”를 부르고 또 부르며 울고 또 울었다. 동녘의 해가 뜰 때까지 아버지를 부르고 또 불렀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그때가 주님 앞에 거듭난 순간인 것 같다. 기도하고 교회를 나오는 순간 너무나 마음이 시원하고 행복했다. ‘아, 아버지를 부르는 것이 이렇게도 힘들었단 말인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고 나니 이렇게 마음이 행복하고 기쁨이 넘치다니. 아,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신비하고 놀랍기만 하구나.’

눈물을 흘리며 그동안 교회에 다니면서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못 부른 것을 회개했다. 종교적 열심과 인간적 생각으로만 교회를 다녔던 것을 회개하고 진심으로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게 됐다. 12월 초쯤이었는데 새벽녘에 내린 된서리도 아름답게 보였다. 아직 다 베지 않은 배추가 서리를 맞아 시들어 있는데 속배추가 노랗게 보이는 것마저 얼마나 아름답게 보였는지 모른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면서 스스로 자존감이 높아지고 신앙생활도 더 당당하게 할 수 있었다. 교회 다니는 애들한테 “나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다. 이제 나도 하나님의 자녀”라고 자랑했다. 그때부터 완전히 교회에 빠지기 시작했다.

당시 내가 다니던 군산제일고등학교는 교육에 열망이 높은 분이 학교를 인수해 학생들을 일류대학에 보내려고 집중하고 있었다. 고3을 앞둔 2학년 2학기 말부터는 주일이 돼도 학생들이 교회에 못 나가게 했다. 특히 기숙사에 있는 학생은 더 철저하게 감시했다. 아예 사감선생님이 기숙사 입구에서 몽둥이를 들고 지키고 서 있었다. 그래서 목사님, 장로님 자녀도 꼼짝없이 교회에 나가질 못했다.

그런데 나는 왜 그렇게 교회가 좋은지 미치도록 예배에 가고 싶었다. 사감선생님의 눈을 피하려고 기숙사 3층에서 1층으로 뛰어 내려 교회를 갔다. 마침 바닥에 겨울 난로를 켜려고 톱밥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았는데 그 위로 뛰어내려 교회를 간 것이다. 나중에 이 사실을 들켜 사감선생님께 몽둥이로 얼마나 맞았는지 모른다. 이튿날에는 교장실까지 끌려갔다.

교장선생님께서 눈을 부릅뜨고 경고했다. “소강석. 교회에 계속 나갈래, 아니면 학교를 선택할래.” “저는 평일에는 열심히 학교공부를 할 것이고 주일에는 교회에 나가 예배드리고 오겠습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감선생님이 방망이로 뒤통수를 후려쳤다. “이런 싹수도 하나 없는 자식, 네가 학생이냐. 그러고도 기숙사에 있을 자격이 있어. 이 자식아, 너 당장 기숙사에서 나가.”

그때 울면서 교장선생님께 말씀을 드렸다. “교장선생님, 공부는 열심히 하겠습니다. 주일날 교회만 나가게 해 주십시오.” 끝까지 주일날 교회 예배에 가겠다고 고집하다가 결국 기숙사에서 퇴사 당했다. 기숙사에서 나와 자취를 시작하면서 학교의 제한을 덜 받고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다. 물론 성적은 사정없이 나락으로 떨어졌다.

지금도 목회를 하면서 믿음 좋은 집안에서 자라나 주일학교 때부터 교회를 다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압력밥솥으로 고구마를 찌듯이, 그때라도 농축된 신앙생활을 하고 속성으로 신앙적 경험을 축적한 것이 큰 축복이라 생각한다. 그때 물불 가리지 않는 열정이 오늘날 목회의 밑거름이 됐다. 교회 성도들에게 고등학생 시절 만난 주님을 간증하고 열정의 꽃씨를 뿌리다 보니 그것이 전달돼 열정의 공동체를 이뤘다.

기숙사에서 나와 신앙생활의 제한을 받지 않게 되자, 이듬해 고3 여름수련회도 갈 수 있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마침내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 받는 영적 소명을 경험하게 된다.

▒ 왜 ‘생명나무목회’인가
이 땅에는 두 도성,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

사도 바울 이후 가장 훌륭한 교부는 어거스틴일 것이다. 어거스틴은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이 땅에 두 도성이 있다고 했다. 그 기원과 중심이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다.

이 땅의 도성은 인간이 주인이 되고 주체가 되는 도성이다. 이 도성은 하나님이 필요 없고 하나님 없이 오히려 더 잘사는 세상이다. 이 도성은 선악과가 중심이 된 도성이다. 그런데 겉으로는 인간이 주체가 되고 주인인 것 같지만, 보이지 않는 배후에서 사탄이 그 도성을 움직이고 조종한다. 다시 말해 사탄이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생명을 거부하고 자기의 선악의 지식으로 살며 선악과만을 따 먹고 살도록 유혹하고 조종한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도성은 하나님의 도성인데, 하나님이 주인이 되고 중심이 되는 도성이다. 이곳 사람들은 오직 하나님의 생명을 구하고 은혜를 구하며 살아간다. 오로지 하나님 의존적인 삶을 살며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 중심적인 삶을 산다. 이 도성은 생명나무가 중심이 된 생명나무 도성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도성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생명나무 도성에서 하나님 없이는 못 사는 영생의 사람이고 축복의 사람이다.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사람들이다.

문제는 이 하나님의 도성, 곧 생명나무 도성 안에 사는 크리스천도 이따금 선악의 지식을 선택하고 추구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에는 관심이 없고, 쓸데없는 선악의 지식에만 자꾸 관심을 둔다. 자기의 선악의 지식으로 맘대로 판단하며, 하나님보다 잘나고 똑똑한 삶을 살아간다. 그러니 항상 하나님께 불평하고 불순종하며 교만한 삶을 살게 된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교계를 소란하게 하며 교회 이미지를 흐린다. 그러다 언젠가는 하나님께 망신을 당하고 얻어맞게 된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전혀 선악판단을 할 수 없는가. 그렇지 않다. 성경은 이따금 성도들도 선악판단을 지혜롭게 하라고 가르쳐준다.(히 5:14, 고전 2:15, 고전 10:15) 여기서 말하는 선악판단은 부정적인 의미의 판단을 말하지 않는다. 남을 비판하고 공격하거나 하나님께 불평하기 위한 판단이 아니라는 뜻이다. 성경이 말씀하는 판단은 언제나 신령한 것과 관계가 돼 있다.

이러한 판단은 영적 분별의 측면과 차원이라 할 수 있다. 크리스천이 신령한 삶을 살기 위해 더 성숙한 영적 분별을 하라는 말이다. 혹은 성도들이 죄를 짓지 않기 위해 죄의 유혹 앞에 말씀의 원리로 선악을 분별하라는 말이다. 성도들이 마귀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이단에 빠지지 않기 위해 진리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도덕적 존재이므로 높은 도덕성을 소유하고 윤리적인 삶을 잘 살기 위해 선악 간의 분별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판단을 할 수 있다. 그런 판단은 당연한 우리의 권리이고 특권이자 의무이다.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그 판단마저 우리 자신이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 안의 옛사람이라는 자아와 욕망이 그런 판단을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옛사람은 늘 하나님과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판단하고 분별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선악판단이란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될 뿐만 아니라 자신 안에 있는 성령의 감동과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지각을 통해 이뤄져야 한다.

오늘날도 우리가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옛사람의 본성과 정체성으로 선악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옛사람이 판단한 그 판단은 내용이나 결과가 아무리 옳은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과 상관없을 뿐만 아니라 옳지도 않다.

내 삶을 핸들링하시는 하나님이 주인이 돼 판단해야 한다. 매 순간 항상 하나님의 생명을 먼저 추구해야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 돼야 한다. 그래서 나는 지금껏 생명나무 중심의 목회를 해 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이다.

교회는 생명나무 중심의 공동체가 돼야 한다. 선악의 논리와 판단이 교회를 이끌어 가면 다툼과 분열만 있을 뿐이다. 생명나무 목회는 생명공동체를 이룰 뿐만 아니라 생명의 공적 사역을 하게 한다.

소강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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