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서울타임스] 지난 10일 경기도 수원 ‘나혜석거리’는 스산했다. 미세먼지가 낀 하늘에선 비가 내렸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거리에 사람이 없었다. 코로나19 감염원 신천지에 대한 사람들의 분노가 대단했다.
그 나혜석거리에 나혜석 입상과 좌상이 100m 거리를 두고 각각 있었다. 나혜석은 수원시의 대표적 인물이자 한국 최초 여성 서양화가이다. 그는 근대 여성으로 전근대가 가하는 ‘폭력’에 맞서 인형이 되기를 거부했다는 평가와 그저 타락한 여자라는 비난을 동시에 받는 인물이기도 하다.
‘나혜석거리’의 동상
‘이혼고백서’를 쓰는 대신 막달라 마리아처럼 눈물을 흘리며 예수의 발에 값비싼 향유를 부었더라면(눅 7:36~50) 그의 ‘방탕한 죄’가 용서됐을까.
‘나는 18세부터 20여년간을 두고 어지간히 남의 입에 오르내렸다. 즉 우등 1등 졸업사건, M과의 연애사건, 그와 사별 후 발광사건, 다시 K와 연애사건, 결혼 사건, 외교관 부인으로서의 활약 사건, 황옥 사건(영화 ‘밀정’ 내용), 구미 만유사건, 이혼 사건, 이혼고백장 발표 사건, 고소 사건. 이렇게 별별 것을 다 겪었다.’
소설가이기도 했던 그녀는 이런 글로 자신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표현했다.
나혜석 (1896~1948)
나혜석의 본질은 ‘자유’다. 이는 곧 모든 장애에서 해방됨을 뜻한다. 나혜석은 조선의 가부장제와 식민지 여성으로서의 질식을 겪어야 했다.
한데 나혜석에 관한 수많은 연구와 저술이 놓치고 있는 것이 있다. 그가 어디서 ‘자유함’을 알았느냐는 것이다. 단지 신여성이어서 자유와 여성 인권을 추구했다는 주장은 비논리적이다. 그 답은 그의 성장 소설 ‘경희’(1918)의 문장 가운데 나온다.
‘하나님! 하나님의 딸이 여기 있습니다. 아버지! 내 생명은 많은 축복을 가졌습니다. … 하나님! 내게 무한한 광영과 힘을 내려주십쇼. 내게 있는 힘을 다하여 일하오리다. 상을 주시든지 벌을 내리시든지 마음대로 부리옵소서.’
그리고 나혜석은 자신이 벌받은 이유에 대해 고백했다.
‘결코 손을 대서는 아니 된다고 한 과실에 손을 댄 것은 뱀의 유혹이었고, 이브의 호기심이 아니었다. 이로 인하여 받은 신벌(神罰)은 얼마나 엄격하였나….’ (1935 ‘신생활에 들면서’)
그는 세례받은 신앙인이었다. 하지만 윤심덕이 그랬던 것처럼 ‘아담’에 의해 무너졌다. 아담은 그가 사는 세상 어디에도 있었다. ‘하나님 앞에 평등(자유)하다’는 진리를 추구한 대가 치고 삶이 너무나 가혹했다.
당시 민중에게 기독교는 단지 종교가 아닌 거대한 문화였고 새로운 삶의 방식이었다. 수원 지방 유지의 딸 나혜석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나혜석 삶의 몇 지점만 점검해도 그가 왜 자유와 구원을 외치다 행려병자로 죽게 됐는지 알 수 있다.
작품 ‘금강산 만상정’과 나혜석.
나 부잣집 딸은 수원행궁 근처에서 태어났다. 수원종로교회(1899년 설립) 앞이었다. ‘새 삶의 방식’에 따라 그는 신식 여학교 ‘삼일여학교’(현 수원 매향정보고)에 입학했다. 거기서 평등을 배웠다. 독사과였다.
삼일여학교는 메리 스크랜턴(1832~1909·이화학당 설립자)이 설립했다. 그의 제자인 기독 신여성 여메례(1872~1933)와 구타펠 선교사(1903~1912 한국 선교) 등이 영어 등을 가르쳤다. 나혜석은 우등생이었다.
그의 두 번째 지점 역시 미션스쿨이었다. 서울 진명여학교(현 진명여고) 진학이었다. 고종 황제 후궁 엄비 출연으로 설립된 이 학교는 초기 학감 여메례가 메리의 지휘를 받아 커리큘럼을 짰다. 메리의 며느리 스크랜턴 부인이 영어, 선교사 벙커와 밀러 부인이 각각 수학과 음악을 가르쳤다. 메리는 선교보고를 통해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하나님 말씀을 감화시키고 있다”고 했다. 매일 성경을 공부하고 주기도문을 한목소리로 외는 시간이 있었다.
나혜석은 이 학교 1회 우등 졸업생이었다. 이 사실을 ‘매일신보’가 사진과 함께 보도했다. 이 빼어난 신여성은 오빠 나경석(1890~1959·독립운동가) 영향으로 도쿄미술학교로 유학했고 거기서 근대화가 고희동 김관호 등을 만나 주님 앞에 고백했던 것처럼 ‘힘을 다해 일’을 한다. 세례도 그곳 도쿄한인교회에서 받았다.
구미 유람을 떠나기 전 나혜석·김우영 부부.
그는 그곳에서 만난 첫사랑(시인 최승구·1892~1917)을 폐병으로 잃고 만다. 사랑을 잃은 그는 말씀 안에서 치유가 필요했다. 그러나 그는 인간적 자유를 추구하면서 독배를 들기 시작했다. 그는 도쿄법대 출신 김우영(1886~1958·일본 외무성 외교관 및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과 ‘파격적 신혼여행’ 조건을 내걸고 결혼했다. 전남 고흥 최승구 무덤으로 신혼여행이었다. ‘나혜석 가십’의 시작이었다.
나혜석·김우영 부부는 서울 정동교회에서 김필수 목사 주례로 결혼식을 치렀다.
그때 나혜석은 서울 정동교회에서 김필수 목사 주례로 결혼식을 한 후 한동안 미션스쿨 정신여학교·진명여학교 교사를 하며 청년선교에 힘쓰기도 했다. 앞서 1919년 3·1만세운동 때 박인덕 황애시덕 김마리아 등과 만세사건에 연루돼 5개월의 옥살이도 했다.
하지만 그는 ‘말씀 치유’를 건너뛴 결혼으로 점점 믿음생활에서 멀어졌고 끝내 최린(1878~1958·독립운동가 겸 친일파)과의 파리 스캔들로 이혼해야 했다. 그리고 걷잡을 수 없는 타락과 배교로 이어졌다. 그를 한때 열렬히 사모했던 소설가 이광수(1892~1950) 김우영 최린은 해방 후 ‘반민특위’의 단죄를 받았다.
나혜석이 말년을 보낸 청운양로원의 현재 모습.
나혜석은 배교 이후 수덕사 등을 전전하다 ‘나는 하나님의 딸이다…오냐 그렇다’(‘경희’)의 문장을 비명처럼 남긴 채 서울 원효로에서 행려병자로 죽었다. 배교한 여인의 마지막 삶의 지점은 서울 청운양로원과 안양기독보육원 내 양로원이었다. 원장 오긍선(1878~1963·의사·사회사업가) 장로가 거두었다.
속박으로 자유롭고자 했던 나혜석은 ‘82년생 김지영’처럼 사랑과 삶이 고독했다. 돌 던질 자가 누군가 싶다.
연보
·1906~1913년 삼일·진명여학교 수학 및 도쿄미술학교 진학
·1917년 도쿄한인교회서 세례 받음
·1919년 3·1만세사건 연루 옥살이
·1920년 서울 정동교회서 결혼식
·1921년 중국 단둥에 여자야학 설립
·1923년 의열단(황옥경부 폭탄사건) 사건 연루
·1927년 부부동반 세계 일주
·1934년 이혼고백서(‘삼천리’) 발표
·1943~1947년 안양기독보육원 양로원 등 전전
수원·안양=글·사진 전정희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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