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서울타임스] “콜레라는 세균에 의해 발병됩니다. 균이 우리 몸에 들어오면 수가 급격히 증가해 병을 일으킵니다. 병에 걸리지 않으려면 음식을 반드시 끓이고 그 음식이 감염되기 전 먹기만 하면 됩니다. 갓 끓인 숭늉을 마셔야 합니다. 찬물을 마실 때도 끓여서 깨끗한 병에 넣어 둬야 합니다. 식사 전 반드시 손과 입안을 깨끗하게 씻으십시오. 이를 준수하면 콜레라에 걸리지 않습니다.”(‘올리버 알 에비슨의 생애’ 77쪽, 연세대출판부)
의료선교사였던 올리버 에비슨(1860~1956) 선교사가 1895년 6월 이런 내용의 공고문을 전국에 붙일 것을 지시했다. 당시 내무아문(內務衙門)이 그를 콜레라 방역 총책임자로 선임한 직후 내린 조치였다. 내무아문은 1894년 갑오개혁 때 의정부에 설치한 중앙행정기관 중 하나였다.
‘손을 씻으라’는 이 당부는 125년이 지난 지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한 방역 당국의 지침과 맞닿아 있다.
콜레라의 확산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의료선교사들의 헌신은 전염병으로 막다른 길에 몰린 조선에는 구원자와 같았다.
조선에선 콜레라를 호열자(虎列刺)라 불렀다. 호랑이가 물어뜯는 고통과 같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콜레라균에 감염되면 심한 설사와 중증 탈수가 빠르게 진행된다.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면 치사율이 50%를 넘지만 적절한 치료를 받으면 이 비율은 크게 낮아진다.
콜레라를 퍼트린 건 외국 군대였다. 1894년 6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이어진 청일전쟁으로 한반도는 쑥대밭이 됐다. 백성들은 강제 징발돼 노역이나 전투에 동원됐고 목숨을 잃은 이들도 많았다. 군인들에게 식량과 귀중품을 빼앗기고 성폭행도 당했다. 전쟁이 끝난 후 남은 건 콜레라였다.
에비슨은 감염 예방을 위한 위생교육과 치료에 사활을 걸었다. 백성들의 생활 습관을 바꾸기 위해 전국에 위생 공고문을 붙였다. 콜레라가 ‘쥐 귀신’ 때문이라며 대문에 고양이 그림을 걸던 백성들이 비로소 예방법을 알게 됐다. 청결한 생활습관이 콜레라를 막는 지름길임을 인식한 것이다.
수천 명의 확진자는 제중원 등 신설된 수용 시설과 각 가정에 격리된 뒤 치료를 받았다. 획기적인 치료법도 개발했다. 소금물을 주사기로 투입해 환자들의 탈수를 효과적으로 막았다. 생리식염수를 사용한 것은 아니었지만, 에비슨의 소금물 요법은 많은 생명을 살렸다. 한여름이었는데도 격리시설에는 불을 땠다. 환자의 체온을 유지해 신진대사를 원활하게 하려는 조치였다.
콜레라의 기세는 7주 만에 꺾였다. 의약품이나 위생 관념이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던 시절, 두 달도 채 되기 전에 방역의 결실을 본 것이다.
조선에는 1821년에도 콜레라가 창궐했다. 그해 9월 ‘조선왕조실록’에는 “이 병에 걸린 사람 열에 하나둘도 살아남지 못했다”고 기록돼 있다. 치사율이 80~90%에 달했던 것이었다. 1895년에는 콜레라 환자 10명 중 6명이 목숨을 건졌다. 에비슨의 방역은 대성공이었다.
에비슨 선교사의 후손들이 2017년 4월 서울 남대문교회 사료관을 방문해 에비슨 선교사의 사진을 보며 미소짓고 있다. 아래는 1935년 2월 한국을 떠나는 에비슨 선교사 부부가 환송객들에게 손을 들어 인사하는 모습. 국민일보DB
에비슨을 비롯한 의료선교사들이 헌신한 바탕에는 복음이 있었다. “그들(선교사)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음이니, 첫째로 그들에게 이 사랑이 있기에 자기 생명을 돌아보지 않고 이곳까지 왔으며, 만일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일이면 하나님의 자녀들을 도와주는 일을 위해 생명까지 바칠 각오가 돼 있다. 이를 본 신도들도 선교사들을 찾아 병실에서 환자를 간호하겠다고 자원했고 많은 조선인이 복음에 관심 갖게 됐다.”(기독신보 1932년 5월 4일, 에비슨 박사 소전(16))
1892년 한국 선교사로 부임한 에비슨은 1935년까지 43년간 활동하면서 제중원 원장,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와 연희전문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1900년에는 스탠더드오일을 설립한 석유왕 루이스 H 세브란스(1838~1913) 장로에게 거액을 후원받아 제중원을 증축했다. 이를 통해 세브란스병원의 기틀을 닦았다.
조선의 신분제 타파에도 기여했다. 콜레라 방역에 성공하면서 관리들과 쌓은 신뢰 덕분이었다. 에비슨은 1895년 10월 내무대신 유길준에게 편지를 썼다. “내무대신 각하, 한국의 백정들이 극히 하잘것없는 생활을 하고 있음을 환기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들은 비록 유능한 사람들이고 지능이 남보다 뒤떨어지지 않는다 해도 이들에게 한국에서 남자의 상징인 상투를 틀고 갓을 쓰는 영예로운 관습이 허여되어 있지 않습니다. 조정 내에 도량이 넓고 진보적인 인사가 많은 차제에 감히 이런 상황이 개선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이것은 한국에 있는 모든 외국인의 생각이며 오랫동안 고난받아 온 백정들에게 정의로운 조처가 취해진다면 우리 모두 크게 기뻐할 것을 밝혀 두는 바입니다. 선처를 바랍니다. 귀하의 충실한 종이 씁니다.”
유길준은 당장 이런 내용의 포고문을 썼다. “지금부터 백정을 사람으로 간주한다. 이에 따라 백정은 남자들의 일반적인 관습에 따라 상투를 틀고 갓을 쓸 수 있을 것이다.”(구한말비록 상권, 200~201쪽)
이치만 장로회신학대 교수는 14일 “에비슨 선교사는 조선의 신분제 철폐에 공헌했다”면서 “백정 박성춘이 유길준의 포고문을 보고 갓을 쓰고 도포를 입은 채 잠을 청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고 했다. 이어 “박성춘의 장남 박서양은 우리나라 최초의 의사 7명 중 한 명으로 훗날 독립운동에 참여했다”며 “신분제 철폐가 새 세상을 향한 문을 열었다”고 밝혔다.
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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