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서울타임스] 한국교회에 3·1절은 각별한 의미가 있다. 무엇보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기독교인이 16명이나 된다는 수적 다수가 갖는 상징성이 크다. 전래된 지 35년밖에 되지 않았고 전체 교인이 20만명 정도로 교세가 취약했던 당시 기독교가 3·1운동을 주도했다는 사실은 한국교회의 자랑거리다. 거사 이후 3개월 동안 일제에 의해 기소된 이들 가운데 기독교인의 비율이 21%가 넘었고 운동 과정에서 희생된 신자가 630여명이란 것만 보더라도 얼마나 치열하게 동참했는지 알 수 있다.
3·1운동이 한국 기독교에 던진 함의는 이 같은 외형적 성과에 그치지 않는다. 한국교회는 3·1운동을 통해 유무형의 가치를 얻었다. 기독교는 반유교적인 외래 종교라는 부정적인 인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얄궂게 생긴 서양 코쟁이들이 ‘야소(耶蘇) 귀신’을 믿는 곳으로 여겨지던 교회가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민족주의 발현의 시원(始原)이었기 때문이다. 기독교를 들여온 서양 선교사들이 세웠던 학교와 병원 등이 지역 거점 역할을 하면서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될 수 있었다. 교육과 의료시설은 이후 인권과 자유 평등 같은 민주주의의 기틀로 계승됐다. 무장봉기가 아닌 비폭력저항으로 일관함으로써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던 점 또한 평화를 주창하는 기독정신에 바탕을 둔 것이다. 3·1운동을 견인한 한국의 기독교는 오히려 이를 통해 한 단계 더 고양된 종교로서 자리 잡게 됐다.
그러나 3·1운동 과정에서 한국교회가 얻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소득은 신분과 계층, 지역, 성별, 연령을 뛰어넘어 하나됨을 확인한 것이었다. 양반과 상놈, 어른과 아이, 남자와 여자, 배운 자와 못 배운 자의 구별이 없었다. 교회사 연구자들은 인구의 1.8%에 불과했던 기독인이 전 국민을 뭉치게 했다고 설명한다. 백성과 신민을 넘어선 균등한 근대 시민을 전제로 하는 민족 자각은 기독교가 지닌 민주적 가치와 성경적 신앙에 기반한 것이었다. 3·1운동 100년을 앞두고 작년 초 교단 총회장 등 교계 주요 인사들과 잇따라 인터뷰를 했다. 공통 질문으로 ‘오늘의 교회가 당시의 3·1운동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라고 물었다. 표현의 차이는 있었지만 한결같이 ‘하나됨’이라고 대답했다. 이들은 희생과 헌신을 바탕으로 한 연합과 일치가 3·1정신이라고 역설했다. 그러면서 제2의 3·1운동이 펼쳐져야 한다고 했다. 지난해는 서울시청 앞에서 역대 최대 규모의 3·1절 연합 기념대회가 열렸다. 하나됨을 강조하기 위해 교계 행사 때면 반복됐던 관계자들의 ‘1인 1감투’식의 진행도 없었다. 100년 기념대회 이전에도 한국교회는 3·1절이면 늘 그때를 되새기는 성대한 연합예배를 개최했다. 교회의 절기는 아니지만 그에 버금가는 무게를 두고 3·1절을 맞았다.
보름 남짓 지나면 3월 1일이다. 올해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의 영향 탓에 2019년 같은 대규모의 연합 집회는 예정돼 있지 않다. 전광훈 목사가 주도하는 행사가 그중 눈에 띈다. 그는 3·1절 국민대회에 2000만명이 모이자고 주장했다. 그래야 문재인 대통령을 끌어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전 목사 특유의 과장과 허풍이 섞인 표현이라고 해도 너무 나갔다. 20만, 200만명도 아니고 2000만명을 모으겠다는 구상 자체가 실현 가능성을 제로로 만들어버린다. 한국교회에 면면히 이어져 온 3·1정신을 희화화하는 것은 아닌지 안타깝다.
곧 다가오는 3·1절을 계기로 당시의 정신으로 돌아가야겠다. 이념적 다툼에서 비롯된 한국교회의 초분열과 초갈등의 상처를 보듬어야 한다. 용공과 좌경 시비를 털고 복음과 기도로 3·1절을 맞이해야겠다. 한국교회는 서로를 단죄하고 정죄할 만큼 시간이 없다. 산적한 과제가 산더미인데 언제까지 목회자들끼리, 성도들끼리 이데올로기 싸움을 벌이며 교회를 사분오열시켜야 하나. 101년 전 신앙 선배들의 헌신과 희생을 엄중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정진영 종교국장 jyj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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