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서울타임스]비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지키고 있었다. 부끄럽기도 했고 살짝 한국교회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지난 주말, 전남 여수시 화양면 창무리 독립운동가 윤형숙 전도사 생가를 찾았다. 여수지역독립운동가유족회 오룡(61) 회장과 유족회 윤치홍(79) 독립유공자발굴위원장과 함께였다. “한국교회는 왜 유관순 열사만 있는 거로 알고 있나요”라며 미발굴 교회 여성독립운동가들이 숱하다는 것을 깨우쳐준 독립운동연구가 이윤옥 선생의 정보 제공도 있었다. 그들은 비그리스도인이다.
여수 둔덕동 윤형숙 순교지 기념비. 여수지역독립운동가유족회 윤치홍 발굴위원장(왼쪽)과 유족회 오룡 회장.
100여호 남짓한 창무리는 비봉산에서 흘러내리는 개천을 중심으로 형성됐다. 윤형숙의 생가는 개천 옆 돌담 집이었다. 윤 위원장은 1940년대 윤형숙이 여수읍교회(현 여수제일교회) 전도사로 사역하며 고향 마을까지 와 전도집회를 할 때 따라다녔다고 했다. 그는 윤형숙의 조카뻘이다. 그가 한 단독주택을 가리키며 “이 집이 당시 마을 공회당이자 예배처”라며 “그때는 나도 교회를 다녔다”고 말했다. 지금 마을 안 예장통합 측 산성교회는 윤 전도사의 예배처가 그 뿌리다.
고향 마을의 산성교회. 윤형숙이 이끈 마을 예배처가 모태가 돼 오늘에 이른다.
열사 윤형숙. 여수시, 전남도와 광주광역시 나아가 국가 보훈기관과 독립운동기념관 등이 기리는 그의 업적은 이러하다.
‘전남 여수 창무리 태생. 1919년 3월 10일 광주 수피아여고 재학 당시 독립만세 시위대열에 참가해 태극기를 높이 들고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던 중 잔학한 일경이 휘두른 군도에 왼팔이 잘려나갔으며 그 와중에도 오른팔로 태극기를 집어 들고 대한독립 만세를 더욱 크게 외쳤다. 이 사건으로 실명과 팔 절단의 중상을 당한 채 체포돼 징역 4개월을 받고 4년간 유폐됐다. 2004년 건국훈장에 추서됐다.’
기념탑 왼쪽에는 윤형숙 전도사가 3·1만세 시위에 참여해 일경에게 팔이 잘린 장면이 돋을새김 돼 있다. 태극기 든 손이 군도에 잘려나갔다.
윤형숙의 항일투쟁은 200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윤 위원장 등의 사료 발굴과 지역 역사학계 등이 나서 ‘제2의 유관순’을 발굴한 것이다. 팔이 잘리고, 한쪽 눈을 실명케 한 비극이 정말인가 반문할 정도로 충격을 주는 인물이다. 잘린 팔 대신 다른 팔로 태극기를 들었다는 기록은 민중의 간절한 열망이 더해졌다고 하겠으나 그 역시 역사다.
비그리스도인들의 윤형숙 연구는 한국교회의 빚이기도 하다. 그들의 연구 성과로 사실(事實)이 역사가 됐고 기념조형물이 건립됐으며 건국훈장이 주어졌다.
손양원 목사와 함께 인민군에 희생
윤형숙 전도사 (1900~1950)
윤형숙은 선교사 손에 의해 양육된 신앙인이요 사역자였다. 죽으면 죽으리라 했던 십자가 믿음이었다. 결국, 그는 1950년 9월 28일 좌익 등에 의해 손양원 목사와 함께 여수 미평골짜기 과수원(현 둔덕동 여수새중앙교회 옆)에서 무참히 살해됐다. 주님 영광 드러내기 위해 쓰임받은 하박국 선지자의 기록과 같이 된 하나님의 딸이다.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
전남 여수 창무리 윤형숙 전도사 생가. 여수읍교회에서 사역하며 고향 동네 회당에서 예배를 올렸다.
윤형숙 생가는 어느 정도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개울 옆 돌담은 그때와 하나 다를 바 없다고 윤 위원장이 밝혔다. 윤형숙의 아버지 윤치운은 첫 부인과 사별하고 박씨 부인을 얻었는데 여기서 두 딸을 얻었다. 큰딸이 윤형숙이다. 불행히도 두 번째 부인과도 사별했고 윤형숙은 일곱 살 무렵 새어머니를 맞아야 했다. 못 먹어 코피 등을 자주 흘려 ‘혈녀’라는 아명이 따랐다.
형편이 어려워진 윤치운은 먼 친척 윤성만(전북 남원 동북교회 장로)에게 자매를 보냈고 윤형숙은 여기서 귀하게 자라며 복음을 접했다. 윤성만은 지리산 노고단 선교사수양관에서 일하는 신앙인이었다. 그는 윤형숙을 순천선교부 프레스톤(변요한) 선교사에게 보내 은성학교(현 매산중학) 등에서 교육받게 했다. 광주 수피아학교 진학은 어쩌면 그런 그에게 자연스러운 결과다.
광주 수피아학교 동무들과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 오른쪽 두 번째가 윤형숙 전도사다.
당시 수피아학교는 남궁혁 목사의 부인 김함라와 그녀의 동생 김마리아, 조카 김필례 그리고 열사 박애순(수피아학교 교사) 등 숱한 기독교 독립운동가들이 학생들을 지도했다. 윤형숙은 1919년 3월 10일 오후 박애순 등으로부터 받은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들고 양림동 광주선교부 거리로 나가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리고 팔이 잘렸다. 일경이 3월 11일 자로 일본 육군성에 보낸 전보. ‘전라도 방면 정황: 광주에서 야소교가 주동한 군중 폭동이 일어났으며 이 중 조선인 1명이 다쳐 해산시켰음’.
석방된 윤형숙은 일경의 감시를 피해 함경도 원산 마르다윌슨신학교에서 공부를 계속했다. 그러나 팔과 눈의 증상이 악화하면서 의료기술이 뛰어난 전북 전주 예수병원으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다. 윤형숙은 이후 전북 고창읍교회 부속 유치원 등에서 사역을 계속했다.
윤형숙은 1939년 무렵 고향 여수로 돌아왔다. 호남의 남장로회 학교들이 모두 폐교되고 신사참배를 강요당하던 때였다. 그는 여수제일교회 전도사로 봉산예배당과 창무리 예배처 등을 순회하며 구령에 힘썼다.
고 김충만 국립여수수산대 교수의 생전 증언.
“여수 봉산예배당에서 전도사님을 자주 뵈었습니다. 교회 안 다니는 친구들이 ‘외팔이’라고 놀렸어요. 어느 날 전도사님이 팔 잘린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손에서 태극기가 떨어지자 순간적으로 오른쪽 팔을 뻗어 주우려 했답니다. 그리고 실신했답니다. 해방된 조국에서 사는 너희들은 축복받은 사람들이다. 한데 남북이 갈려 공산당이 있게 됐는데 그들은 참 무서운 존재다.”
김충만과 고 김처녀(전 여수제일교회 전도회장)의 증언은 영상으로 남아 있다. 4선 국회의원이자 창무리 태생인 신순범 전 의원도 2003년 이들과 함께 윤형숙을 회고했다. 김충석 전 여수시장이 녹취했고 그 자리에는 윤형숙의 여동생 맹엽(작고)도 있었다. 기억하는 이들은 윤형숙을 ‘살아 있는 성자’라고 했다.
소고삐 매는 데 쓰인 순교자 碑
1948년 여순사건으로 윤형숙은 또 한 번의 신변 위협을 받았지만, 고향 씨족사회가 그를 지켜냈다. 하지만 1950년 9월 죽음을 피해 조카사위가 있는 여수 금오도 심포리로 피신했다가 내무서원들에 체포되고 말았다. 피체 직전 조카며느리에게 그가 말했다.
“내가 아끼던 성경책이네. 우리 가정에 시집 왔으니 예수 잘 믿게. 그리고 내가 만세운동 때 출옥했더니 누군가 나의 잘린 팔을 수습해 광주 무등산 자락에 묻었다고 했네. 내가 죽거든 꼭 함께 묻었으면 좋겠네”라는 유언이었다. 손양원 목사 등과 함께 200여 명이 처형당한 시신 가운데 윤형숙이 있었다. 외팔이라 쉽게 찾았다. 시신은 수습돼 고향에 묻혔다.
윤형숙 전도사 묘지. 고향 마을 입구에 있으며 비석 상단에 십자가 표식이 선명하다.
여수읍교회 교인들은 ‘고순교자윤형숙전도사지묘’ 비석을 마을로 보냈으나 마을 사람들은 받지 않고 버려두었다. 독립운동가 문구가 없었기 때문이다. 소고삐 매어두는 돌로 사용됐다. 지금은 순교자의 묘역에 세워졌다. 비그리스도인들의 힘이다.
여수·광주=글·사진 전정희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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