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충주시 성봉채플. 부흥사 이성봉을 기념하기 위해 그의 사위 김동수 장로(한국도자기 창업주)가 헌당했다.
“혹시 이곳이 이성봉 목사님 댁입니까.”
초라한 집 문을 두드리자 초라한 아가씨가 나왔다. 나는 그 아가씨가 식모인 줄 알았다. 알고 보니 이 목사님이 그토록 자랑하던 여고 2년생의 막내딸이었다. 훗날 나의 아내가 된 이의숙 권사였다. 목사님은 당시 29㎡(9평) 작은 집에 살며 방 하나와 마루를 개척교회로 쓰셨다. 밥상도 초라했다. 국수 한 그릇과 소금, 보리밥과 한 사발의 김치를 놓고 진심으로 감사하는 기도를 드렸다. 나는 큰 감동을 하였다.
이성봉 (1900~1965)
김동수(83·한국도자기 창업주) 장로의 회고담이다. 1955년 3월 연세대에 입학한 김동수는 부흥사 이성봉(1900~1965) 목사와 절친한 청주 서문교회 장로의 아들이었다. 그는 입학 후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이 목사에게 인사를 드리러 갔다 충격을 받는다. 서문교회 부흥회 때 불같은 말씀을 쏟아내던 풍채 좋은 부흥사의 사는 형편이 너무나 의외였기 때문이었다. 아흔아홉 칸은 못될지라도 반듯한 한옥에서 세 딸과 풍족하게 살고 있을 줄 알았다고 한다.
서울 후생주택 살던 ‘한국의 무디’
이성봉 목사가 살았던 집과 같은 유엔 구호 후생주택. 유엔아카이브 사진
하지만 이성봉은 6·25전쟁 직후 유엔 한국재건위원단(UNKRA) 등이 긴급구호 주택으로 공급한 후생주택에 살고 있었다. 그 무렵 이성봉은 ‘오직 예수, 오직 복음’만이 민족이 살길이라며 ‘임마누엘특공대’를 조직해 전국을 돌며 성회를 가졌다. 예수를 대장 삼아 영적 전쟁을 하고 있었다.
경남 거제도, 전남 신안 증도를 포함해 섬 산간 군부대 도시를 가릴 것 없이 그를 필요로 하는 곳이면 교파를 초월해 찾아갔다. 가는 곳마다 중생과 신유의 역사가 일어났다. 특히 전방 군부대를 대상으로 집중적으로 집회를 열어 세례를 주었다. 당시 그가 주로 쓰던 용어는 토벌 백병전 산악전 시가전 혈전 접전 결전 등과 같은 십자군병 전투 용어였다.
부흥사 이성봉 목사(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와 동료 목회자. 앞줄 왼쪽 두 번째가 순교자 문준경 전도사이다. 1950년 이전 사진.
새내기 대학생 김동수가 후생주택을 방문하기 한 달 전, 이성봉은 문준경(1891~1950) 전도사의 순교 피로 세워진 증도 증동리교회 등에서 집회를 열었다. 잠깐 올라와 휴식 중 김동수가 찾은 것이다.
증동리교회는 1950년 10월 5일 새벽 죽창과 따발총 등으로 무장한 내무서원들이 문 전도사를 “새끼 많이 깐 씨암탉”이라며 처형한 예수 핏값의 예배당이다. 2월 24~27일 이 증동리교회 집회에 대해 이성봉은 “후임 양도천 목사와 백정희 전도사의 독특한 목회로 가시밭의 백합화 같은 곳”이라고 적었다. 백 전도사는 문준경 전도사가 딸처럼 아낀 이로, 문 전도사와 함께 처형되기 직전 눈물의 기도로 살려낸 인물이었다.
건강 악화에도 부축받고 집회지로 가는 이성봉(오른쪽). 1950년대 추정.
당시 이성봉은 연이은 집회에 몸이 쇠약해져 가마에 탄 채 이동하며 집회를 이끌었다. “기력이 너무 쇠하여 불가불 작전상 후퇴를 위계하려니 증동리 성도들이 사랑의 줄에 끌려 교자 태워 가니 생전 처음 호사하고 갈보리 산이 기다리는 듯했다”고 자서전에 남겼다. 이 순교자 교회에서 순직의 영광을 주려는가 은근히 기뻤다는 그다.
천막 교회에 꽉 찬 사람들. 호롱불 아래 밤 집회 모습이다. 1950년대 추정.
그때 증동리교회는 창립 20주년 기념으로 이성봉을 부흥강사로 모셨다. 은혜 충만한 이들은 밭 논 산판 가옥대지 재봉틀을 물질로 내놨고 현금도 60만환이 걷혔다. “딱한 섬경제를 뻔히 아는데 이적이 아닌가”라고 말했다. 그의 집회 어딜 가나 성령 충만한 이들이 금가락지를 사역에 쓰라고 내놓곤 했다.
‘이적’의 부흥강사였지만 이성봉은 평생을 김동수가 본 대로 가난했다. 물질이 생기면 고아나 한센인 등 어려운 이웃에게 털어주곤 했다. 초라한 후생주택에서 시작된 신촌성결교회는 오늘날 복합시설을 갖춘 한국 성결교회의 대표적 예배당이 됐다. 경의중앙선 홍대입구역과 지하철 2호선 신촌역이 코앞이라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다.
이성봉이 그토록 마음 아파하던 증동리교회도 문준경전도사순교기념관을 헌당했다. 기념관에는 이성봉과 문준경이 손을 맞잡고 반갑게 이야기하는 사진이 걸려 있다.
한국교회는 ‘한국의 무디’ 이성봉을 부흥사라는 틀에 가두어 놓으려는 경향이 짙다. 한국 기독교 초기 ‘동양선교회(현 성결교회계열 전신)’의 사중복음 신학이 주류 기독교단 장로회와 감리회 신학에 치이면서 그의 복음주의 신앙관이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했다.
다행히 2000년대 들어 이성봉의 청빈하고 윤리적인 삶에 대한 조명이 이뤄졌다. 그는 어떠한 교권도, 정치적 명예심도 가지지 않고 오직 영혼 구령에만 힘을 쏟은 순전한 그리스도인이었다.
‘임마누엘 특공대’ 조직 영혼 구령
오늘날 전국의 오래된 교회 당회록 등에는 ‘이성봉 부흥 집회’ 기록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기도 제목과 성회 현황, 쏟아진 은혜가 기술돼 있다. 전쟁 직후 가난한 심령들에게 성령의 위로가 오직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시작됨을 알 수 있다. 그렇게 이성봉으로부터 축복 세례를 받은 이들은 1970~90년대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됐다.
논산 강경교회 옛 예배당. 이성봉 목사 집회 때 ‘고아의 어머니’ 유을희의 회심 장소다.
“동리에서 버림받고 몸은 썩고 문드러지는 그들에게 복음을 줄 때 진정한 사랑, 참된 신앙의 무리가 되어 갔다.”(대전 애경원 등 한센인 집회 후)
“자선이란 미명 하에 고아의 피를 빨고 노쇠의 기름을 짜는 이 시대에 수백의 고아를 하루 같이 기르는 유 부인(유을희 전도사)의 갸륵한 자애심에 주님의 축복이 무한 하실진저.”(대전 유성 고아원 천양원 집회 후)
이달 초, 충북 충주 수안보의 성봉채플. 중원 지방을 여행하는 이들은 수안보온천에서 온천욕을 하고 주일에 이 채플실에 앉아 조용히 예배를 올렸다. 최고 부흥사의 가난을 목격했던 김동수가 장인 이성봉 목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예배당이다. 숲속 교회는 기도와 묵상하기에 좋다.
1950년대 초 이성봉 목사 후생주택서 시작했던 신촌교회 현재 모습.
현재 이성봉을 기리는 자료 등은 서울신학대와 신촌성결교회에 주로 남아 있다. 하지만 그의 간증은 전국 어디에나 있다. 자손들의 환갑 잔칫상 받는 것을 마다하고 찾아가 축복하던 애경원, 유 부인이 손수 삽을 들어 숙소를 지었던 천양원, 휴전선 27사단 집회를 마치고 자동차 기차 기선으로 3일 만에 도착한 경남 삼천포 집회 현장 등의 숱한 이야기가 ‘설교 예화’가 됐다.
그는 또 기차 화통 소리만큼 큰 목소리였으나 잔정이 깊었다. 나이 60세에 미국 집회를 가서 고학하는 고국 학생들 두고 식사 대접 받는 것이 안타까워 “육십 평생 처음으로 내가 손수 밥을 해 먹으며 전도했다”며 우는 자를 향한 마음을 드러냈다.
부흥사 이성봉. 이 열정의 부흥사가 재평가되는 것은 ‘청빈과 윤리적인 삶’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에 바라는 대중의 시선이기도 하다.
·1920년 3년 투병 끝 중생
·1928년 경성 성서학원 졸업
·1928~1937년 목포·신의주교회 등 시무
·1939년 전국부흥사 임명받음
·1941년 재림 설교 이유로 수감
·1955년 신촌성결교회 개척
·1959년 미국 순회전도
충주·대전·신안=글·사진 전정희 뉴콘텐츠부장 겸 논설위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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