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서울타임스] 문익환, 그를 목 놓아 다시 부르다 기사의 사진 구약학의 대가이자 서울 한빛교회 목회자, 성서번역 책임위원이었다가 민주투사와 통일운동가로 나선 문익환 목사(1918∼1994·사진)는 시인이기도 했다. 시인 윤동주의 친구였던 문 목사는 “하나가 되는 일은 더욱 커지는 일입니다”와 같은 경구를 남겼다.
문익환 목사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회와 성동문화재단, 사계절출판사 등은 7일 서울 성동구 성수아트홀에서 ‘두 손바닥은 따뜻하다’란 제목의 평화콘서트를 열었다. 사계절출판사는 최근 같은 제목의 문 목사 시집을 출간했다.
가수 안치환은 “1987년 여름 문 목사를 신촌 거리 장례식에서 마지막으로 보았는데 그는 연설하지 않았고 울부짖었다. 열사들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울부짖었다”고 회고했다. 영화 ‘1987’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이한열 영결식 연설 이야기다.
문 목사는 1918년 윤동주보다 반년 늦게 만주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나 한신대를 졸업하고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공부했다. 한국전쟁 때는 유엔군 소속으로 정전회담의 통역자가 돼 판문점에서 일했다. 1955년부터 한신대 교수와 한빛교회 목사로 활동했다. 1968년 이후 성서번역 책임위원으로 지내다 친구이자 ‘사상계’ 발행인이었던 장준하 선생의 의문사를 계기로 58세였던 1976년 ‘3·1민주구국선언’에 참여하며 반독재투쟁의 전면에 나선다. 이후 6차례 투옥되며 11년 3개월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문 목사 스스로 연고를 의식하지 않았지만 안중근 의사는 명동촌 문씨네 사랑방에서 권총 연습을 했고 독립운동가 이동휘 김약연은 그 동네 지도자였다. 장공 김재준 목사는 학창시절 은사였으며 ‘아리랑’의 나운규는 명동학교 선배였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그의 아버지 문재린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3·1민주구국선언을 함께한 동지였다.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총회는 1918년생 4인방인 문 목사, 장 선생, 서남동 목사, 박봉랑 목사를 ‘기장 믿음의 유산’으로 명명하고 “선배들의 신앙고백은 교회를 건강하게 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었다”고 회고했다.
국민일보 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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