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서울타임스] 네덜란드에서 존 스마이스를 통해 침례를 받은 평신도 지도자 토머스 헬위스(1575∼1616)는 1611년 영국으로 돌아왔다. 헬위스는 당시 몇몇 성도와 런던 템스강 북쪽 스피털필즈에 정착해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역사학자들은 이 교회를 영국에 세워진 첫 침례교회로 평가한다. 침례교의 뿌리를 찾아 유럽 순례에 나선 기독교한국침례회의 유관재 성광교회 목사 등 일행 19명은 지난달 19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을 떠나 영국 런던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영국에서 일반침례교회를 세운 토머스 헬위스의 초상 좌.특수침례교회를 세운 윌리엄 키핀의 초상 우.
스피털필즈에서 피어난 일반침례교회
스피털필즈는 요즘 올드 스피털필즈 마켓과 오래된 골목 벽을 가득 채운 젊은 예술가들의 그라피티(벽 등에 낙서처럼 긁거나 스프레이 페인트를 이용해 그리는 그림)가 인기를 얻으며 ‘힙하게’ 뜨고 있다.
하지만 17세기 당시 이곳은 런던에 진입하지 못한 하층민이 많이 몰려와 살던 곳이었다. 국교인 성공회 교회들이 런던의 주요 거점을 차지하고 있었고, 감리교나 침례교 등 국가교회에 반대했던 교파들은 자연스레 외곽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스마이스와 결별하고 돌아온 헬위스가 이 지역에 정착했다는 역사적 자료는 남아 있지만 관련된 흔적은 찾기 어려웠다.
유 목사는 스피털필즈 마켓 앞에서 순례단 일행에게 헬위스와 일반침례교회의 역사를 소개했다. “헬위스는 국가가 교회에 관여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영국 왕 제임스 1세에게 ‘불법의 신비에 대한 짧은 선언문’을 보냅니다. 헬위스는 ‘왕은 사람이지 하나님이 아니다’라며 침례교회는 물론 모든 사람을 위한 종교의 자유를 요구했습니다. 결국 체포돼서 뉴게이트 감옥에 갇혔고, 1616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헬위스의 뒤를 이어 성도들을 이끌던 존 머튼도 이후 감옥에서 사망했다. 하지만 정부 탄압과 지도자들의 수난에도 불구하고 침례교회는 조금씩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1650년쯤 47개의 교회가 알려졌고, 헬위스가 세상을 떠난 지 100년이 흐른 1715년엔 146개 침례교회가 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영국 베드포드엔 존 번연이 1650년부터 국교회에 맞선 성도들과 모임을 가졌던 번연 미팅 교회가 지금도 남아있다.
칼뱅신학의 영향을 받은 특수침례교회
성공회에 반대한 개혁주의 분리운동가들 중엔 다소 온건한 이들도 있었다. 1616년 런던 서더크 지역에 개혁주의 모임이 생겼다. 헨리 제이컵과 존 래스롭, 헨리 제시라는 세 목회자의 이름을 따서 ‘JLJ 교회’라고 불린다. 그중 ‘유아세례가 성서적이냐’는 논란으로 갈등을 겪다가 떨어져 나온 이들이 1638년 런던브리지 남쪽 서더크 지역에 교회를 세웠다. 오늘날 침례교의 가장 큰 특징이 된 ‘침수례(몸 전체가 물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가 본격 시행된 것도 1640년으로 추정된다.
역사학자들은 존 스필즈버리 등이 주축이 돼 세운 교회를 최초 특수침례교회로 간주한다.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는 일반속죄론을 주장한 일반침례교회와 달리, 이들은 장 칼뱅의 영향을 받아 하나님이 택한 사람들을 위해 그리스도가 죽으셨다는 ‘특수속죄론’을 택했기 때문이다.
스필즈버리와 더불어 특수침례교회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목회자로 윌리엄 키핀(1616∼1701)이 있다. 그는 런던 데본셔 스퀘어에 새로운 침례교회를 세운 뒤 침례를 비롯해 다양한 신학 논쟁을 벌였다. 당시 침례교도들은 정부로부터 끊임없는 핍박을 받는 동시에 침례에 대한 다른 입장 때문에 이단 시비 등에 시달려야 했다.
이들은 공중토론회를 통해 그들을 향한 비판을 반박하는 한편 신앙고백서로 그들이 믿는 것이 무엇인지 선포했다. 가장 유명한 공중토론회는 1642년 10월 키핀이 영국 성공회의 대니얼 피틀리에 맞서 펼쳤던 것이다. 당시 키핀은 유아세례가 왜 비성서적인지, 믿는다고 고백한 이들을 상대로 ‘머리와 귀까지 물에 잠기는 방식’의 침례를 왜 해야 하는지 등을 역설하며 침례교의 정체성을 알려나갔다. 유 목사는 “성경은 믿는 사람들이 침례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유아에게 침례를 줘야 한다는 말씀은 어디에도 없다”며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침례를 줘야 한다는 전통이 자리 잡게 됐다”고 설명했다.
공중토론회와 더불어 침례교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것이 신앙고백서다. 1644년 7개의 특수침례교회들은 그들의 신앙고백서인 ‘제1 런던신앙고백서’를 발표했다. 이들은 1677년 ‘제2 런던신앙고백서’를 발표한 뒤 1689년 침례교회 총회를 열고 이를 재확인함으로써 자신들의 신앙 정체성을 확정했다. ‘1689 런던 침례교 신앙고백 해설서’를 쓴 피영민 목사는 “이 신앙고백서는 제1 런던신앙고백서와 더불어 장로교인들이 작성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회중교인들의 ‘사보이 신앙고백서’의 장점을 취합한 것으로, 이후 미국 침례교가 발표한 ‘필라델피아 신앙고백서’로 활용됐다”고 밝혔다. 침례교가 칼뱅의 개혁주의와 청교도의 영향을 받았음을 신앙고백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유관재 성광교회 목사와 기독교한국침례회 순례단원들이 번연이 수감된 감옥이 있었던 우즈강 타운브리지 앞에서 번연의 삶을 회고하고 있다.
‘천로역정’의 저자 존 번연의 삶을 찾아서
유 목사와 침례교 순례단은 지난달 20일 ‘천로역정’으로 유명한 존 번연(1628∼1688)의 흔적을 찾아 런던 인근 베드포드로 향했다. 번연은 천로역정의 저자일 뿐 아니라 베드포드에서 침례를 받고 설교를 통해 많은 이에게 복음을 전한 인물이었다. 그는 청교도인 아내와 결혼하면서 신앙에 눈뜬 뒤 국교회에 맞서 바른 신앙을 추구하는 삶을 살았다. 번연은 당시 침례교도들이 행했던 주의 만찬을 꼭 침례 받은 자가 아닌 사람에게도 베풀고, 교회 멤버가 되도록 허락해도 된다는 주장을 펼치며 키핀과 지상(紙上)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
현재 베드포드엔 1650년 번연이 국교회에 맞서 사람들과 모임을 가졌던 ‘번연 미팅’ 교회가 남아있다. 뒤쪽 공간은 ‘번연 뮤지엄’으로 활용되고 있다.
유 목사와 순례단은 당시 번연이 비밀회합을 갖고 설교했다는 이유로 수감됐던 현장을 찾아갔다. 현재 감옥터는 사라졌지만 베드포드를 가로지르는 우즈강 타운브리지 한쪽에 번연이 수감된 감옥이 있었다는 사실이 기록돼 있었다. 유 목사는 “당시 번연의 아내가 감옥 앞 스완 호텔에 와서 매일 그를 위해 기도했다고 전해진다”며 “감옥에 수감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고, 12년간 수감된 채 감옥에서 천로역정을 썼던 번연의 삶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큰 도전을 준다”고 말했다.
런던·베드포드=글·사진 김나래 기자 narae@kmib.co.kr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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