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서울타임스] 세계 최대 교회인 여의도순복음교회는 한국교회뿐만 아니라 세계교회의 성장 모델로 손꼽힌다. 오중복음 삼중축복 4차원 영적세계라는 ‘희망의 신학’을 전파한 여의도순복음교회는 한국교회 부흥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한국사회에는 전인구원의 영적 가치와 ‘할 수 있다, 해보자’라는 정신적 원동력을 제공했다. 창립 60주년을 맞은 여의도순복음교회의 태동과 성장, 나눔과 섬김, 세계성령운동과 하나님 나라 확장의 여정을 5회에 걸쳐 살펴본다.
조용기 목사와 여의도순복음교회
1958년 서울 대조동 산기슭 천막교회에서 시작된 여의도순복음교회는 1980년대 세계적인 교회가 됐고 지금은 한 교파, 한 지역교회를 뛰어넘는 세계적인 신앙공동체가 됐다.
한국의 오순절 신앙을 세계에 전파하는 통로가 된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조용기 원로목사의 60년 성역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미국 리젠트신학대 빈슨 사이난 전 학장은 “전 세계 5억3000만명 넘는, 오순절운동과 은사주의운동을 지향하는 교회들은 조용기 목사를 탁월한 영적 지도자로 생각한다”고 평가한 바 있다.
“우리 시대의 걸출한 목회자이자 한국 개신교가 배출한 위대한 영적 지도자”(김호환, ‘장로교 신학자가 본 조용기 목사’)로 추앙받는 조 목사는 1936년 2월 경남 울주군에서 조두천씨의 5남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산공고 2학년 시절 폐병으로 피를 토하던 고통 속에서 예수를 만난 것은 누나 친구가 전해준 성경책 때문이다.
1958년 순복음신학교 졸업식에 참석한 조용기 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목사(왼쪽)와 고 최자실 목사
폐병으로 절망에 빠져있던 소년
각혈을 하던 17세 소년에게 폐병은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성경 속 예수님은 병든 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며 배고픈 자에게 먹을 것을 제시해주는 분이었다. 절망에 빠졌던 그에게 예수는 생명으로 다가왔다. 이후 청년 조용기는 켄 타이스 선교사의 천막부흥회 통역을 도우며 강력한 성령충만을 경험했으며, 목회자가 되겠다고 서원했다. 계기는 통역을 하며 결심했던 금식기도였다.
그는 금식기도 사흘째 되는 날 새벽 2시쯤 갑자기 방안에 불이 붙고 불기둥이 천장으로 솟구쳐 올라가는 환상을 본다. “‘부귀영화는 금방 잿더미가 되고 만단다. 복음을 전하는 데 너의 일생을 바쳐라.’ ‘지는 폐병 환자입니더.’ ‘내가 네 폐병을 고쳐줄 테니 평생 나의 종이 되겠느냐.’ ‘예, 지를 고쳐 주시마 평생 종이 되겠심니더.’”(국제신학연구원 편, ‘여의도의 목회자’)
순복음신학교에서 만난 ‘믿음의 어머니’
청년 조용기는 1956년 9월 켄 타이스 선교사와 리처드 선교사가 써 준 추천서를 들고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소속 순복음신학교에 입학한다. 이곳에서 ‘믿음의 어머니’ 최자실(1915∼1989) 목사를 만났다. 급성 폐렴으로 사경을 헤맬 때 밤새 병 간호를 해준 이도 최 목사였다. 조 목사는 학생회장으로, 최 목사는 전도부장으로 노방전도에 나섰다.
1958년 3월 순복음신학교를 졸업한 조 목사는 최 목사의 간곡한 요청으로 5월 18일 오후 8시 서울 서대문구(현 은평구) 대조동 낡은 천막교회에서 예배를 드린다. 이것이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시작이다. 성도는 당시 최자실 전도사와 그의 세 자녀 성혜(한세대 총장) 성수(여의도순복음 송파교회 전 담임목사) 성광(서울 강남십자가교회 담임목사), 비를 피해 들어왔던 동네 할머니까지 5명이었다. 강대상이라고 해봐야 낡은 사과상자에 보자기를 씌운 것이었다.
조 목사(오른쪽)가 천막교회 성도들과 함께 회심한 무당이 사용했던 무속용품을 태우는 모습
‘할 수 있다, 해보자’ 긍정의 메시지 전파
조 목사와 최 목사는 빈민 지역 공동목회를 하며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던 주민들에게 예수소망을 전했다. 그는 설교 때마다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다. 귀신 들린 여인과 앉은뱅이, 중풍병자가 낫는 기적이 일어나고 무당이 회심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병자가 낫는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대조동 천막교회에 500명 이상이 몰려들었다.
1961년 1월 입대했던 조 목사는 8개월 만에 의병제대 한다. 10월 조 목사와 최 목사는 존 허스톤 선교사와 함께 서울 서대문에 천막을 치고 두 번째 개척교회를 시작했다. 대조동 천막교회에서 서대문 교회로 조 목사를 따라 나온 성도는 소수였다. 어느 날 조 목사는 이런 메시지를 듣는다. “너는 곧 한국 최대의 교회를 세우게 될 것이다.” 당시 한국 최대의 교회는 한경직 목사가 시무하던 영락교회로 교인이 6000명이었다.
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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