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④ 남한산성 외성(봉암성·한봉성) 사진과 함께 하는 병자호란 이야기
1636년 12월 청태종 황태극이 조선을 정벌하기 위해 수도 한성으로 밀고 들어왔다. 12월 14일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여 47일 동안 농성전을 펼쳤다. 이듬해인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삼전도에 가서 황태극에게 항복을 했다.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은 본성 이외에 외성은 없었다. 청군이 가져온 홍이포가 문제였다. 청군은 홍이포를 남한산성 본성 외곽 3곳에 집중 배치하여 조선군을 경악시켰다. 남장대(남성, 남쪽 성곽) 아래(현재의 옹성 3곳이 있는 자리) 평평한 자리 3~4곳에 홍이포 10여 문을 배치하고(현재의 성남시 소재 검단산 정상부가 아님), 동장대 및 장경사신지옹성 바깥 능선인 현재의 봉암성 및 한봉성 능선에 7~8문을 배치했다.
남한산성 본성 밖에서 본성의 성벽 안쪽과 내부를 직접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은 동장대 바깥인 봉암성 능선과 한봉성 능선의 정상부이다. 봉암성 능선에서는 산성 내부를 직접 내려다 볼 수 없고, 한봉성 능선 정상부에는 산성 내부가 직접 관측된다. 병자호란 당시 행궁으로 날아온 포탄이 왕의 업무공간인 현재의 외행전 기둥을 맞춘 것은 한봉성 능선 정상에서 쏜 포탄이었다.
병자호란 당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은 남장대(남쪽 성벽)와 동장대(동쪽 성벽)였다. 이러한 연유로 병자호란이 끝나자 가장 먼저 증축을 한 곳이 남장대 옹성 축성이었고, 봉암성, 한봉성 순으로 신축되었다. 현재 성남시 소재 검단산 정상부에 있는 신남성 돈대는 가장 후대에 축성되었는데, 적이 성남시 방향에서 이 산을 점거하면 남쪽으로 통하는 이배재(이현, 성남시와 광주시를 잇는 고개)가 막히기 때문이었다.
사진과 함께 하는 남한산성 외성인 봉암성과 한봉성의 병자호란 이야기는 봉암성, 한봉선 순으로 진행된다. 봉암성은 남한산성 본성 동장대 암문에서 시작하여 시계방향으로 동림사터, 벌봉, 외동장대터, 동장대 순으로 진행되고, 한봉성은 봉암성이 한봉성과 이어지는 암문에서 시작하여 한봉 정상에서 끝이 난다.
봉암성: 홍이포에 동장대 사령관 깃발이 떨어지다.
봉암성(峰岩城)이 있는 봉우리는 ‘峰岩(봉암)’ 혹은 ‘蜂峯(봉봉)’(벌바위)이라 했다. 이 능선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는 능선 바깥에 있는 벌바위(515m)가 아니라 능선 안쪽에 있는 외동장대터(522m)다. 봉암성 수축 당시 벌바위 바깥을 둘러야 하는지 제외시켜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벌어졌다. 재정, 산성 규모 및 방어해야 하는 병력 수 등에 대해 효율성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외동장대터 정상부에서는 하남시 및 광주시 방향을 모두 관측할 수 없는 단점이 있었다. 결국 벌바위를 바깥으로 두르는 성곽이 구축되었다.
봉암성은 1686년(숙종 12)에 광주부윤 윤지선(尹趾善)이 본성의 보강차원에서 처음으로 축조한 것이며, 1705년(숙종 31)에 2개의 포루를 증축했다. 이 봉암성이 본성과 마주치는 곳에 암문이 만들어져 있으며 또한 벌바위의 아랫쪽에는 봉암으로 통하는 암문이 있다.
봉암성은 남한산성의 본성에 대해 새로 쌓은 성이란 뜻으로 '신성'이라 했다. 또한 동쪽에 있어서 ‘동성’이라고도 하였다. 현재 봉암성의 여장은 대부분 훼손되었지만, 성벽 몸체는 비교적 잘 남아있는 편이다. 성벽은 약 2~3m의 높이만 남아있다.
벌바위 정상부에는 두 곳에 바위가 있는데, 낮은 곳에 있는 바위에 봉암성을 신축한 ‘蜂岩新城丙寅記(봉암신성병인기)’ 암각문이 있다. 새로 쌓은 성이라는 뜻에서 ‘新城(신성)’이라 하고, 1686년(숙종 12년)이 병인년이어서 ‘丙寅記(병인기)’라 붙였다. 마멸이 심해 육안으로는 식별이 불가능하고 탁본으로도 거의 알아볼 수 없는 정도이다.
비문에 의하면, 봉암성은 1686년(숙종 12) 윤4월 1일부터 지금의 봉암성(비문에는 ‘봉암신성’으로 표기)을 쌓기 시작하여 같은 해 5월 9일에 공사를 끝낸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비문의 형태는 자연석 위에 정사각형의 해서체로 음각되어 있으며 비문의 ‘守禦使 尹(수어사 윤)’은 당시 광주유수 겸 수어사인 윤지선(尹趾善, 1627~1704)으로 우의정, 좌의정까지 지낸 숙종의 신임과 총애를 받았던 인물이다. 윤지선의 감독아래 공사 구간을 정해 책임자를 두었음을 알 수 있는데, 한 구간(일소一所)의 책임자(장將)는 전(前) 부사 표모(表某)이고, 또 한 구간(이소二所)의 책임자(장將)는 전(前) 군수 안근(安根)이었다. 일부 판독이 불가능한 곳이 있고, ‘長俊興(장준흥), 宋相僑(송상교), 石之完(석지완)’ 등은 축성에 동원된 장인으로 추정된다.
남한산성 본성의 동장대 아래 암문이 있고, 동장대에서 봉암성으로 연결되는 지점에 암문이 있다. 이 암문이 봉암성으로 연결되는 첫 번째 암문이다.
남한산성 본성 동장대 위에서 바라본 봉암성 성벽. 우측 높은 봉우리가 외동장대터다. 이 지점의 성벽을 지나면 지대가 넓어진다.
산지가 평평하고 넓어진다. 이 지점에서 청태종 황태극이 남한산성을 굽어보고 동장대로 홍이포를 쏘았을 것이다. 1637년 1월 22일, 청군은 강화도 공략과 함께 남한산성 공격을 개시했다. 훈련대장 신경진이 동장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청군이 쏜 홍이포가 동장대 성벽을 무너뜨리고 사령관 깃대를 부러뜨렸다.
넓어지는 구간에서 성벽을 넘어가면 평탄한 곳이 나타난다. 이 평탄 지대에서 한번 더 성벽을 끼고 돌면 동림사가 있었던 곳이다.
동림사 터. 밭으로 변해 있었다. 이정표 있는 곳에 우물이 있다. 동림사 터에서 성벽을 끼고 돌면 벌봉 아래의 암문에 이른다.
동림사 터에서 성벽을 따라 곡성(불쑥 튀어나간 지형에 만든 성벽, '치雉'라고 함) 2~3개 지나면 벌봉 아래의 암문에 이른다.
벌봉 아래의 암문이다. 외부와 내부에서 벌봉 정상으로 성벽이 이어지고 여장(성벽 담장)이 남아 있다. 벌봉 정상에서 외부와 내부의 전경을 보았다.
벌봉 정상. 외부로 검단산이 보인다. 좌측(북쪽)부터 우측(남쪽)으로 검단산, 두리봉, 용마산이다. 이곳에서는 북쪽으로 하남시 전경이, 남쪽으로는 광주시 남한산성면 전경이 들어온다. 내부로 눈을 돌리면 외동장대가 보인다. 벌봉에서 외동장대 터로 내려서면 바위에 암각문이 있다.
봉암신성병인기 탁본(고려금석원 소장). 암석문은 큰 바위 사이에 있는 세로 형태의 직사각형 바위에 있다. 윤지선이 봉암성을 쌓았다.
윤지선(1627~1704) 묘역(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송림리 산 145-1 소재). 묘비, 상석, 망주석이 남아 있다. 묘비 뒷면에는 간략한 이력이 음기되어 있다. 본관은 파평, 아버지는 이조판서 윤강이며, 우의정 윤지완의 형이다.
암각문에서 내려서면 아래로 성벽이 이어지면서 다시 위로 이어진다. 외동장대터다. 평평하다. 이곳에서 한봉으로 가다보면 외동장대 암문을 만난다.
봉암성 외동장대 암문이다. 이 암문에서 한봉으로 가다보면 한봉성과 이어지는 암문을 만난다.
봉암성과 한봉성이 만나는 지점의 암문이다. 이 지점의 암문 성벽은 돈대를 연상시킨다. 안쪽이 상당히 넓다. 100명의 군사가 방어할 수 있는 규모이다. 봉암성과 한봉성을 최초 신축할 때 한봉성의 한쪽 돈대가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이곳에서 남한산성 본성의 동장대로 진행한 다음, 한봉성으로 가기 위해 이곳으로 다시 되돌아 온다.
외동장대 터에서 본성 동장대 방향으로 바라본 성벽 안쪽 모습. 평평하다. 이제 동장대 방향으로 좁은 구간의 성벽으로 간다.
남한산성 본성 동장대 성벽과 봉암성 성벽이다 . 이곳에서 청군이 공격해 들어갔다. 성벽이 무너지고 흙이 무너져 내렸다. 조선군사들은 성벽을 흙으로 메웠다. 흙벽을 얼게 하기 위해 망월사에서 물을 퍼다가 들이 부었다. 이 지점에서 한봉성 방향으로 이어지는 봉암성 성벽을 보았다.
봉암성의 남쪽 성벽이다. 이 성벽을 따라 가면 한봉성과 연결되는 성벽을 만난다.
한봉성: 행궁으로 홍이포를 쏘다.
<숙종실록>과 <영조실록>을 종합해 보면, 한봉성(汗峰城)은 봉암성 동남쪽에서 한봉(汗峰) 정상까지 이어진 외성이다.
병자호란 이후 봉암성을 신축한 광주부윤 윤지선이 봉암성 축성 완료 후 한봉까지 이어 신축하려 했다가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1693년(숙종 19)에 수어사 오시복이 현재와 같은 일직선으로 연결된 성벽이 아닌 좌·우 돈대 2개(봉암성에서 한봉으로 연결되는 지점과 한봉 정상 지점으로 추정)를 신축을 했는데, 서로 연결하여 쌓지는 못했다. 두 개의 돈대가 신축된 이후 청나라 사신이 1705년(숙종 31)에 와서 한봉성을 헐었고, 1739년(영조 15) 수어사 조현명이 다시 개축했다. 이후 1751년(영조 27) 광주유수 이기진이 한봉성 도면을 가져다가 영조에게 보여주고 한쪽은 쌓지 않았다 하여 이듬해인 1752년(영조 28) 두 돈대를 쌓았다. 한 돈대에 100명의 군사가 주둔할 수 있는 규모였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현재와 같은 일직선으로 연결된 성벽은 그 이후에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봉암성이 한봉성과 만나는 암문이다. 이곳에서 한봉으로 가다보면 한봉성 암문을 만난다.
한봉성 암문이다. 한봉으로 계속 진행해 나가면 튀어나간 지형에 쌓은 성벽인 '치'가 있다.
한봉성 '치' 위에서 바라본 봉암성 능선. 한봉 정상으로 이어진 성벽은 예전 그대로 남아 있다.
이 성벽을 지나면 한봉 정상이다.
한봉성 정상이다. 돈대처럼 둘렀다. 장경사신지옹성 및 동벽이 훤히 들여다 보인다. 이곳에서 남한산성 본성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있다. 영원사로 내려서면서 동장대 및 봉암성 능선을 보았다.
영원사에서 바라본 동장대와 봉암성 능선. 병자호란 당시 청군이 이곳에서 동벽을 공격했다. 별장 이기축이 장경사에 주둔한 군사들을 동원하여 방어했다.
[방위산업전략포럼 권순삼 전쟁사위원장 kwonsanha@naver.com]
[뉴서울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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