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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행] 남한산성 행궁...홍이포에 기둥이 부러지다!

등록일 2017년09월08일 13시15분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3]-③ 남한산성 행궁 및 내부 시설 사진과 함께 하는 병자호란 이야기







 

1624년(인조 2) 1월 24일~4월 1일, 조선은 도성이 점령당하는 전대미문의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는 공주로 피난을 떠났다. 화들짝 놀란 인조는 3개월 후 남한산성 수축을 명하여 총융사 이서가 동년 7월에 성을 쌓기 시작하여 2년 후인 1626년(인조 4) 11월에 완성하였다. 임금이 머무는 행궁은 1625년 6월 이후에 공사를 시작하여 1년 후인 1626년 11월 남한산성 성곽 완료와 더불어 끝이 났다.
 

남한산성 성축과 행궁 수축이 완료된 2개월 후인 1627년 1월 13일 후금이 침입하여 동년 3월 3일에 물러갔는데, 정묘호란이다.
 

남한산성 수축 시점인 1624년 7월은 후금의 침입 가능성이 높은 시점은 아니었다. 결국 외부의 적보다는 내부의 적을 두려워하여 남한산성을 수축한 것이다. 이런 연유로 행궁 역시 대대적으로 축성하지 않고 임금의 침소인 내행전과 업무 공간인 외행전을 짓게 되었다. 현재와 같은 남한산성 행궁 시설은 병자호란(1636년 12월 9일~1637년 1월 30일)이 끝난 후 대대적으로 수축된 것이다.
 

남한산성 성곽(본성 및 옹성)은 총융사 이서가 축성하였고(본지 2017년 8월 28일), 4대문을 갖춘 길이 약 11km 규모의 산성이다(본지 2017년 9월 4일 기사).
 

사진과 함께 하는 남한산성 행궁 및 내부 시설의 병자호란 이야기는 행궁, 사찰, 서흔남 묘표  순으로 진행한 다음, 병자호란 이후의 남한산성 이야기가 이어진다.








행궁: 하루 한끼 쌀 한 움큼과 닭다리 하나로 끼니를 떼우다!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 행궁은 서장대 아래 비탈진 곳에 상단, 하단으로 나누어 상단에는 임금의 침소인 내행전을 성축한 다음 상궐이라 하고, 하단에는 임금의 업무 공간인 외행전을 만들어 하궐이라 하였다. 외행전으로 드나드는 문이 있었는데, 현재의 외삼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남한산성 축성이 끝난 후 병자호란 발발 시까지 외행전은 광주목사의 업무공간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군량 및 곡식 창고 대부분은 산성 아래 두었다. 행궁의 나머지 부속 시설 거의 대부분은 제19대 숙종(재위 1674∼1720), 제22대 정조(재위 1776∼1800), 제23대 순조(재위 1800~1834) 때 만들어졌다.






외삼문, 외행전, 내행전(하단에서부터). 병자호란 당시 청군에 의한 홍이포 발사는 주로 봉암성이 자리한 벌봉 능선의 평탄지대, 한봉성이 자리한 한봉 정상부, 남장대 옹성(제2남옹성)의 망월대 및 능선부에서 이루어졌다. 한봉 정상부에서는 행궁이 그대로 보인다. 이곳에서 청군이 쏜 홍이포탄이 행궁 외행전 기둥을 맞추었다.




남한산성 행궁 동편에 있는 좌전(종묘, 조상 신에 대한 제사)과 우실(사직, 곡식 신에 대한 제사). 좌전, 우실은 1711년(숙종 37)에 건립되었다.




 

사찰: 남한산성 건설의 주역, 승군들이 머물던 자리 



사찰 공사 부역은 주로 승려가 맡았다. 승려 각성(覺性)이 도총섭(都摠攝)이 되어 8도의 승군을 동원하였고, 이들의 뒷바라지를 위하여 이전부터 있던 망월사·옥정사 외에 개원사·한흥사·국청사·장경사·천주사·동림사·남단사 등 7사(寺)가 창건되었다. 현재는 국청사·개원사·장경사·망월사가 남아 있다.
 

개원사에는 인조의 장인 장유, 도승지 이경직, 대청황제공덕비문을 쓴 대사헌 이경석, 전 형조판서 이안눌이 거처하였다. 이 절에는 승려 삼인, 호열이 거처하였는데, 승려 삼인은 소와 말을 각 1마리 씩 바치고 호열은 꿀 3두를 바쳤다. 또한 한흥사에는 승려 희안이 있었으며, 종이 40권, 산채 및 나복채(무나물) 각 1가마니 씩 바쳤다. 국청사 명칭은 도총섭 각성이 직접 지었다.






남한산성 서벽 연주봉 옹성 아래에 있는 국청사. 도청섭 각성이 직접 지은 사찰 이름이다.






남한산성 남벽 남장대 아래에 있는 개원사. 형제 이경석·이경직이 함께 묵었던 곳이다.








이경직 묘역(중: 이경직 묘, 위: 부친 동지중추부사 이유간 묘, 아래: 아들 상주목사 이장영 묘. 서울시 관악구 남현동 소재). 묘역 아래에 이경직 신도비가 있다. 비문은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 함께 있었던 영의정 김류가 지었고, 글씨와 머릿글(두전)은 3남 이정영이 쓰고 올렸다.   


 

별장 이기축은 최초 북장대에 배치되었다. 장경사 구간 동벽을 방어하는 지휘관의 통솔능력이 떨어져 이기축이 재배치되었다. 1637년 1월 말경, 한봉 주둔 청군의 공격에 장경사에 주둔 중인 병사들을 동원하여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다.




1637년 1월 말, 벌봉에 주둔하고 있던 청군이 동장대 진영을 공격했다. 홍이포에 성벽이 무너지고 깃발이 부러졌다. 동장대 사령관 신경진이 천자포를 쏘아 청군을 밀어냈다. 몇일 동안 공방전이 벌어졌다. 성벽을 받치고 있던 흙도 무너져 내렸다. 신경진은 병사들에게 흙담을 쌓게 했다. 흙이 얼어 물이 필요했다. 병사들은 망월사로 내려가 물을 퍼다 날랐다. 흙담이 완성되자 청군이 공격이 또다시 시작되었다.


   



서흔남: 노비, 포위망을 뚫고 근왕병에게 알리다! 

 

서흔남은 수어사 이시백 휘하에 있던 부하(아병牙兵, 대장 휘하에 속한 병사)가 거느린 노비(사노私奴)였고, 기와를 굽던 와장(瓦匠)이었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서흔남은 영리하면서 용맹했으며 신체 또한 건장했다. 낮에는 출전하고 밤에 산성을 빠져 나가 정탐을 했다. 

서흔남은 47일 동안 남한산성에 있으면서 세 번 청군의 포위를 뚫고 산성을 나가 8도 근왕병에게 왕의 명령을 전하고 장계를 받아 돌아왔다. 1636년 12월 26일 이전에 한 번 나갔으며, 이때는 헌릉(獻陵)을 살펴보기 위해 성을 빠져나갔다가 청군 진영을 정탐하고 돌아왔다. 두 번째로 성을 빠져 나간 것은 1637년 1월 7일이었는데 승려 두청과 함께였다. 그리고 1월 27일 기록에는 이때까지 총 3차례 성을 나갔다고 한 것으로 보아 1월 7일~1월 27일 사이에 한번 더 성을 빠져 나간 것으로 보인다.   

  
서흔남은 1637년 1월 7일 두 번의 정찰 활동에 대한 공이 있었지만 과거 시험 논의에서 인조가 시험에는 응시하지 못하게 했다. 동월 27일 기록에는 '훈련원 주부  서흔남'으로 되어 있어 그 사이에 과거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한 것으로 보인다.


훈련원 주부(종6품) 서흔남은 병자호란이 끝난 해인 1637년 2월 22일 부사용(중앙군 5위 소속 종9품), 12월 25일에는 서북만호(종4품, 중령, 대대장)로 승진되어 이듬해 1월 20일 인조에게 하직 인사를 올리고 임지로 떠났다. 1642년 5월 1일에는 훈융 첨사(종3품, 준장급, 여단장)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인조가 서흔남에게 궁시를 내려 전달하게 했다.  
 
숙종대왕행장(숙종 재위기간 1674~1720)에는 서흔남의 자손 중 관직에 있다가 파직된 후손이 있으면 다시 불러들여 임용하라는(수용收用) 기록이 있어 조정이 서흔남의 공로를 잊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서흔남과 관련된 전설 중에는 인조가 남한산성 남문으로 들어올 때 서흔남이 업고 들어와서 인조가 입고 있던 곤룡포를 하사받았다는 것이 있다. 기록에는 인조가 입고 있던 옷을 하사받은 사람은 선전관 민진익이었다.


인조가 1636년 12월 14일 남문으로 들어올 때는 관료 및 내관들과 함께 들어왔다. 그리고 14일이 지난 동월 28일 선전관 민진익이 청군이 포위망으로 만들어 놓은 송책(松柵)을 뚫고 각 도의 군중에 명을 전하고 이날 장계를 받아 돌아오자 인조가 입고 있던 옷을 벗어 하사하고 6품 실직을 받았다. 민진익은 후에 경기수사 겸 경기·충청·황해 3도 수군을 총괄하는 통어사에 올랐다.

서흔남은 사후 남한산성 동문 아래 검복리 병풍산(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검복리)에 묻혔는데, 후손들이 파묘하여 화장해버렸다. 남아 있던 묘표는 남한산성 동문 안쪽 지수당 연못가 서북쪽에 옮겨 놓았다.








남한산성 동문 안쪽 지수당 연못가 서북쪽에 ‘가의대부동지중추부사서공지묘(嘉義大夫同知中樞府事徐公之墓)’ 및 깨진 비석의 묘비가 세워져 있다. 2개 모두 서흔남의 묘비다. 



 

병자호란 이후의 남한산성 이야기


숭렬전

숭렬전은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을 모신 곳으로 1638년(인조 16)에 건물 이름을 ‘온조왕사’로 건립한 건물인데 1795년(정조 19)에 정조가 ‘숭렬전’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남한산성을 쌓을 당시 총책임자였고 1636년 12월 병자호란 때 싸우다 죽은 총융사 이서의 위패를 함께 모셨다.




남한산성 숭렬전. 온조왕과 총융사 이서를 함께 배향하고 있다. 행궁 위쪽에 있다.



현절사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의 화의를 거부하고 결사항전으로 맞선 뒤 인조가 항복한 뒤에 청나라 심양으로 끌려가서 죽임을 당한 세 명을 삼학사라 한다. 병자호란 당시에는 이름 드러내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비판을 받았다. 1674년 송시열이 이들 3명에 대해 <삼학사전(三學士傳)>을 지은 이후부터 ‘삼학사’라 부르게 되었고, 충신·열사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삼학사 중 정언(사간원 정6품) 홍익한은 평양에 있었고, 부수찬(홍문관 종6품) 오달제와 겸문학(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정5품) 윤집은 남한산성에 있었다. 

조정에서는 평양에 있던 홍익한을 평양서윤으로 임명한 다음 평안도사에게 체포하여 심양으로 압송하게 했다. 홍익한은 심양에 2월 2일 도착하여 3월 5일 청군에게 죽임을 당했다.


오달제와 윤집은 1637년 1월 28일, 청군 진영으로 가기 위해 인조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서문을 나섰다. 이조판서 최명길과 체찰사 중군 이영달이 이 둘을 포박하여 청군에게 인도했다. 이들은 심양에 도착한 후 4월 19일 심양성 서문 밖에서 처형당했다.


이들 죽음 대한 첫 번째 소식은 1637년 9월에 청을 다녀온 사신단에 의해 알려졌다. 이후 이들 3학사 윤집·홍익한·오달제의 넋을 위로하고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1688년(숙종 14)에 현절사라는 사당을 세우게 되었으며, ‘현절사’ 현판은 1693년(숙종 19)에 내렸다. 그리고 척화파의 중심인물인 예조판서 김상헌(훗날 좌의정, 조선 후기 안동김씨 세도가문 시초)과 이조참판 정온(병자호란 후 모든 관직을 내려놓고 고향 경남 거창으로 낙향함)을 함께 모시면서 1711년(숙종 37)에 현 장소로 옮겨 지었다.




현절사 후면에서 바라본 남장대.



금석문: 남옹성무인기(南甕城戊寅記)

옹성(甕城)은 중요한 성문 밖이나 안쪽을 둘러막은 시설물로 적이 직접 성문이나 성벽에 접근하는 것을 차단할 목적으로 설치한 시설물이다. 남쪽 성벽에 옹성을 축성한 년도가 ‘戊寅 七月’(무인년, 1638년)이라 기록되어 있어 남옹성무인기(南甕城戊寅記)라 부르고 있다. 현재 남한산성 제2남옹성 홍예문 근처에서 발견되었다.

비문은 총 105자인데 축성을 맡은 감독관의 관직과 이름, 동원된 장인의 이름과 인원수를 파악할 수 있다. 감독관은 정언(사간원 정6품) 관직을 가지고 있으면서 수어사 이시백의 종사관이었던 홍전(洪瑑, 1606~1665)인데, 책임감 및 활쏘기·말타기 등 무재가 뛰어났으며 특히 대포 쏘는 기술이 능하여 수어사 이시백이 옹성 축성 총괄책임자로 홍전으로 정하자 인조가 특별히 광주부윤으로 승진시켰다. 남옹성 축성에 동원된 인력은 목수의 경우 양남 등 74명, 석수는 강복 등 73명, 야장(冶匠, 대장장이)은 이기탄 등 2명, 니장(泥匠, 흙벽장이)은 김돌시 등 7명으로 기록되고 있다.
 
남한산성 남장대(당시에는 남별대(南別臺), 남격대라 칭함) 일원에 대한 수축 논의는 1638년 1월 26일에 있었다. 수축은 옹성(당시에는 이곳을 망월대라 칭한 것으로 추정)부터 시작하여 7월에 완공하였고, 10월 16일에는 남문루가 증축 완공되었다.






남한산성 제2남옹성 축성 비석 및 탁본(고려금석원 소장). 




남한산성 제2남옹성을 축성한 홍전 묘역(경기도 양주시 은현면 도하리 풀무골 남양홍씨 묘역 내). 증조는 홍여겸, 조부는 홍식, 큰아버지는 홍우경, 아버지는 홍우식, 홍우경(선조 사위, 정인옹주)은 4촌 형이다.



금석문: 남성신수기(南城新修記)

남성신수기는 남한산성 수어장대~서문 사이에 있다. 1779년(정조 3) 봄에 남한산성을 증·개축하기 위한 당시 수어사 서명응(1716~1787, 약봉 서성의 5세손, 영의정 서명선의 형)의 건의와 공사에 참여한 광주부윤 이명중(1712~1789, 영의정 이유 손자, 영의정 김재로 사위. 이유 묘역은 서울 강남구 수서 전주이씨 광평대군파 묘역 내에 소재) 이하 여러 관리들의 명단, 그리고 공사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성 안의 백성이 술을 빚고 개를 삶아 위로하며 어린 남녀들도 회와 벽돌을 이고 지고하며 공사를 도와 50여일이 걸렸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성안 마을사람들까지 공사에 참여한 것을 알 수 있다. 공사는 그 해 6월 18일 완공되었다.

재원은 정조의 최측근이자 최고 권력자였던 홍국영이 수어사 직책을 맡고 있었을 때 저축한 돈 1만 꾸러미 및 정조가 지시한 쌀 9백석으로 마련되었다. 남성신수기는 서명응이 짓고 이명중이 글씨를 썼다.









남한산성 남성신수기 및 탁본(고려금석원 소장). 남성신수기는 남한산성 수어장대와 서문 사이에 있다. 바위가 나란히 있는 병암(屛岩)이다. 남성신수기에 의하면 오른쪽 바위의 글씨는 총융사 이서에 의해 최초 남한산성 축성이 완료된 후 누군가에 의해 새겨진 것이다. 왼쪽 바위에 새겨진 것이 남성신수기이다. 



금석문: 주필암(駐蹕巖)

왕이 행차하는 노상에 수레를 잠시 세워 머무는 것을 주필(駐蹕)이라 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바위에 '駐蹕'이라 새긴 것이 주필암이다.

이 주필암은 남한산성 동문 밖 200m 지점 계곡 중간에 있다. 조선 제22대 정조는 1779년(정조 3, 기해년) 8월 3일 남한산성을 행차하여 환궁한 후 이를 기념하기 위해 동월 24일 수어사 서명응과 논의를 통하여 직접 '기해주필(己亥駐蹕)'이라는 제목 및 건립 장소 '산성 동남문'을 정한 다음 이듬 해인 1780년 5월 26일 수어사 김종수(1728~1799, 훗날 대제학, 좌의정 역임, 묘역은 경기도 의왕시 고천동 소재, 우의정 김구 손자, 부자 영의정 김재로·김치인과 형제 정승인 영의정 김상로·좌의정 김약로의 일가)에게 자신은 글씨를 잘 쓰지 못하니 ‘기해주필(己亥駐蹕)’ 넉 자를 써서 새기게 하고, 그 아래에 ‘수어사 신 봉교서(守禦使臣奉敎書)’라고 글씨를 써서 새기도록 지시했다. 






남한산성 동문 밖에 있는 주필암이다. '기해주필', '수어사 신 김종수 봉교서'라 되어 있다. 



금석문: 수어서대(守禦西臺)

남한산성 수어장대(서장대) 한 구석에 매바위가 있다. 수어서대(守禦西臺) 글씨 좌측의 위·아래에 낙관이 하나씩 있는데, 위의 것은 음각이고, 아래 것은 양각으로 전서(篆書)로 되어 있다. 낙관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네이버 블로그 '소초사 산중일기' 운영자가 사료를 찾아가며 연구한 끝에 찾아낸 낙관의 주인공은 1809년에 병조판서를 지낸 박종경(朴宗慶)이라는 인물이다. 

박종경(1765년~1817년)은 본관은 반남, 호가 돈암(敦巖)이다. 누이는 순조의 생모인 수빈(綬嬪)이다. 영의정을 역임한 심상규(1766년~1838년)와 동시대 인물이다. 남한산성 내의 송덕비 중에 심상규 송덕비가 있다.

박종경은 1800년 문과 급제 후 총융사, 1809년 병조판서를 지낸 후 이조판서, 훈련대장, 호조판서, 어영대장, 좌참찬을 거쳐 국가의 군사 업무와 정치 전반을 총괄하는 군국기무(軍國機務) 및 지방의 특산물을 나라에 바치는 현물세를 관장하는 공부(貢賦)까지 장악하여 권세를 누렸다.






수어서대(守禦西臺) 글씨 좌측의 위·아래에 낙관이 하나씩 있다. 위의 네 글자는 '돈암재무(敦巖宰武)', 아래 글자는 '박종경(朴宗慶)'이다. 돈암(敦巖)은 박종경의 호이다. 재(宰)는 재상이고, 무(武)는 무관직이니, 재무(宰武)는 병조판서를 의미한다. 박종경이 1809년 병조판서 때 글을 새긴 것이라 추정된다.



금석문: 탁지부(度支部)

탁지부 측량소 삼각점은은 1908년~1910년 대한제국 말기 탁지부(度支部)에서 토지조사사업을 시행하기 위하여 건국 이래 최초로 경기도와 경상북도 일부 지역에 지적세부측량의 기준이 되는 삼각점을 설치했다.
 

그러나 1910년 8월 경술국치 후 조선총독부에서 전국적인 토지조사사업을 시행하기 위하여 조선 전역에 삼각점을 설치하면서 이와 구별하기 위해서 탁지부(度支部)에서 설치한 삼각점을 구소삼각점(舊小三角點)이라 하였다.​​

이곳에 있는 구소삼각점(舊小三角點)은 '장대(將臺)'​라고 불리며, 머릿부분에 ‘十’가 새겨져 있고, 전면에는 ‘탁지부(度支部)‘, 후면에는 삼각점(三角點)이라고 음각되어 있다.

현재 탁지부(度支部)에서 설치한 구소삼각점은 전국에 10여 개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한산성 수어장대 우측 뒤편에 있다. '탁지부(度支部)'라 음각되어 있다.



남한산성 비석군(碑石群)

남한산성에는 18~20세기 무렵 세워진 39기의 비석이 있는데 그중 30기의 비석이 남문 아래에 있다. 원래 이 자리에 있던 비석 19기와 남한산성 행궁 복원사업에 의해 이전시킨 11기를 한 곳에 모아 정비한 것이다. 광주유수를 거쳐 대제학·이조판서·영의정을 지낸 조선 후기의 문신 심상규(1766~1838)의 비를 포함하여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푼 역대 광주유수·수어사·부윤·군수들을 기리는 송덕비들이다.






남한산성 남문을 들어서면 우측 및 아래에 역대 광주유수·수어사·부윤·군수들의 선정비가 있다.




[방위산업전략포럼 권순삼 전쟁사위원장 kwonsanha@naver.com]
 



[뉴서울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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