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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기행] 남한산성...치욕의 현장에 서서!

등록일 2017년09월04일 11시50분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3]-② 성곽(본성 및 옹성) 사진과 함께 하는 남한산성의 병자호란 이야기!









남한산성! 역사의 굴욕이 시작되다!

 

남한산성은 역사적으로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의 성터였다고도 한다. 이후 신라 문무왕 때 쌓은 주장성(晝長城)의 옛터를 활용하여 1624년(인조 2) 1월에 일어난 이괄의 난을 계기로 동년 7월에 현재와 같은 폐곡선 형태의 본성을 대대적으로 축성하여 2년 후인 1626년 7월에 완공하였다. 이 축성 기간에는 현재와 같이 본성에 딸린 옹성, 봉암성, 한봉성, 신남성은 없었다. 또한 광주목의 군량 및 무기, 땔감, 말먹이 창고 역시 남한산성 안으로 들이지 않고 예전 그대로 산성 아래에 둔 상태였다. 산성으로 들어온 사람들이 먹을 양식은 하루 한 끼 정도로 50여 일을 버틸 수 있는 정도였다. 인조는 남한산성에 들어간 이후 매일 쌀 한 움큼과 닭다리 하나로 끼니를 떼웠다. 
      

병자호란이 끝난 후 조선은 청군이 남한산성 공격 시 주요 거점으로 삼았던 곳에 옹성 및 외성인 봉암성, 한봉성, 신남성을 구축했다. 병자호란 발발 이전 조선은 청군이 대포를 사용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지만 병자호란 당시 청군은 대포(홍이포)를 사용하여 조선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봉암성, 한봉성, 신남성이 구축되어 있는 정상부는 남한산성 본성을 훤히 들여다 볼 수 있는 곳이며, 남한산성 내의 어느 곳이라도 정확하게 타격할 수 있는 지점이었다. 대포가 아니었다면 이 세 곳에 굳이 성곽을 축성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사거리가 그만큼 늘어난 양상이 되었다.
 

1847년(헌종 13)에 홍경모가 편찬한 경기도 광주시 읍지인《남한지》에 따르면, 원래 심기원이 축성을 맡았으나 부친상으로 인해 이서가 총융사가 되어 공사를 시작하였다. 공사의 부역은 주로 승려가 맡아 하였다. 승려 각성(覺性)이 도총섭(都摠攝)이 되어 8도의 승군을 동원하였고, 이들의 뒷바라지를 위하여 전부터 있던 망월사·옥정사 외에 개원사·한흥사·국청사·장경사·천주사·동림사·동단사 등 7사(寺)가 창건되었다. 현재는 장경사 만이 남아 있다.


병자호란 이후 순조 때에 이르기까지 성내의 시설 확장은 계속되었다. 임금이 거처할 행궁 및 이에 따린 부속 건물, 광주목의 지방장관인 목사가 업무를 보는 관아 및 이에 따린 부속 건물이 계속해서 들어섰다.





현재 남한산성 본성 길이는 약 9km, 옹성 길이는 약 2.7km로 모두 11.7km이고, 외성인 봉암성 길이는 약 2.12km, 한봉성 길이는 1.09km이며, 신남성 길이는 동돈대(현재 KT 중계소 위치) 134m, 서돈대(현재 군부대 위치) 121m이다.


옹성과 외성의 축성 순서는 옹성, 봉암성, 신남성, 한봉성이다. 옹성 축성은 병자호란이 끝난 이듬 해인 1638년에 있었고, 봉암성은 1686년(숙종 12)에 쌓았다. 신남성은 병자호란 이전부터 있었다고 하는데, 1719년(숙종 45) 수어사 민진후가 개축하였다. 이 시기에는 연결되어 있었지만, 1752년(영조 28) 광주유수 이기진 건의로 축조할 때는 두 개로 분리하였다. 한봉성은 1753년(영조 29)에 쌓았다. 
 

남한산성의 수비는 처음에는 총융청에서 맡았다가 성이 완성되자 수어청이 따로 설치되었고, 여기에는 전·좌·중·우·후의 5영(營)이 소속되었는데, 전영장(前營將)은 남장대(南將臺)에, 중영장은 북장대에, 후영장과 좌영장은 동장대에, 우영장은 서장대에 진(陣)을 쳤다. 현재는 서장대(수어장대守禦將臺라고도 함) 하나만이 남아 있다.


병자호란 발발 전, 수어사(守禦使) 이시백이 축성 뒤에 처음으로 유사시에 대비할 기동훈련의 실시를 건의하여, 1636년(인조 14)에 1만 2,700명을 동원하여 훈련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그 해 12월에 막상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여러 가지 여건으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성문을 열어 화의(和議)하고 말았다. 결국 막대한 비용과 노력을 들여서 쌓은 성이었으나 제구실을 하지 못한 뼈아픈 역사(役事)였다.
 

남한산성은 1963년 사적 제57호로 지정되었으며, 2014년에는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사진과 함께 하는 남한산성의 병자호란 이야기는 인조가 남한산성에 들어온 남문에서 시작하여 시계방향으로 남문~서문, 서문~북문, 북문~동문, 동문~남문으로 진행된다.





남문~서문: 준비되지 않은 자, 치욕스런 굴욕의 시작과 끝



인조는 1636년 12월 14일 늦은 밤에 소현세자와 함께 남한산성 남문을 들어섰다. 이듬 해 1월 30일 서문을 나서기 전 47일 간의 농성전이 시작되었다. 영의정 김류, 좌의정 홍서봉, 우의정 이홍주, 평화협정 주화파 대신 이조판서 최명길, 전쟁불사 척화파 대신 예조판서 김상헌, 남한산성 축성 책임자 겸 총융사 이서, 수어사 이시백, 훈련대장 원두표, 어영대장 신경진, 공조판서 구굉,  수원부사 구인후가 있었다. 1만3천 병력으로 농성전을 준비했다.


남문(지화문)은 수원부사겸 방어사인 구인후(시호 충무공)가, 남장대 및 남벽은 작은 아버지인 구굉이 맡았으며, 서장대 및 서벽은 수어사 이시백이 지휘했다. 이시백 휘하에는 이시백 휘하의 병사가 거느린 노비이자 기와를 굽던 서흔남(소설가 김훈의 남한산성에서는 서날쇠)이 있었다.

남한산성으로 들어온 지 17일 만인 12월 30일, 식량이 바닥나기 시작했다. 관료를 비롯한 모든 이들의 급료가 삭감되었다. 이때부터 화친하자는 논의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1월 8일에는 창고에 쌀이 한 석 밖에 남아 있지 않아서 노비들에게 벼를 찧게 했다. 1월 23일에는 땔감이 없어 개원사의 행랑과 광주목의 감옥을 뜯어서 밥을 짓고 불을 땠다.




1636년 12월 14일 늦은 저녁, 인조는 남한산성 남문(지화문)을 통해 들어와 47일 간의 농성전에 들어갔다. 수어사 이시백은 휘하 군사들을 이끌고 먼저 들어와 있었다.




남문에서 서장대(수어장대)로 향하다 바라본 남문. 좌측 봉우리가 남장대이며, 우측 멀리 보이는 봉우리가 병자호란 이후 축성된 신남성이 있는 곳이다. 청군이 행궁으로 홍이포를 쏜 곳이다.




서장대 아래의 암문. 이 암문 밖에서 청군 장수 마부대와 역관 정명수가 조선 대신들에게 화친 및 항복을 권유했다. 수어사 이시백이 이곳에서 전투하다가 어깨에 화살을 맞았다.




서장대(수어장대). 수어사 이시백이 지휘했던 곳이다. 인조와 소현세자가 자주 들러 군사들을 격려했다.




수어장대 아래에서 남문(우익문) 방향으로 바라본 성곽.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47일 간의 농성전을 끝내고 서문(우익문)을 나와 삼전도로 향했다.




인조는 삼전도에서 청태종 황태극에게 땅에 세 번 절하며 항복하는 치욕을 맛보았다. 멀리 롯데 타워가 보이는데, 저곳에 청태종공덕비(일명 삼전도비)가 서 있다.


 


서문~북문: 강원도 근왕병이 검단산에서 패하고 북문 아래 청군 진영에서 몰살당한 조선군

 

현재 검단산은 남한산성을 중심으로 북쪽인 하남시에 소재한 검단산과 남쪽인 성남시에 소재한 검단산이 있다. 병자호란 당시 강원도 근왕병을 이끌었던 원주영장 권영길이 청군에게 패한 곳은 하남시 소재 검단산이다. 승정원일기에 단서가 남아있다.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에서 발간한 병자호란사에서 강원도 근왕병이 패한 곳이 성남시 소재 검단산이라 추정한 이래 이후의 연구자들이 의심없이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당시 성남시 소재 검단산 일대는 이미 청군에 의해 포위된 상태였다.
 

북장대는 어영청 대장 이서 장군이 지휘하고 있었다. 1636년 12월 29일, 영의정 김류가 북문을 지휘하고 있던 영장들에게 북문 아래 들판에 진을 치고 있는 청군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현재 하남시 법화동 지역에서 청군은 5개 구역으로 나누어 진을 치고 있었는데, 조선군이 들판을 향해 내려오자 진을 더욱 느슨하게 만들었다. 이를 본 조선군은 청군을 가볍게 보고 진격해 들어갔다. 군막에는 병자 이외에 청군은 없었다. 날이 저물 무렵 조선군이 산성으로 퇴각하기 위해 능선으로 올라설 때 후미에서 청군이 들이닥쳤다. 전열을 가다듬지 못한 채 산 위로 도망가는 조선군을 향해 청군은 마음껏 도륙했다. 별장 신성립을 포함해 3백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출전 병력이 전멸한 것이다. 1637년 1월 3일 어영청 대장 이서 장군이 병사했다. 원두표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서문(우익문)에서 북문(전승문)으로 향하다 바라본 연주봉 옹성과 하남시 법화동 및 하남시 소재 검단산. 근왕병인 원주영장 권영길이 청군에게 패한 곳은 현재 신남성이 있는 성남시 소재 검단산이 아니라 하남시 소재 검단산이다.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에서 발간한 <병자호란사>에서 성남시 소재 검단산으로 비정한 이후, 병자호란 연구자들이 의심없이 그대로 인용하다보니 지금까지도 권영길이 패한 곳이 성남시 소재 검단산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성남시 소재 검단산 일대는 원주 영장 권영길이 진군할 무렵에는 청군에 의해 이미 포위되어 있었다. 또한 근왕병인 경우에는 청군을 포위해야 하는 지점에 군사를 주둔시켜야 한다.


   

연주봉 옹성에서 바라본 동장대(사진 왼쪽 봉우리)와 신남성(사진 오른쪽 봉우리).




북문(전승문)에서 동장대로 향하다 바라본 북장대. 북장대는 총융사 이서 장군이 지휘했으나 1637년 1월 3일, 이서 장군이 병사하자 원두표가 북장대를 지휘했다.




북문(전승문). 역사의 모순을 발견할 수 있는 장소이다. 병사들이 전멸한 곳이다. 원두표 장군은 영의정 겸 체찰사인 김류 소속이었으므로 지휘권이 없었다.





북문~동문: 청태종 황태극이 벌봉에 나타나고 별장 이기축이 한봉 주둔 청군과 공방전을 벌이다.


1636년 12월 30일, 청태종 황태극은 한강을 건너와 삼전도에 주둔하고, 다음 날인 1636년 1월 1일 새해 아침 청군이 주둔하고 있는 동장대 밖 벌봉에 나타났다. 청군이 공격해오자 동장대를 지휘하고 있던 어영대장 신경진이 천자포를 쏘면서 공방전이 벌어졌다. 성벽이 무너지고 병사들이 성벽 너머로 도망을 가는 상황이 벌어졌다. 한봉에 주둔한 청군은 장경사가 있는 동벽을 공격해 들어왔다. 북장대에서 동벽으로 옮겨온 별장 이기축이 군사들을 동원하여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북문(전승문)에서 동장대로 향하다 바라본 군포(초소) 터. 






동장대 북쪽 아래(북문 방향) 및 동장대에 설치되어 있는 암문. 동장대 암문은 홍예문이다.








동장대 터. 동장대 밖 멀리 벌봉이 보인다. 이 벌봉 능선에 황태극이 나타나고 청군이 홍이포를 쏘면서 동장대 성벽을 무너뜨렸다. 






동장대에서 동문(좌익문) 방향으로 바라본 장경사 신지 옹성 및 옹성에서 바라본 한봉. 별장 이기축이 장경사에 주둔한 군사들을 동원하여 이 구역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장경사 신지 옹성에서 동문(좌익문)까지의 구간은 절벽 지대이다.








장경사 신지 옹성~북문(좌익문) 구간에서 바라본 남장대 능선 및 북문, 그리고 신남성이 있는 성남시 소재 검단산. 이 구간은 외부에서 공격해 들어오지 못할 정도의 절벽 지대이다.




남한산성 동문(좌익문).



 

동문~남문: 숙부 공조판서 구굉과 조카 수원부사 구인후가 그곳에 있었다.


구사맹(1531~1604)은 평산신씨 신화국의 딸과 결혼하여 4남 6녀를 두었는데, 구성, 구홍, 구용, 구굉이다. 구성은 3남 3녀를 두었는데, 구인기, 구인후, 구인학이다. 구사맹의 형인 구사안은 11세 때 중종의 3녀 효순공주와 결혼했지만 몇년 후 자식 없이 효순공주가 사망하여 구홍을 양자로 들였지만 구홍 역시 후사를 잇지 못하여 구인후가 후사를 잇게 되었다. 구인후는 동장대를 지휘했던 신경진과는 외숙이 된다.  

남장대를 지휘했던 구굉과 구인후는 하남시 소재 검단산에 주둔하던 청군과 전투를 벌였다. 지휘소인 남장대는 현재와 같은 모습의 돌받침대가 있는 문루가 아니었다. 검단산 정상부에서 청군이 발사한 홍이포의 포탄이 행궁으로 날아가는 모습을 보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능선 안부에 있던 청군이 성벽에 사다리를 걸치고 밀려 올라오고 있었다. 구인후는 남문 병력을 숙부가 있는 남벽으로 이동시켰다. 밀고 밀리는 공방전 끝에 날이 저물어 청군이 물러갔다. 




동문(좌익문)에서 동장대로 향하다 바라본 동문.






남한산성 남벽 제3옹성에서 바라본 동문 및 동벽. 동장대 아래에 망월사가 보이고, 절벽 지대인 동벽 너머로 한봉이 보인다.








남한산성 남벽 제3옹성. 동남쪽 광주시청 방향의 검복리 전경 및 남문 방향의 제2옹성 및 남장대 전경이다. 서흔남의 묘는 검복리에 있었는데, 후손들이 파묘하여 화장을 해버렸다. 묘비가 현재 남한산성 내 남한산성역사관 앞에 옮겨져 있다.










서장대 및 제2옹성. 병자호란 당시 서장대에는 받침돌이 있는 상태의 지휘소가 아니었다. 남한산성 전체 구간 중 이 구간은 경사가 그리 심한 편은 아니다. 








남장대에서 남문(지화문)으로 향하다 바라본 서장대 및 서벽. 인조가 1636년 12월 14일 늦은 저녁에 들어왔다. 먼저 와 있던 수어사 이시백이 도열하여 인조 일행을 맞이했다. 병법에서 '화(和)'는 정예병을 길러 전투에 임할 때 패배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화(至和)'는 평상시 정예병 양성을 통해 전쟁에 대비한다는 의미이다. 북문(전승문)의 의미와 마찬가지로 남문(지화문)도 역사의 모순이라 하겠다.





[방위산업전략포럼 권순삼 전쟁사위원장 kwonsanha@naver.com]



[뉴서울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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