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① 남한산성! 인조, 내부의 적을 두려워하다!
이괄의 난이 터지다!
인조, 총융사 이서로 하여금 남한산성을 수축하게 하다!
남한산성은 외부의 적(후금)이 아니라 내부의 적(이괄의 난)으로 촉발, 축성되었다!
남한산성을 끝까지 지키지 못하고, 적진 속 남한산성에서 병사하다!
"남한산성의 역사를 감독하여 완성시키고 군수물자와 무기를 구비하지 않음이 없어 마침내는 대가가 머물면서 의지할 수 있는 터전이 되게 하였다”<인조 15년(1637) 1월 2일 기사>
1637년 1월 3일, 남한산성을 축성한 무관 출신 장군이자 왕을 호위하는 어영청 대장인 완풍부원군 이서(1580~1637)는 자신의 역사물 안에서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병사하고 말았다. 1636년 12월 14일, 인조를 호위하고 남한산성으로 피난한지 20일 만이었다. 이서는 병마와 싸우면서 북문을 지휘하고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12월 16일, 어영대장을 보좌하는 어영청 부사로 원두표(후에 좌의정 역임, 임진왜란 당시 여주 여강전투 및 철원 김화전투의 강원도 조방장 겸 여주목사 원호의 손자)를 임명하게 하여 북문에 배치시켰다. 그곳에는 사촌 동생인 서자 출신 무관 어영별장 이기축(1589∼1645, 후에 장단부사 역임, 완계군(完溪君)에 봉해짐)이 있었다.
남한산성. 본성에 딸린 옹성, 봉암성, 한봉성, 신남성은 1636년 12월 병자호란 당시에는 없었다.
무관 이서(李曙)는 1588년 1월, 시전부락전투 때 여해 이순신과 함께 전장을 누볐고, 임진왜란 당시 제주목사로 전라좌수영으로 소를 보내주었던 이경록(1543~1599)의 아들이다.
이서의 조부 이간은 조선 제3대 왕인 태종의 차남 효령대군 이보의 5대손으로 슬하에 이경록, 이경복, 이경유, 이경기 등 4남을 두었다. 무관 이경록은 무관 이서를 낳고, 무관 이경유는 서자 출신인 무관 이기축을 낳았다.
이서는 1603년(선조 36) 무과에 급제하여 1606년에 선전관이 되었다. 장연현감, 진도군수를 역임했으나 1618년(광해군 10) 봄에 대북파에서 인목대비 폐모론을 주관하자 이에 반발하여 무관으로는 유일하게 문무백관 회의인 정청(庭請)에 참여하지 않았다.
폐모론 이후 친분이 있던 신경진(후에 영의정 역임, 임진왜란 당시 탄금대 전투의 신립 장군 아들) 등과 세상을 한탄하며 교류하는 동안 장단부사 겸 경기방어사로 임명받자 서둘러 임지로 부임했다. 사촌 동생 이기축은 장단과 한성을 오가며 전령 역할을 하였다.
1623년(광해군 15) 3월 13일, 이서는 장단부의 군사를 인솔하고 김류, 이귀, 신경진, 구굉 등과 함께 인조를 받들고 홍제원을 거쳐 도성으로 진격하여 인조반정을 일으켰다.
조선시대 최초로 지방에서 난을 일으켜 도성을 함락시키고 왕이 몽진을 떠나는 전대미문의 사건인 ‘이괄의 난’이 1624년(인조 2) 1월에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남한산성 축성이 촉발되었다. 인조는 도성 방어 및 정예병 훈련을 위해 총융청을 설치하고 초대 총융사로 이서를 임명했다. 남한산성 축성의 명을 받은 후 동년 7월에 축성을 시작하여 2년 후인 1626년 11월에 완공되었다. 이때 광주목 관아가 남한산성으로 이전했고, 도성 남쪽의 방어선인 남한산성 일대를 방어하기 위한 수어청도 설치했다. 왕이 머무는 행궁도 1625년 목사 유림(병자호란 당시 철원 김화전투 사령관)이 감독하여 준공하였다. 축성은 각성 선사가 도총섭으로 임명되어 8도의 승군을 동원하여 이루어졌다. 승군의 사역 및 산성 방어를 위해 개원사를 본영으로 국청사, 장경사 등 일곱 개의 사찰이 건립되었다.
이것은 바로 우리들이 현재 남한산성에 대해 교육받고 있는 ‘후금의 침입에 대비해서’가 아니라 ‘이괄의 난’에 의해 촉발되었음을 보여준다. 외부의 적이 아니라 내부의 적으로 인해 남한산성 축성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남한산성은 폐곡선의 본성 및 옹성, 봉암성, 한봉성, 그리고 신남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이서가 축성할 당시에는 폐곡선의 본성 이외에는 없었다. 그리고 본성 위에 포를 쏠 수 있는 포루도 없었다.
남한산성을 축성한 완풍부원군 이서 장군 묘역. 신도비와 묘표, 문인석, 망주석, 향로석, 상석, 혼유석이 남아 있다. 신도비는 1722년 건립되었고, 오도일이 짓고 남한명이 쓰고 남취명이 전을 올렸다. 좌측 능선에 부친 이경록 장군 묘가 있다(경기도 의정부시 고산동 산52 일원).
무관 이경록 장군 묘역. 신도비와 묘표, 망주석, 동자석, 향로석, 상석, 혼유석이 남아 있다. 신도비는 1630년에 건립되었고, 비문은 조선 중기 한문 4대 문장가 중 한 명이자 효종의 장인인 장유(1587~1638)가 짓고, 글씨는 뛰어난 서예가이자 병자호란 후에 대청황제공덕비를 쓴 오준(1587~1666)이 썼으며, 머릿글은 전서체의 일가를 이루었고 병자호란 당시 척화파의 거두인 김상헌의 형이자 강화도가 점령당하자 남문에서 분신 자결했던 김상용(1561~1637)이 전을 올렸다. 부친 이간 묘가 상단에 있으며, 좌측 능선에는 무관 이기축 장군 묘가 있다(경기도 의정부시 고산동 산52 일원)
무관 이기축 장군 묘. 향로석에 가려져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누구인지 모른다.
남한산성 축성을 완료한 지 3개월 후인 1627년 1월, 후금은 명을 공격하기 위한 후방 안정이 절실하여 조선에 대해 정묘호란을 일으켰다. 이때 인조는 강화도로 피난하고, 남한산성은 총융사 이서가 방어했다. 동년 3월 강화가 체결되었다.
정묘호란 이후 이서는 형조판서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 겸 훈련도감ㆍ군기시(무기 제조 관서)의 책임자(제조提調)를 역임했다. 1635년에는 총 쏘는 방법과 화약 굽는 방법을 기술하여 간행한 『화포식』의 한글 번역본인 『화포식언해(火砲式諺解)』를 발간했다.
1637년 1월 3일, 날이 눈부시게 청명했다. 이서는 인조와 함께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여 어영청 대장으로 북문에서 20일 동안 후금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기력이 쇠약해진데다 갑자기 불어온 큰 바람에 넘어져 더 이상 병마를 이겨낼 수 없었다. 키가 크고 살결이 희며 미남이라 불리던 이서는 새파랗게 번져가는 청명한 하늘을 바라본 뒤, 사위 채유후(후일 예조판서)에게 유언을 남기고는 58세를 일기로 절명하고 말았다.
“내가 죽어도 한이 없으나 눈을 감을 수 없는 것은 패전하여 당한 잊을 수 없는 치욕이다.” 이서는 치욕을 가슴에 묻은 채 절명했지만, 그보다 더 욕되고 절망적인 치욕을 당한 사람이 성중에 있었다. 조선 제2대 정종의 열 번째 왕자인 덕천군 이후생의 6대손인 부제학 이경석이었다.
후금과의 전투가 한창이었고, 남한산성 외부로 나갈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무장 이서의 시신은 성중에 가매장되었다. 삼전도의 치욕이 끝나고 도성으로 돌아온 뒤 인조의 특명으로 도성 내에 빈소가 마련되었다. 그리고 따뜻한 봄날인 4월에 양주 선산으로 이장되었다. 인조는 이서를 그리워하며 백제 온조왕을 기리는 사당인 온조묘를 건립하게 한 뒤 이서 장군을 배향하게 했다.
효령대군 이보는 7남을 두었는데, 의성군 이채, 서원군 이친, 보성군 이갑, 낙안군 이영, 영천군 이정, 원천군 이의, 안강도정 이양이다. 이서는 의성군 이채의 6대손이다. 이서는 1녀를 두었는데, 부인이 일찍 죽어 아들이 없었다. 보성군 이갑의 6대손인 호조판서 이명(당시 남한산성에서 경기도 관찰사로 임명됨)의 아들 이민백을 양자로 들여 후손이 이어지고 있다.
1635년(인조 13) 이서가 각종의 총 쏘는 방법과 화약 굽는 방법을 기술하여 간행한 『화포식(火砲式)』의 한글 번역본(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 사진).
병자호란 때인 1636년 12월 14일, 인조는 남문(지화문)을 통해 남한산성으로 들어왔다.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서문(우익문)을 통해 삼전도로 가 청태종에게 무릎을 꿇었다.
남한산성 북문(전승문). 어영청 대장 이서 장군이 이곳을 지휘했다. 사촌 이기축 장군은 별장으로 있었다.
남한산성 본성에 딸려 있는 외성인 봉암성. 봉암성은 1686년(숙종 12)에 쌓았다.
남한산성 본성에 딸려 있는 외성인 한봉성. 한봉성은 1753년(영조 29)에 쌓았다.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 사적 제101호. '삼전도비'라고도 한다. 이 비는 1639년에 건립되었고, 비문은 이경석(1595~1671)이 짓고, 글씨는 오준(1587~1666)이 썼으며, 머릿글은 여이징(1588~1656)이 전을 올렸다(서울특별시 송파구 석촌동).
영의정 이경석 묘와 신도비(경기도 기념물 제84호,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석운동). 이 신도비는 사후 84년이 지난 1754년(영조 30)에 세워지게 되었다. 대청황제공덕비를 지었다는 이유로 송시열을 따르는 노론에 의해 원죄를 뒤집어쓰게 되었다. 비문은 박세당(1629~1703)이 짓고, 글씨는 이광사(1705~1777)가 썼다.
부제학 여이징 묘와 신도비, 그리고 강화도 함락 때 순절한 부인 청주한씨 묘. 이 신도비는 1691년에 건립되었고, 비문은 정두경(1597~1673)이 짓고, 글씨는 좌의정을 역임한 조사석(1632~1693)이 썼으며, 두전은 양아들인 영의정 여성제(1625~1691)가 올렸다. 여이징의 부인 청주한씨와 종질부인 신만의 부인 홍씨는 강화도성 서쪽 누각에 함께 있다가 강화도성이 함락되자 자결하였다. 청군이 누각을 불태우자 두 부인이 함께 잿더미에 묻혔다. 후손이 두 부인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어 여이징의 묘에 함께 합장하지 못하고 능선을 달리하여 두 부인을 봉분만 달리한 채 함께 묻었다(경기도 광주시 남종면 검천리 산31).
[방위산업전략포럼 권순삼 전쟁사위원장 kwonsanha@naver.com]
[뉴서울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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