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서울타임스] 손영수 / 신상목 기자 = 고(故) 하용조 목사 10주기 추모예배가 지난 2일 경기도 양지 온누리교회 하용조 기념채플에서 개최됐다. 하 목사는 1985년 온누리교회를 개척해 27년간 사역하며 수많은 영혼을 주님께 인도했다. 그는 온누리교회라는 지역교회 목사로만 머물지 않았다. 복음과 성령을 키워드로 ‘사도행전적 교회’를 지향하면서 강해설교와 말씀묵상, 성령목회, 경배와찬양, 문서선교, 방송선교, 일본선교 등을 펼쳤다. 육체가 건강해서가 아니었다. 청년 때부터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무수한 육신의 질고 속에 있었으나 쉬지 않고 복음을 외쳤다. 간암으로 7차례의 대수술을 받았고 병상에서 투석 치료를 받으면서도 “죽을 때까지 복음을 전하겠다”고 선언했다. 그의 삶과 목회, 설교와 선교사역을 담은 ‘하용조 목사 평전’(두란노)도 최근 출간됐다. 지난 5일 이재훈(사진) 온누리교회 담임목사를 만나 하 목사의 삶을 들었다.
-하용조 목사가 생전에 사용했던 목양실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하 목사의 책장도 남겼다고 들었다.
“서재는 하 목사님이 돌아가시기 얼마 전 리모델링했고 목사님의 정서가 그대로 담겨 있는 곳이다. 두란노에서 발간한 신앙·신학서적들이 유산으로 남아 있기 때문에 그대로 물려받아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가끔 하 목사님의 손때 묻은 메모도 발견하고 밑줄 친 부분도 확인한다.”
-만약 하 목사가 지금도 살아있다면 어떤 활동을 하고 있을까.
“목사님은 생전에 당신이 은퇴하면 어떤 사역에 집중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CGNTV다. 그는 미디어 플랫폼에 대한 비전을 갖고 있었다. 목사님이 살아계셨다면 CGNTV를 비롯한 미디어 플랫폼을 더 발전시켰을 것이다.”
하용조(뒷줄 왼쪽) 목사는 1980년대 한국교회에 복음주의를 소개하고 실천했던 ‘복음주의 4인방’ 중 한 명이었다. 국민일보DB
-하 목사가 한국교회에 남긴 가장 큰 발자국은 무엇이라 보는가.
“한마디로 말해 복음과 문화를 연결한 것이었다. 하 목사님은 복음을 시대의 문화에 정확하게 적용해 전했던 전달자였다. 그는 어떻게 기독교 복음이 순수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문화의 옷을 입고 전달될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 결과 하 목사님이 시도했던 다양한 목회 패러다임이나 문화를 대하는 시각은 한국교회의 보편적 원리로 받아들여졌다. 하 목사님은 복음과 문화의 건강한 상관성을 유지하면서도 비평적으로 수용해 변화시킨 선구자였다.”
하용조 목사는 생전에 7차례의 간암 수술을 받았고 수시로 투석 치료를 받는 등 질병과 함께 살았다. 국민일보DB
-하 목사는 일생을 아픈 몸으로 목회 사역을 감당했다. 그런데도 항상 창의적이었다. 하 목사에게 질병은 무엇이었나.
“하 목사님을 생각할 때 늘 떠오르는 말씀은 고린도후서 12장 7~10절의 핵심 말씀,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10절)는 사도 바울의 고백이다. 하 목사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이 목사, 온누리교회가 어떻게 이렇게 잡음 없이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었는지 알아? 내가 많이 아파서 그래.’ 이는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첫째는 당신이 아주 아팠기 때문에 에너지가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그래서 불필요한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고 가장 우선순위가 되는 일에 집중했다. 둘째는 바로 이 때문에 하 목사님은 다양한 사역의 권한을 위임할 수 있었다. 그가 자율권을 주는 ‘임파워링’ 리더십을 젊을 때부터 실천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하 목사 10주기를 맞았다.
“그는 하나님을 위해 목숨을 걸었고 교회가 왜 세상의 소망이 돼야 하는지를 몸소 실천했다. 이는 편리함과 안락함, 안전함만 추구하는 우리의 나약한 신앙을 세차게 흔들어 깨운다. 하 목사님의 삶은 모험과 도전, 헌신과 자기희생의 신앙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하 목사를 가까이서 지켜봤던 분으로서 가장 인상에 남는 순간은 무엇인가.
“하 목사님을 대형교회 목사로만 봤던 분들은 화려함을 추구한 목회자로 생각할 수 있는데 오해다.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서민적이고 소탈했다. 성도들도 폭넓게 품었다. 대기업 회장부터 가난한 이웃까지 차별이 없었다. 교도소 재소자들의 편지도 많이 받았고 출소자 일부는 직접 찾아오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하 목사님이 교회를 사랑했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하 목사님은 새벽기도가 끝나면 늘 교회 근처를 돌아보셨다. 어느 날 본당 쪽에서 내려온 목사님은 ‘이 목사, 봤어?’ 하셨다. 처음엔 성도를 말하는 줄 알고 ‘아무도 못 봤다’고 했다. 그런데 목사님은 ‘못 봤어? 다시 본당 갔다 와 봐’ 하셨다. 다시 아무도 없다고 하자, 목사님은 ‘다시 가 봐’ 하셨다. 그제야 출입구 커튼 한쪽이 떨어져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하 목사님은 ‘그게 보여야 담임목사가 되는 거야’ 하셨다. 이제 담임목사가 돼 보니 안 보이던 게 보인다. 나 역시 교회 주변을 다니면서 불 끄고 먼지 닦고 휴지를 줍는다.”
하용조 목사가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 총장 시절 졸업생들의 발을 씻기고 있다. 국민일보DB
-하 목사님은 부교역자나 장로님들의 차량도 수시로 이용했다 들었다. 새벽기도회 후엔 주차 봉사자들과 함께 식사했다는 말도 회자된다.
“제가 전임 부교역자 시절 소형차를 탔는데 여러 차례 하 목사님을 그 차로 모셨다. 하 목사님은 뒷자리도 아니고 항상 운전석 옆에 타셔서 허물없이 대하셨다. 운전하다 졸릴 때는 아이스크림도 사주셨다. 그런 식으로 장로님이나 부교역자들의 차를 거리낌 없이 이용하셨다. 어디를 가든 항상 부교역자들과 함께 다녔고 그것이 중요한 목회 멘토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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