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4월 18일 주일설교 이영훈 목사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0장 30절~37절)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4월 18일 주일설교 이영훈 목사. 포토샵 / 조현상 기자
우리 함께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오늘 우리에게 좋은 일이 반드시 일어납니다.”
우리가 함께 주님 앞에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고 주님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부르짖어 기도할 것은 주님, 코로나19가 속히 종식되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1년 넘게 너무나 고통을 당하고 있사오니 속히 백신이 보급되어 코로나19가 멈추게 하여 주시고 일상생활이 회복되어지게 하여 주옵소서. 예배가 회복되어지게 하여 주옵소서.
사랑하는 조용기 원로 목사님 건강을 회복시켜 주셔서 귀한 사명 감당케 하여 주옵소서. 오늘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던지 부속 성전 또 기도처, 지성전, 집에서, 인터넷으로 OTT로 어디서 예배를 드리든지 간에 예배드리는 자리에 성령이여 임하여 주셔서 우리 큰 은혜 받게 하여 주옵소서. 주여 삼창하고 기도합니다. 주여! 주여! 주여!
(통성기도)
<찬송가 382장 (통432) :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 아무 때나 어디서나 주 너를 지키리 늘 지켜 주시리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이 예배를 통하여서 주님 홀로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전 세계를 고통 가운데 몰아가고 있는 코로나19가 속히 종식되어지게 하여 주시고 일상이 회복되고 예배가 회복되어지게 하여 주옵소서.
사랑하는 조용기 원로 목사님 붙들어주셔서 영육 간에 강건함을 더하여 주시고 회복되어 귀한 사명 감당케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예배드리는 모든 처소에 주의 성령이여 운행하여 주시옵소서. 감사하옵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복음성가 : 사랑하는 자여>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설교말씀>
이 요한삼서 2절의 축복의 말씀이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은 누가복음 10장 30절~37절 말씀을 가지고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이와 같은 제목으로 함께 말씀의 은혜를 나눕니다. 제목을 큰소리로 따라 해주시기 바랍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오늘의 말씀은 우리 모두가 잘 아는 강도 맞은 사람을 돌아본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이 시간 주님께서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누가 코로나19로 강도 만난 사람의 선한 이웃이 되겠느냐.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19로 인하여 강도를 만났습니다. 생활이 어렵고 학교의 수업은 제대로 드릴 수도 없고 모든 것이 침체되어있는 어려운 상황 속에 우리 처해있습니다.
이렇게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으로 우리가 과연 주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는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적인 메시지를 잘 귀 기울여 듣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 헌신하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강도를 만난 인생
먼저 강도를 만난 인생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누가복음 10장 30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여리고는 이 지대가 바다보다 약 250m 낮은 도시였고 예루살렘은 해발 790m 높은 곳에 위치 해 있어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은 급한 내리막길이었고 지형이 험해서 강도의 출몰이 잦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이 내리막길에서 강도를 만난 것입니다. 강도를 만나서 가진 것 다 빼앗기고 강도에게 맞아 피투성이가 되고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때때로 우리도 인생을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 내리막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내리막길 인생은 언제나 강도의 위험이 뒤따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예수님 믿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신앙의 내리막길을 가면 안 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처음 믿었을 때 눈물, 콧물 흘리며 기뻐하고 감사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 순간 그 기쁨도 감사도 감격도 사라져버리고 주님에 대한 사모하는 마음이 식어졌다면 우리는 신앙의 내리막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배를 사모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예배의 구경꾼으로 와서 앉아 있다면 우리는 이미 내리막길을 많이 내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열심으로 주님을 섬기고 봉사하던 우리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고 아무것도 아닌데 시험에 들고 원망과 불평을 하고 있다면 우리는 한참 내리막길을 가고 있는 모습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내리막길을 가다가 우리가 강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질병의 강도를 만나고 자녀들이 탈선하고 문제를 일으키는 강도를 만나고 실패의 강도를 만나고 말할 수 없는 스트레스의 고통과 괴로움을 겪는 강도를 만나고 배신과 미움과 분노의 강도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내리막길을 갔기 때문에 신앙의 내리막길을 가면 안 되는 것입니다. 다시 첫사랑을 회복해야 됩니다. 기도를 회복해야 됩니다. 감사를 회복해야 됩니다. 기쁨을 회복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축복의 동산을 마련해 주셨지마는 그들은 인본주의를 따라 내리막길을 가다가 마귀라고 하는 강도를 만났습니다. 마귀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었던 모든 축복을 빼앗아 갔습니다. 건강도 빼앗아 가고 그리고 물질의 축복도 빼앗아 가고 우리 삶 가운데 질병과 가난과 저주만 넘치게 가져다 준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그렇습니다. 악한 원수 마귀가 와서 하는 일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믿기 전에 모두가 마귀에게 강도를 당하여서 가진 것 다 빼앗겼고 절망과 고통과 질병과 괴로움 가운데 살았던 자들입니다.
웬일인지, 웬 은혜인지 우리가 예수님 믿고 새사람되어 주님 안에서 축복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는 우리가 내리막길을 가면 안 됩니다. 다시는 우리가 주님을 떠나서 내리막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나면 안 될 것입니다. 철저하게 예수님 중심, 십자가 중심으로 살아가는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강도 만난 사람을 외면한 사람들
둘째로 강도 만난 사람을 외면한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오늘 성경은 이와 같이 말씀합니다. 누가복음 10장 31절, 32절에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그때 마침 한 제사장이 지나갑니다. 레위인이 지나갑니다. 그런데 그들은 피 흘려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도 그를 보고 살펴보지 않고 피하여 자기 길로 갔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나서 하나님의 큰 은혜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데 우리 주변에 있는 강도 맞은 사람들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내 길로 가고 있다면 제사장이나 레위인이나 다를 바가 없는 그러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제사장은 누구입니까.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예배드리는 가장 존귀한 직분이고 존경받는 그러한 직분인 것입니다. 그런데 겉의 모습은 제사장으로 존귀함을 받는 모습이었지마는 그 마음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보다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고 자기 자신이 그러한 일로 인해서 피해를 입지 않으려고 강도를 만난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간 것입니다.
위선자적인 삶을 살았던 모습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절대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런 이중인격적인 모습으로 살면 안 됩니다. 제사장은 교회의 지도자입니다. 교회 지도자는 모든 일에 솔선수범하고 어렵고 힘든 자리에 본인이 나아가 희생과 섬김으로 그 어려움 당한 사람을 돌보는 것이 지도자의 모습입니다. 만약 지도자가 그러한 모습으로 살지 못한다면 하나님께 책망을 받을 것입니다.
고통당하는 이웃을 향해 발걸음을 옮겨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우리 주변의 강도 만난 사람을 그냥 지나쳐 가면 안 됩니다. 주의 사랑으로 돌봐야 되는 것입니다.
제사장의 뒤를 이어서 레위인도 그냥 그곳을 지나갔습니다. 레위인은 성전에서 예배드리는 의식을 담당하는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오늘날 교회를 섬기는 제직들, 봉사자들을 의미합니다.
봉사자들이 앞장서서 고난당하는 이웃을 돌봐야 하는 것입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사랑으로 돌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외면하면 강도 만난 사람을 그냥 지나간 제사장이나 레위인과 다름이 없는 잘못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성경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 주변의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리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줄 것을 계속해서 강조하고 또 강조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구약성경에 보면 세 종류의 사람을 잘 사랑으로 돌보라고 그랬는데 나그네, 고아, 과부입니다. 고향을 떠나서 이곳에 와서 나그네 생활을 하는 우리 외국인 노동자들. 그들을 우리가 사랑으로 돌봐야 합니다. 또 부모를 일찍 여의고 고아로 자라난 고아들을 사랑으로 돌봐야 됩니다. 또 남편을 여의고 홀로 힘든 삶을 살아가는 과부를 돌봐야 되는 것입니다. 신명기에 이와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14장 29절에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야훼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신명기 15장 7절, 8절입니다. 네 하나님 야훼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주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 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주변에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그냥 돌아보지 않으면 마음을 완악하게 하는 것이라고 성경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열린 마음을 가지고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강도 만난 이웃을 돌봐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주님의 귀한 자녀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생명의 삶」을 읽다가 한 자매의 간증을 읽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언젠가 어머니의 병수발을 하는 자매님 집에 심방을 갔다가 좀 괴로웠습니다. 온 집에 어머니의 대소변 냄새가 밴 까닭입니다. 자매님이 허구한 날 닦고 씻는데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잠깐 앉아 있었을 뿐인데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도 그 자매님은 묵묵히 어머니를 수발하며 그 냄새를 견디고 있었습니다. 그러고도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가장 많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더 잘하지 못해 안타깝고 후회가 된다면서요. 사랑의 관계라서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율법을 지키는 일이 어렵지 않습니다.
자매님이 20년 가까이 병석에 누운 어머니를 수발하고도 더 잘해주지 못해 한이 된다고 말한 것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무겁지 않습니다.”
‘10년 질병에 효자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자매님은 정말 주님을 잘 섬기고 주님을 사랑하는 귀한 자매님이었습니다. 그 모습으로 자기 어머님을 20년 가까이 대소변을 받아내면서 또 하루에도 몇 번씩 온몸을 물수건으로 닦아 드리고 잘 보살펴서 어머님 편하게 천국 가실 수 있도록 잘 모신 것입니다.
참 요즘 같은 시대에 찾아보기 힘든 귀한 그러한 모습입니다. 우리 예수님 믿는 사람들이 다 이렇게 살아야 됩니다. 부모에게 효도하지 아니하고 자식들을 함부로 학대하고 제대로 돌보지 않는 부모들이 계속 뉴스에 나와서 얼마나 우리 가슴을 아프게 하는지 모릅니다.
혹시 우리들이 그러한 모습이 아닌지 회개해야 됩니다. 지금부터 우리가 철저하게 우리 부모님을 사랑으로 잘 모시고 자녀를 사랑으로 잘 돌보고 힘들고 어렵고 고통당하는 이웃을 주의 사랑으로 섬김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큰 복을 받아 누리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이 다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강도 만난 사람을 돌본 사마리아인
셋째로 강도 만난 사람을 돌본 사마리아인에 대해서 함께 말씀 나누기를 원합니다. 누가복음 10장 33절, 34절입니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마침 한 사마리아 사람이 지나가다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를 치료해주고 그를 주막으로 데려가 돌보아 주었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단어가 ‘불쌍히 여겨’입니다. 주여 우리 마음속에 고난당한 이웃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주옵소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주옵소서.
사람들이 마음이 강퍅해져서 고난당하는 사람, 아파서 고통당하는 사람, 문제를 만난 사람,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워서 하루하루 살기가 힘들어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불쌍한 마음을 갖지 아니하고 전혀 관심 없이 그냥 강도 만난 사람을 지나가는 제사장과 레위인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 그런 모습으로 살고 있다면 회개해야 됩니다. 주여, 내 마음 가운데 고난당한 이웃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주시옵소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주시옵소서.
사마리아 사람들은 당시 유대인들이 사람 취급을 하지 않던 사람들입니다. 이방 족속하고 혼혈 민족으로 산다고 해서 짐승처럼, 개돼지처럼 그렇게 업신여기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강도 맞은 자의 이웃을 사랑으로 돌보았던 것입니다.
우리 한국에 버려진 아이를 돌보는 베이비 박스 사역을 하시는 이종락 목사님이 계십니다. 이 아이들은 강도 맞은 아이들입니다. 그런데 우리 목사님이 그들을 사랑으로 섬깁니다.
목사님은 그 아들이 뇌성마비로 태어나서 지적장애로 뇌성마비 장애로 말미암아 지체 장애로 말미암아 장애인을 섬기는 사역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자기 아들도 돌보고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돌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 사역을 하는 집 앞에 누가 생선 박스 같은 것을 하나 가져다 놓고 가서 열어보니까 갓 태어난 아이가 몸이 차가워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너무 놀라서 그 아이를 품에 안고 들어와서 정성으로 돌보아서 아이를 살려냈는데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2009년부터 베이비 박스를 만들어서 버려진 아이를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귀한 사역인지요.
뇌성마비를 앓던 아들은 2019년에 천국에 갔고 2009년부터 2020년 3월까지 이곳에 버려진 아이를 돌본 아이가 1,700명이 넘습니다. 이 1,700명이 넘는 아이들이 다 강도를 만난 것입니다. 버려진 것입니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데 이 목사님이 주의 사랑으로 하나하나 품어서 그들을 반듯하게 잘 자라게 해서 사회 속에 훌륭한 주님의 일꾼으로 길러 성장시켰습니다. 여러분, 이 목사님의 사역이 귀한 것은 사랑을 실천하고 그들을 불쌍히 여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버려지고 있고 또 죽어가는지 모릅니다. 태어나도 제대로 돌봐주지 않아서 학대를 받아서 죽어가는 아이들도 있고 태어나기도 전에 낙태로 인해서 죽어가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작년 한 해 동안 우리 한국에 태어난 아이가 30만 명입니다. 43만 명이 태어나야 두 가정에 하나가 태어나는 것인데 정상적으로 두 가정이 둘을 낳으려면 86만 명이 태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나라 인구가 보존이 되는데 30만 명밖에 태어나지 않았으니 앞으로 이 아이들이 대학을 가는 18년 후에는 우리나라 대학 3분의 1이 다 문을 닫아야 합니다. 왜? 대학 총원이 이 아이들보다 훨씬 더 많아요. 그래서 지금 모든 대학이 살아남기 경쟁을 해야 되는 이러한 위기 속에 와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가장 큰 재앙은 저출산입니다. 저출산보다 더 무서운 재앙이 없습니다. 코로나19보다 몇백 배, 몇천 배 더 위험한 것이 저출산이라고 하는 큰 문제인 것입니다.
한 가정이 둘씩 낳아야 겨우 정상이고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는 셋 이상 낳기 기본 세 명, 권장사항 다섯 명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데 이 나라가 저출산 문제에 대해서 지금 정치하는 사람들이 서로 다투기만 했지 이러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합니다.
이 문제 해결되지 않으면 우리나라 미래가 없습니다. 미래가 없습니다. 답은 있습니다. 지금 태어난 애보다 낙태로 죽어가는 애가 3배 이상 많습니다. 그러니까 낙태로 죽어가는 애들만 살려내도 저출산 문제는 단번에 완전히 해결됩니다. 1년에 90만에서 100만이 낙태를 당해서 죽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신 나간 국회의원들이 낙태를 합법화시키는 법을 통과시켰어요. 그래서 살인죄를 저들이 법으로 허락한 것입니다. 귀한 생명이 얼마나 많이 죽어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1년에 100만 명씩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이 아이들이 살아난다면 우리 대한민국의 미래가 밝아질 것입니다.
그들이 다 강도만난 이웃들입니다. 예수의 사랑으로 저들을 돌봐야 됩니다. 이 나라에 태어나기만 하면 어떻게 하든지 저들을 돌봐서 잘 자라게 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인 것입니다. 주여, 우리가 그들에 대하여 불쌍한 마음을 가지고 강도 만난 이웃을 돌아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성경을 보니까 이 사마리아 여인이 상처를 치료해 주고 주막에 데리고 가서 주인에게 비용을 맡기면서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올 때 갚겠다고 말했습니다. 누가복음 10장 35절입니다.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어떤 성경 해석가는 말하기를 이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이시고 주막은 교회다. 주막 주인은 주의 종인데 주의 종은 예수님께서 맡기신 성도를 잘 섬겨야 된다. 잘 살펴줘야 되고 또 데나리온 둘을 줬는데 데나리온 둘은 신·구약성경을 의미해서 신·구약성경을 가지고 성도를 잘 돌볼 것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다고 하는 말씀은 분명히 예수님 재림하실 때 다시 돌아와서 우리가 주님 앞에 어떤 모습으로 주님을 섬겼는가를 다 계산할 터인데 그때까지 예수님을 잘 믿고 선한 삶을, 열매 맺는 삶을 살아야 된다.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되신 예수님께서 강도 만난 우리를 구원해 준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이 교회에 맡기신 것입니다. 교회는 우리 신앙의 보금자리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신·구약성경의 말씀을 날마다 먹고 말씀을 통하여서 영적으로 양육되어져서 하나님 앞에 위대하게 쓰임 받는 주님의 자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물으십니다. 누가복음 10장 36절입니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그리고 다시 말씀하십니다. 30절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주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강도 만난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말고 불쌍한 마음을 갖고 다가가서 그들을 치료해 주고 그들에게 사랑을 실천하여 예수의 사랑이 온 천하를 뒤덮게 하라. 주님 말씀하십니다.
인도 선교의 아버지 현대 선교의 아버지로 불렸던 윌리엄 캐리 선교사님(1761~1834)이 있습니다. 이분은 구두 고치는 분이었습니다. 구두 수선공이었습니다. 그래서 본인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너무 감사해서 내가 선교사로 가겠습니다. 하니까 영국 선교 본부에서 당신 자격이 안 됩니다. 선교사 파송장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혈혈단신으로 인도에 건너가서 인도를 완전히 예수의 사랑으로 변화시킨 위대한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그가 비록 배우지 못하고 가진 것이 없어도 주님의 사랑의 능력이 함께했기 때문에 인도 역사를 뒤흔들어 놓을 만큼 큰 사랑의 영향력을 끼친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가 위대한 선교사로 알려지게 되었을 때 인도 총독이 그를 초청하여 만찬을 베풀었습니다. 그때 한 장교가 조금 비웃는 조로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과거에 구두 만드는 사람, 제화공이 아니었습니까?” 그러니까 그는 고개를 저으면서 “아닙니다. 장교님, 저는 그보다 더 아래인 구두 고치는 사람이었습니다.” 라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요, 아주 큰 역사를 이룬 분 가운데 구두 고치는 사람이 몇몇 있습니다. 세계적인 부흥사 무디도 구두 수선공이었습니다. 윌리엄 캐리도 구두 수선공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 다 구두 수선공 되라는 말은 아닙니다.
가장 보잘것없는 그러한 직분이 있다고 할지라도 성령의 감동을 받아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 받으면 이렇게 위대한 역사를 이룬다고 하는 것입니다. 본인은 늘 겸손했습니다. 나같이 무능한 자를 주님 택하여 주셔서 위대한 일을 이루심을 감사합니다.
그가 가서 인도의 16개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여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게 하고 또 세람포대학을 세워서 그 대학에서 훌륭한 인재들을 많이 배출하게 되었습니다. 많이 배운 사람보다 더 크고 위대한 업적을 그가 남기고 인도에 도덕적인 기초를 그가 세우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이와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십시오.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시도하십시오.(Expect great things from God, Attempt great things for God)”
여러분,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시도하시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사랑을 실천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유언을 남깁니다.
“내가 죽으면 캐리 선교사에 대하여 아무 것도 말하지 말고 캐리 선교사의 구세주에 대하여 말하시오”
나의 구세주 예수님만을 자랑하지 나를 자랑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유언입니다. 여러분, 과연 누구를 나타내며 살고 있습니까. 여러분 자신입니까. 예수님을 나타내고 살고 있습니까. 여러분 과연 강도 만난 자의 이웃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무심코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 강도 만난 사람을 지나가는 그러한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우리가 귀 기울여 들어야 됩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한 번뿐인 인생 정말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찬송가 508장(통270) : 우리가 지금은 나그네 되어도>
1절 우리가 지금은 나그네 되어도 화려한 천국에 머잖아 가리니 이 세상 있을 때 주 예수 위하여 끝까지 힘써 일하세
후렴 주 내게 부탁하신 일 천사도 흠모하겠네 화목케 하라신 구주의 말씀을 온 세상 널리 전하세
<기도>
기도합니다.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잠깐 지나가는 인생길 한 번뿐인 인생길인데 우리가 지금까지 너무나 나 자신을 위해서 나 자신의 꿈, 계획,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 살았던 것을 회개합니다.
이제 남은 여생 주님의 영광 위해 살기 원합니다. 예수님을 나타내기 원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기를 원하오니 주님 우리의 삶을 붙들어 주셔서 우리의 삶이 주님 보시기에 가장 아름답고 귀한 삶이 되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길을 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뉴서울타임스] 조현상 기자 = 편집 disf@disf.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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