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서울타임스] 손영수 선임기자 = 2차 세계대전 종전을 한 달 앞둔 1945년 4월 9일. 독일 바이에른주 폴뢰센버그 형무소에서 39세의 남성이 교수형틀에 올라섰다. 히틀러에 저항했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위 사진)의 마지막 모습이다. 나치의 패망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은 신학자가 남긴 신학 저서와 명언은 7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묵직한 울림을 준다.
1906년 독일에서 태어난 본회퍼는 17세에 튀빙겐대에 입학했다. 21세에 베를린대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3년 뒤 대학교수 자격을 얻었다. 2차 세계대전 직전 미국에서 공부할 때 많은 지인이 독일 귀국을 만류했다. 당시 유니언신학교 교수 라인홀드 니부어가 간곡히 미국에 남아 후학을 양성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결국 거절했다.
본회퍼는 히틀러의 광기가 덮친 독일로 돌아와 목사안수를 받았다. 일생 나치를 비판했던 그는 1940년 나치로부터 강연과 집필 금지명령을 받았지만 굴복하지 않고 더욱 적극적으로 반나치 운동에 나섰다.
1942년에는 빌헬름 카나리스 제독과 오스터 장군, 몰트케 백작 등과 함께 지하조직을 창설했지만 1943년 나치 정치경찰인 게슈타포에 체포된 뒤 베를린 터겔 형무소에 갇혔다. 수감 중에도 히틀러 암살계획에 동참했지만, 미수에 그쳤다. 그가 가담했던 암살계획이 1944년 7월 20일의 발키리 작전으로 나치가 그를 교수형에 처한 직접적인 원인이 됐다.
신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수감 중 쓴 글을 묶은 책이 1951년 출판된 ‘옥중서간-저항과 복종’으로 그의 신념이 녹아있는 가장 심오한 저서로 평가받는다. 한국어로 번역된 저서만 해도 ‘나를 따르라’ ‘성도의 공동생활’ ‘본회퍼의 시편 이해’ ‘그리스도론’ ‘창조와 타락’ 등으로 다양하다.
행동하는 신앙인이자 양심적인 신학자였던 본회퍼는 그리스도인에게도 두 가지 당부를 했다. 그는 “그리스도인은 기도해야 하고 동시에 사람들 사이에서 정의를 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평화를 만드는 게 모든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라고 강조한 셈이다.
그가 남긴 명언들은 시대가 아무리 지나도 변치 않는 가치를 지닌다.
“악을 보고도 침묵하는 게 악이다” “미친 운전자가 행인들을 치고 질주할 때 목사는 사상자의 장례를 돌보는 것보다는 핸들을 뺏어야 한다” “실천은 생각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책임질 준비를 하는 데서 나온다” 등의 어록이 지금도 회자된다. 교수형틀 앞에서 그는 “이로써 끝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삶의 시작이다”라고 말한 뒤 영원을 향한 여정에 들어섰다.
한국본회퍼학회 회장 강성영 한신대 교수는 12일 국민일보와 통화에서 “본회퍼는 교회의 공적인 사명을 강조했고 나치 치하에서 이를 삶으로 실천하다 순교했다”며 “사유화되는 기독교 신앙이 만연한 한국교회에 본회퍼가 삶으로 보여준 공적인 사명 실천은 여전히 중요한 가르침이 된다”고 말했다. 독일과 한국의 본회퍼학회는 4월 9일을 본회퍼 순교일로 정하고 추모한다.
강 교수는 “본회퍼는 끊임없이 교회의 교회 됨을 회복하라고 강조했다”며 “기도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정의를 실천한 뒤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라던 본회퍼의 말은 현실과 타협하며 정체성을 잃어 가는 한국교회에 경종이 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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