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서울타임스] 손영수 선임기자 = 영화 ‘기생충’에 나오는 박 사장(이선균)의 유명한 대사다. “선을 넘는 사람을, 내가 제일 싫어하는데….” 한국인에게 ‘선(線)’은 매우 특별한 은유다. 선에는 세로줄과 가로줄이 있다. 세로줄은 위로 올라가기 위해 잡아야 하는 줄이다. 회사에서는 라인을 잘 타야 하고, 내 힘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일을 위해선 선을 대야 한다. 어느 조직이나 눈에 보이지 않는 연줄 혹은 비선이 있기 마련인데, 모르고 썩은 동아줄 잡았다가는 영문도 모른 채 추락한다.
가로줄은 나나 내가 속한 집단과 타인을 구분하는 선이다. 보이지 않는 선을 기준으로 차별과 배제가 이뤄진다. 이 선은 들어갈 문을 찾을 수 없는 성(城·카프카)이고, 하루아침에 길러질 수 없는 취향인 ‘아비투스’(부르디외)다. 지하 6피트 지상 30피트의 철제 장벽(트럼프)도 ‘1인치의 장벽’(봉준호)도, 아무나 넘어오지 못하게 하려고 고안된 선이다.
우리 사회의 전통적 가로줄은 출신 지역과 학력, 성별과 외모 등인데 이들은 오늘날까지도 유효하다. “나 이대 나온 여자야”는 영화 속에서만 존재하는 말이 아니다. 같은 연고대라도 어느 캠퍼스냐를 따진다. 강남에 살게 되면 입성한 것이고, 지방으로 가면 낙향한 것이다. 산후조리원 동기와 대치동 과외, 서울대 실험실과 로펌 인턴, 편법 증여 등을 통한 노골적인 불평등 세습도 있다. 골프회원권이나 에스테틱 회원권, 리미티드 에디션 등의 은근한 문화적 선 긋기도 있다.
선 긋기는 불평등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의 마음에 새겨진 마음의 습관이기도 하고, 불평등을 고착하고 세습케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우리 마음속에 있는 문제부터 풀어나가야 한다. 나는 기독교 복음에 이 문제를 풀 유일한 답이 있다고 믿는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 모든 장벽을 허물고 선을 지워버린 위대한 선언이다. 바울은 어떻게 해서 이런 생각에 도달하게 된 것일까. 어릴 적부터 익혔던 토라의 가르침이나 스토아학파의 코스모폴리타니즘(사해동포주의)이 그의 사고의 틀을 형성하는 데 도움을 준 사상적 환경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론적 틀이 형성되는 것과 전 존재를 들여 그렇게 살아내는 것은 영 다른 일이다.
바울의 변화 시작점은 하나님 안에서의 자기 발견이다. 그는 자신이 구제 불능의 비참한 죄인임을 철저하게 깨달았고, 동시에 거저 주는 은혜의 풍성함을 맛보았다. 그동안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것들, 그것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우월감을 느꼈던 것이 얼마나 허망한지를 밝히 알았다. 유대인 혈통, 종교적 완전함, 로마의 시민권, 다소(Tarsus)에서 배운 헬라의 학문…. 좋게 말하면 허망한 것이고 좀 과장하자면 토사물처럼 역겨운 것뿐이다.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실상을 알게 된 사람은 겸손할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을 멸시하거나 차별하는 것은 꿈도 꾸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이 받은 영적, 물질적 혜택을 다른 이가 받지 못한 데 대해 미안한 마음을 갖기 마련이다. 왜 누구는 두꺼운 마스크를 쓰고 쉬는 날 없이 택배 일을 하는데, 누구는 예쁜 옷 입고 교회에 나가나. 같은 하늘을 이고 사는 사람인데 나는 어쩌다가 남한에 태어나 자유와 풍요를 누리게 됐을까. 이전에 우월감을 느끼게 하던 것이 이제 미안해야 할 조건이 됐다. 믿음을 가졌다 하면서 선에 집착하는 사람은 자신의 믿음을 의심해 볼 일이다.
장동민 백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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