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서울타임스] 나는 1920년 평안북도 운산군에서 태어나 평안남도 대동군 송산리에서 자랐다. 송산리에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장로교회가 있었다. 처음 본 예배당은 크기가 작은 편이었으나 증축을 한 뒤에는 제법 큰 규모가 됐다. 예배당에 들어서면 한가운데 천으로 된 휘장을 기준으로 남녀 좌석을 구별했던 기억이 난다. 남녀칠세부동석이 지켜지던 때였다. 유교 전통을 지닌 이들에게 오해받지 않으려는 초창기 교회의 배려였다. 초등학생 때 몇 달간은 이 예배당이 학교로도 사용됐다.
어린 시절 교회를 다녔지만, 이 교회가 내 신앙의 온상이 되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내 고향 교회에서는 목사가 적잖게 배출됐다. 같은 환경 속에 자랐지만, 이상하게 나만 목사가 되지 못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주님의 뜻이 아니었나 싶다.
선친이 언제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됐는지는 정확히 모른다. 분명한 건 선친이 성경을 즐겨 읽었다는 점이다. 선친은 운산의 금광에서 일하다 그곳에서 미국인을 만나 기독교를 접했다. 성경을 많이 읽으며 믿음을 갖게 됐다. 성경뿐 아니라 성경 주석도 찾아 읽은 덕에 선친은 교인과 목사에게 성경 해설을 하곤 했다.
선친의 신앙생활은 좀 특이했다. 어떻게 보면 교회주의보다는 성서주의 신앙 같은 인상을 줬다. 선친은 형식적인 기도를 하지 않았다. 식사 기도를 했는지조차 기억에 없을 정도다. ‘신앙은 마음과 생활로 보여줘야 한다’는 의식이 강했다. 믿지 않는 이들에게 신앙을 강권하지도 않았다. 다만 삼촌이 교회를 멀리해 고민이 깊었던 것 같다. 남몰래 기도도 많이 했으리라 생각한다. 교회 직분에도 연연하지 않았다. 친구들이 장로가 돼도 부러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자녀들이 집사나 장로가 됐으면 하는 바람도 보이지 않았다. 당시로선 드문 신앙관이었다.
어머니 역시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다. 선친의 영향을 받았는지 모른다. 교회에서 철야기도를 하고 부인네가 울며 찬송하고 기도하는 모습에 좀처럼 공감하지 못했다. ‘바르게 살고 남에게 고통과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이 교회 나가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품으셨다.
나 역시 이런 환경에서 교회를 다녔다. 신앙이 무언지 깨닫기는 너무 어린 나이였으나 당시 주일학교에서 인상 깊게 들은 교훈이 있었다. “이스라엘 민족을 구출한 모세나 에스더 같은 애국자가 돼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일제강점기였기에 기독교 신앙은 애국·애족심과 직결돼 있었다. 선친 역시 “항상 민족과 국가를 걱정하며 살면 민족과 국가만큼 너도 성장할 수 있다”는 가르침을 주셨다. 선친의 이 말씀은 지금까지 내 인생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신앙의 유산을 전해준 부모님이 지금도 매우 그립다.
정리=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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