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서울타임스] 1944년 천신만고 끝에 고향에 돌아왔지만, 시련은 그치지 않았다. 나를 항일 인사로 간주한 일본 경찰이 주변을 돌며 감시했다. 가족의 안위를 위해 황해도 안악으로 피신해 상당 기간 지냈다. 절망감과 위기의식이 동시에 밀려왔다. 가족과 민족을 위한 기도가 절로 나왔다. 하루는 안악의 거처에 머물다 그 집에 사는 젊은이가 일본군에 입대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눈물의 기도가 나왔다. “주님, 이제 더 갈 곳도 없습니다. 모든 희망이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까.” 가냘픈 체구에 착한 심성을 가진 그 청년은 돌아오지 못했다.
1945년 8월 14일 밤이었다. 고향에 돌아와 조용히 지내던 나는 이상한 꿈을 꿨다. 꿈에서 마우리 선교사와 진남포 바닷가에 있는 큰 창고 두 곳에 들어갔는데, 부패한 일본인 시신이 놓여 있었다. 무슨 꿈인지 생각하다 다시 잠들었는데 또 꿈을 꿨다. 빛을 잃은 큰 태양이 동쪽 산으로 지는 모습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아버지께 꿈 이야기를 했다. 아버지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일본의 침략이 시작될 즈음 작은 태양이 동쪽에서 무수히 떠오르더니 온 땅에 가득 차는 꿈을 꿨다”며 “오늘 평양에 다녀와 보라”고 했다. 아침 식사 후 20리를 걸어가 전차를 타고 평양 중심가로 가는데, 갑자기 전차가 멈췄다. 거리의 라디오에선 일본 국가와 함께 “일왕의 중대발표가 있다”는 말이 흘러나왔다. 전차에서 내려 라디오 방송을 들었다. 일본이 항복한다는 일왕의 목소리였다.
귀를 의심했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일제는 “미국과 싸워 승리하고 있다. 대동아공영권이 이뤄진다”고 떠들어댔다. 서둘러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전쟁은 끝났다. 일본은 패했다. 우리는 독립했다. 집에 돌아와 이른 저녁을 마치고 동네 사람이 한자리에 모였는데 누군가 “대한독립 만세”를 불렀다. 종전과 독립 이야기로 밤을 지새우지 않는 집이 없었다. 아내와 나는 “이제부터 건강하게 열심히 조국을 위해 일하자”고 다짐했다.
하지만 해방된 조국은 환희와 더불어 혼란에 빠져들었다. 한반도는 38선으로 남북이 갈라졌다. 평양에 주둔한 소련군은 남아 있는 일본인을 마구잡이로 학대했다. 본토로 돌아가지 못한 일본인은 수용소에 모여 지냈는데, 소련군은 일본인 수용소 내 젊은 여성을 트럭에 태워 납치했다. 추위와 배고픔으로 죽은 일본인 시신은 소달구지로 옮겨져 그대로 땅에 묻혔다. 비참했다. ‘일제 잔당 척결과 친일파 처단도 필요하지만, 인권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련군과 함께 온 공산당은 38선 이북을 이념과 무력으로 다스렸다. 불행히도 나는 본명이 김성주인 김일성과 고향이 같았다. 그는 나와 같은 보통학교를 다닌 선배로 그의 조부모와 삼촌, 사촌들과도 알고 지냈다. 종전 뒤엔 고향에 돌아온 그와 하루 오전을 함께 보내기도 했다. 대화를 나누며 공산주의자가 됐다는 사실을 알았고 소련의 사주를 받아 집권하는 과정도 지켜볼 수 있었다. 김성주가 ‘김일성 장군’이 되는 과정은 물론 그의 친인척도 모두 알았기에 역사의 아이러니도 직접 체험할 수 있었다.
편집자주 손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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