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서울타임스] “여호와여 내 소시의 죄와 허물을 기억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을 인하여 하옵소서.”(시 25:7)
우리가 소시(少時) 즉 젊었을 때의 죄와 허물을 기억한다는 것은 복된 일이다. 회개할 수 있어서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1875~1965)과 그의 본처 박승선(납북 실종)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소시의 죄와 허물’이란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서울 낙산 성곽 바깥 길가 ‘지장암’이란 암자가 있다. 보물 ‘목조지로좌나불좌상’과 유형문화재 ‘지장암 산신도’가 소장하고 있다. 1924년 강재희 거사가 중창했다. 지장암 쪽 성곽 암문을 통해 도성으로 들어가면 바로 ‘이화장’을 만난다.
현 이화장 경내 이승만 전 대통령 동상. 이곳에서 초대 내각이 구성됐다.
이화장은 8·15광복 직후 이승만 박사가 미국에서 돌아왔을 때 거처가 없자 주변 인사들이 기증한 곳이다.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이곳에서 조각(組閣)했는데 그 전통 건물이 ‘조각정’이다. 이화장은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497호다. 지장암과 이화장은 현재 300m, 도보 10분 거리다.
서울 정동 배재학당과 아펜젤러 선교사 동상. 이승만은 배재학당 입학 후 신앙을 가졌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이승만은 1895년 배재학당 입학 후 독실한 크리스천이 됐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는 미국 정치를 좌우하는 기독교 원리주의 복음파(미국 중서부에서 남동부)와 맥을 같이하는데 한국의 ‘기독교 우파’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인물이 이승만이다. 철저한 반공산주의자였던 그는 문명개화의 연결고리로 개신교를 받아들이고 청교도적 신앙생활을 했다. 군목·형목 제도의 확립과 재임 기간 중 장관급 임명자 135명 가운데 절반을 교인으로 채웠다. 기독교 문명을 통한 부국을 꿈꾼 리더였다.
사람들은 이승만 대통령의 부인을 오스트리아 출신 프란체스카(1900~1992)로 기억한다. 하지만 이승만은 17세에 만나 결혼한 본처가 있었다. ‘박 부인’이었다. 조선 말 여자들은 대개가 이름이 없었다. 예수 믿게 된 이승만이 자신의 ‘승’자를 따 ‘박승선’이라며 인격을 불어넣었다. 사실 이승만·박승선 부부의 삶은 ‘민중사’다. 미신에 의지해 살던 필부필부가 역사의 격랑을 헤엄치다 ‘햄릿’과 같은 인간사를 겪기 때문이다. 그들은 구원을 바랐을 것이다.
박승선 전도사가 출가 전 살던 서묘 일대. 지금의 한국은행 일부로 남대문파출소 옛터이기도 하다.
박승선은 임오군란(1882년) 때 궁중 나인이었던 어머니가 반란군에 밟혀 죽었다고 한다. 앞서 부친도 죽었다. 그를 우수재(서울 후암동) 사는 외가가 걷어 길렀다. ‘대가 센 여자’라는 기록이 나온다. 어느 날 이승만 아버지 이경선은 점을 보니 ‘봉사’(시각장애인)와 결혼해야 아들 팔자가 편다는 말에 안구에 반점이 있는 박승선을 택했다. 그들은 서묘(현재 한국은행 자리 일부)에서 처음 만났다. 결혼 후 남편 영향으로 신앙을 가졌다.
1899년 이승만이 고종 폐위 음모 사건에 연루돼 한성감옥에 투옥된다. 역모였다. 이에 놀란 박승선은 어떻게든 남편을 구하고 싶어 대한문 앞에서 석방을 탄원하며 사흘을 단식하며 통곡했다. 박승선은 엽랑에 수를 놓아 선교사들에게 팔아 옥바라지를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어린 아들 태산을 안고서였다. 이승만은 한성감옥에서 성령체험을 하고 1904년 선교사 등의 영향으로 조기 석방된다.
이승만·박승선 부부(오른쪽)가 아버지 이경선과 아들 태산(모자) 그리고 형수 및 조카와 함께했다. 한성감옥에서 출옥한 1904년에 찍었다.
출옥 후 기독교 민족주의자였던 이승만은 일제의 감시 대상이었다. 그는 미국 망명을 택했다. 박승선은 오직 신앙에 의지해 수절했다. 성경을 끼고 살았다. 현 남대문시장 내 상동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다는 1920년대 신문 보도가 있으나 상동교회의 기록은 없다. 전동교회(典洞·현재 견지동) 전도사라고 했으나 이 역시 실증되지 않는다. ‘신학 공부를 한 똑똑한 전도사’라는 보도다. 이승만이 미국으로 망명하자 아들 태산을 지인 편에 보냈고 자신도 남편에게 가기 위해 선교사 주선으로 일본 나가사키에서 영어 공부를 하다 발병해 3개월 만에 포기하고 귀국했다. 태산은 미국에서 죽고 말았다.
1965년 8월 조선일보가 보도한 박승선 창신동 625번지 집.
이승만은 독수공방하는 아내를 위해 창신동 626번지 일대 2만㎡(6000여평)의 땅을 남겼다. ‘망명가 이 박사 부인 집’ ‘포도나무집’으로 불렸다. 박승선은 타국에서 고생하는 남편의 뜻을 잇고 신앙인의 자세로 살고자 창신동에 ‘보종학원’을 열고 어린이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그 무렵 개구멍받이에 버려진 입양한 아들 은수(작고)씨가 있었다. 그 은수씨가 보종학원을 다니다 창신국민학교 3학년으로 전학했다.
그런데 독립운동가의 아내이자 신간회 등 민족주의 계열 상동교회 영향 아래 있는 박승선을 일경이 밀착 감시했다. 그는 황해도 남편 고향과 경기 양주 등을 떠돌며 감시를 피했다. 이때 험한 일을 당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더구나 ‘사마리아인’을 도우려던 박승선은 혹독한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지장암을 건축하려던 한 거사가 비용 충당을 위해 박승선의 땅을 담보 삼게 해달라 애원했고 “착한 일 하기는 마찬가지”라는 생각에 돕고 만다. 이 일은 사기와 폭행 사건으로 비화했다. 하지만 일경이 박승선을 도울 리 없었다. 빈털터리가 된 박승선은 동대문부인병원(이화여대병원 전신) 허드렛 일꾼이 됐다. 이 내용은 1926년 7월 조선일보가 ‘예수교 독신자로 불교에 동정 절을 개축시킨 후 기막힌 봉변’을 당했다며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박승선 (1875~1950)
해방. 금의환향한 이승만은 박승선을 내쳤다. 박승선이 그의 거처 ‘돈암장’에 몇 번씩 갔으나 애정이 없었다. ‘부정설’ ‘개가설’이 있는 데다 프란체스카와의 결혼 때문이었다. 중혼인 셈이다. 결국 이승만·박승선의 창신동 호적은 이승만 집권기에 지워졌다. 하나님만을 의지해 살던 한 여인은 1950년 인천상륙작전 직후 얹혀살던 신당동 사돈집 대문에 발린 인민군 포스터를 찢어 버렸다가 그날로 잡혀 납북되고 말았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사건이다.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을 인하여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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