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서울타임스] 레바논 베이루트항에서 발생한 초대형 폭발 사고가 정부의 무능과 부패에서 비롯된 인재로 드러나면서 정정 불안이 그 어느 때보다 커졌다. 오랜 내전과 고질적인 부정부패로 인한 민생 파탄에 코로나19 확산까지 겹친 레바논에서는 이번 참사를 계기로 반정부 시위가 불붙고 있다.
미국과 유럽 등 서방 국가들은 레바논이 통제불능의 상태로 빠질 것을 우려하고 있다. 레바논은 아랍권 국가 중 종교·언론의 자유가 가장 잘 보장된 나라라는 평가를 받는다. 반면 이슬람 시아파 무장정파인 헤즈볼라를 통해 레바논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이란은 서방의 영향력 확대를 경계하고 나섰다.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항에서 대규모 폭발 사고가 발생한 지 사흘 후인 7일(현지시간) 항구 인근에 세워져 있던 자동차에 회색빛 재가 수북히 쌓여 있다. AFP연합뉴스
일단 베이루트항 폭발 사고는 2750t에 달하는 질산암모늄이 7년간 항구 창고에 방치돼 있었다는 점에서 국민들의 분노를 사고 있다. 항구와 세관 측이 수차례 법원에 재출항을 요청했음에도 묵살됐고,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인명 피해로 이어졌다.
레바논 시민들은 6일(현지시간) 저녁에도 시내 중심가에서 반정부 시위를 이어갔다. AP통신은 “폭발 참사 이후 이번에야말로 지도자들에게 실정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인식이 퍼지고 있다”고 전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대규모 폭발 사고가 발생한 레바논 베이루트항을 찾은 6일(현지시간) 한 여성이 '레바논 정부가 테러리스트다'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AP연합뉴스
폭발 사고 직후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은 곧바로 대규모 지원 의사를 밝혔다. 미국은 수송기로 구호 물자를 보냈고, 유럽연합(EU)은 3300만유로(약 465억원) 규모의 구제 금융을 지원하기로 했다.
한때 레바논을 식민 통치했던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휴가를 중단한 채 베이루트를 찾아 애도의 뜻을 전했다. 레바논 시민들이 참사 현장을 방문한 마크롱 대통령에게 정권 퇴진에 힘써달라고 요청하는 이례적인 장면도 벌어졌다.
레바논은 다수 정파가 권력을 분할해 국가를 운영하는 독특한 정치 체제를 갖고 있다. 공직은 19개 정파가 나눠갖고, 의회는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절반씩 차지한다. 총리는 이슬람 수니파, 대통령은 마론파 기독교, 의회 의장은 이슬람 시아파가 맡는다. 종파간 차이가 정파 분쟁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나름의 장치를 둔 것인데, 사실상 무기한 권력을 보장받다보니 부정부패와 무능이 만연해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미국 뉴욕에 있는 레바논 영사관 앞에서 6일(현지시간) 시위대가 레바논 정부를 비판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AFP연합뉴스
레바논은 남쪽으로 이스라엘을 제외하면 다른 아랍국가로 가기 위해 시리아를 관통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다. 중동 최대의 교전단체이자 레바논의 정당조직인 헤즈볼라의 근거지이기도 하다. 헤즈볼라는 반미 국가인 이란의 지원을 받고 있고, 이 둘을 이어주는 역할을 시리아가 하고 있다. 이 때문에 미국은 레바논에서 헤즈볼라가 득세해 반미 성향이 강해지는 상황을 늘 경계해왔다.
이번 폭발 사고로 레바논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헤즈볼라와 이란은 민심을 잃었다. 압바스 무사비 이란 외무부 대변인은 “이런 민감한 국면을 이용해 일부 국가가 물고기를 낚으려 한다”며 “레바논을 제재했던 적들(서방)의 동정은 외교적 위선”이라고 주장했다. 이란은 코로나19 확산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도 레바논에 긴급 구호물자를 보냈다.
이런 가운데 레바논의 고위 외교관이 선거법 개정과 조기 선거 개최를 요구하며 사퇴해 파장이 주목된다. 외신에 따르면 트레이시 샤문 요르단 주재 레바논 대사는 방송으로 중계된 연설에서 “더 이상 조국의 태만과 부패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시선을 견딜 수 없다”며 사임 의사를 밝혔다. 그는 “1975~1900년 내전 이후 레바논을 통치해온 정치인들은 모두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폭발 사고 이후 사임 의사를 밝힌 레바논 정부 인사는 마완 하메드 하원의원에 이어 샤문 대사가 두 번째다.
권지혜 기자 jh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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