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지난해 미국 경매서 매입해 환수한 청동제 해시계 ‘앙부일구’ / 문화재청
[뉴서울타임스] 고대성 기자 = 문화재청은 조선 시대 천문학 기구인 해시계 ‘앙부일구’ 3점을 비롯해 조선 시대 전적 및 불교조각 등 총 5건에 대해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 예고하였다.
이번에 지정 예고된 앙부일구(仰釜日晷)는 총 3점으로 각각 국립고궁박물관, 국립경주박물관, 성신여대박물관이 소장 중이며, 특히 이 중 국립고궁박물관 소장본은 2020년 미국에서 돌아 온 환수문화재이다.
‘앙부일구(仰釜日晷)’는 ‘앙부일영(仰釜日影)’으로도 쓰며, 솥이 하늘을 바라보는 듯 한 모습을 한 해시계라는 의미이다.
1434년(세종 16) 장영실(蔣英實), 이천(李), 이순지(李純之) 등이 왕명에 따라 처음 만들었으며, 그 해 10월 종묘 앞과 혜정교(惠政橋, 현 서울 종로에 설치되었던 다리)에 각 1대씩 설치하였고, 조선 말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제작되어 궁궐과 관공서에 널리 보급되었다.
조선 초기에 제작된 앙부일구는 현재까지 알려진 사례가 없으며, 지금 남아있는 앙부일구의 경우, 겉면에 ‘북극고 37도 39분 15초(北極高 三十七度 三十九分 一十五秒)’라고 새겨진 명문의 위도 값이 1713년(숙종 39) 이후 처음 사용된 사실이 『국조역상고(國朝曆象考)』를 통해 확인되므로 제작시기 역시 1713년 이후로 추정된다.
세 점의 앙부일구는 모두 청동금속제로서, 오목한 몸체를 네 개의 다리가 받친 모습을 하고 있다.
시반에는 남북[午子] 방향에 북극으로 향한 영침(影針, 그림자 침)이 달려 있고, 시간을 측정할 수 있는 세로 눈금인 시각선이 15분 간격으로, 계절을 알려주는 24절기는 가로 눈금으로 13개의 절기선이 은상감(銀象嵌)으로 새겨져 있다.
받침대는 네 개의 다리와 열십자[十]의 다리받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네 개의 다리에는 각기 여의주를 물고 하늘로 올라가는 용의 모습을 새겼으며 용 좌우에 구름 문양을 표현하였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본을 포함해 3개의 앙부일구는 ▲제작기법에서 시반의 시각선과 절기선, 지평면의 절기글자와 24방향 글자에 표현된 은상감 기법과 영침, 받침대에 새겨진 용무늬, 구름장식, 거북머리 장식 등이 뛰어난 조형미를 보이고 있어 숙련된 기술자가 제작한 최상급의 앙부일구로 판단되는 점, ▲태양의 그림자로 시간 뿐 만 아니라 날짜(절기)를 함께 파악할 수 있도록 하여 독창성이 뛰어나다는 점, ▲ 조선시대 천문과학기술의 발전과 애민정신을 엿볼 수 있는 대표적 과학문화재라는 점에서 보물로서 지정가치가 충분하다.
‘자치통감 권266∼270(資治通鑑 卷二百六十六~二百七十)’은 1434년(세종 16) 편찬에 착수하여 1436년(세종 18)에 완료된 총294권 가운데 권266∼270의 1책(5권)에 해당하는 서책이다.
주자소(鑄字所)에서 초주갑인자로 간행된 금속활자본으로, 워낙 수량이 많아 완질(完帙)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유사한 판본이 국립중앙도서관,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등 여러 곳에 소장되어 있으나, 전해지는 내용과 수량이 많지 않아 귀중한 자료적 가치를 갖고 있다.
지정 예고 대상 자치통감은 현재까지 해당 권이 없는 유일본으로, 초주갑인자로 인쇄한 금속활자본으로 이미 지정된 자료와 비교할 때 인쇄 및 보존상태가 매우 우수해 서지적 가치 또한 높다.
이러한 의미에서 ‘자치통감 권266∼270’은 조선 초기 초주갑인자 판본을 보완해 주며, 전해지는 사례가 많지 않은 희귀본으로서 당시 정치학, 행정학 및 서지학 등의 역사적 자료로서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으므로 보물로 지정해 연구하고 관리할 필요가 있다.
‘경주 분황사 금동약사여래입상(慶州 芬皇寺 金銅藥師如來立像)’은 높이 3.4미터에 달하는 대형 불상으로, 조선 후기의 유일하고 규모가 가장 큰 금동불 입상이다.
1998년 분황사 보광전 해체 수리과정 중 건축 부재에서「분황사상량기(芬皇寺上樑記)」(1616년)와「부동명활성하분황사중창문(府東明活城下分皇寺重創文)」(1680년) 묵서(墨書)가 확인되어 이 약사여래입상이 1609년(광해군 1) 5,360근의 동을 모아 제작된 사실이 밝혀졌다.
분황사는 신라시대부터 자장율사(慈藏律師), 원효대사(元曉大師) 등 여러 고승들의 수행처이자 중요한 가람(伽藍, 사찰)으로 인정되어 온 한국의 대표적 명찰(名刹)이다. 원래 이곳에 봉안되었던 금동약사불은 정유재란(1597년)으로 소실되었으나, 신라시대부터 이어져온 약사도량으로서 분황사의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해 전란 후 얼마 되지 않아 지금처럼 장대한 규모로 복구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경주 분황사 금동약사여래입상은 규모가 커 우람한 형태미를 보이고 있지만, 이와 달리 둥글고 통통한 얼굴에 어깨가 왜소해 전반적으로 동안(童顔)의 형태미를 보여준다.
특히 아이처럼 앳돼 보이는 이목구비는 16세기 불상 양식이, 가슴과 복부가 길쭉한 비례감과 세부 주름 등 신체 표현은 17세기 양식이 엿보인다는 점에서 신·구 양식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1616년과 1680년에 작성된 두 건의 상량문을 통해 1609년에 동(銅)으로 불상을 조성했다는 경위와 불상의 명칭까지 분명히 밝히고 있어 이 시기 불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보물로 지정해 보존할 가치가 높다.
문화재청은 ‘앙부일구’ 등 5건에 대해 30일간의 예고 기간 중 각계의 의견을 수렴·검토하고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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