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입니다.
그리고 고려 중엽 막강한 몽고의 침입을 당하여 결국 굴복한 이후로는 기세가 한풀 꺾이었고 수비에 더 큰 비중을 두었지요.
조선시대에 들어와 초기에 있었던 대마도 정벌과 4군6진 개척을 제외하고는 수비로 일관하였습니다.
조선 중기 이래로 극심하였던 왜구의 노략질에도 방어만 하였지 대마도 정벌은 꿈도 못 꾸었지요.
단지 병자호란에서의 패배로 삼전도에서 인조가 굴욕을 당한 후 효종에 의하여 북벌정책이 잠시 시행되었지만 지금의 말만 앞세우며 실제로는 미국에 의존하여 당연히 가져야 할 전작권도 사양하는 극우 보수 인사들처럼 그 때의 지배층이었던 송시열이 중심이 된 노론 파 대신들도 명분론에만 젖어있을 뿐 실제적인 군사행동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으므로 결국 우야무야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수비에만 치중한 결과로 도로가 거의 없었지요.
다시 말하면 남부 지방의 쌀을 도로를 이용하여 운반할 준비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왜구와 해적들이 노략질을 하여도 그나마 뱃길이 대량운송에 더 적합한 것이었습니다.
곡창인 호남에서 출발한 세운선들이 한강으로 들어와 삼개에 닻을 내렸지요.
그리고 서해안에서 생산된 소금도 한강으로 들어와 삼개 맞은 편 즉 지금의 염창동에 모인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도 그렇지만 바닷길 역시 만만치 않았지요.
특히 태안 앞바다가 위험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지도를 보면 알 수 있지만 이렇게 위험한 해역을 돌출한 태안 빈도로 인화여 멀리 돌아가야 했습니다.
만약 운하를 파서 위험한 뱃길을 단축하면 훨씬 운송이 편하겠지요.
그래서 시작된 것이 굴포 운하였지만 그 당시의 기술로는 완성할 수 없었으므로 대신 만든 것이 인조 16년에 안면곶을 절단하였고 이 때 안면도가 생긴 것입니다.
새로 생긴 안면도는 지리상의 이유로 북쪽은 태안 생활권으로 남쪽은 광천 생활권으로 나누어져 상당한 불편을 겪어야 하였습니다.
1970년에 안면대교가 개통되어 실제로 육지가 된 후에는 안면도 전역이 태안 생활권이 되었지요.
안면도는 쌀 운송의 편리로 만들어진 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