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동(廣東, 광둥)성에 간 까닭은 그곳이 따뜻해서였다. 송재소 교수의 중국인문기행을 겨울에 하면서, 장강을 따라 서진하던 코스는 남쪽으로
선회했다. 광동성은 영상 20도 정도로 따뜻했다. 중국 남쪽의 관문인 광동성은 성도가 광저우[廣州]이고, 홍콩·마카오가 인접해 있다.
이번 기행지에서 등장한 인물이 임칙서(林則徐, 린쩌쉬, 1785~1850) 홍수전(洪秀全, 홍쉬취안, 1814~1864)
강유위(康有爲, 캉유웨이, 1858~1927), 양계초(梁啓超, 량치차오, 1873~1929) 손문(孫文, 쑨원, 1866~1925) 등이었다.
중국 근대 변혁기의 주요 인물들이었다.
광동성 출신의 인물들, 변혁의 주역으로
기행 3일째 찾았던 아편전쟁박물관의 주인공은 임칙서였다. 그는 복건성 출신이지만, 광동성에서 역사의 한 장면을 장식했다. 그는 강직하고 청렴한
관원이었다. 그는 아편 엄금을 주장했다. “아편으로 인해 수십 년 뒤에는 중원에서 적을 막는 병사가 없을 것이며, 군비에 쓸 은(銀)도 사라질
것이다”
임칙서는 흠차대신으로 임명되어 광저우에 갔다. 그는 중국 아편 상인에게 단호하게 조처했지만, 외국의 아편 상인에게는
신중했다. 영국 여왕에게 아편의 폐해를 들어 도의로써 호소했고, 상인에게 아편을 넘겨 줄 것을 요청했다. 궁지에 몰린 아편 상인은 일단 아편을
내놓았다. 임칙서는 아편 2만 상자(237만근)를 후먼[虎門]에서 20일간 불태웠다. 그 역사적 장소에 건립된 박물관의 그림과 동상이 말하는
것처럼, 임칙서는 정정당당했고, 또한 승리한 듯 보였다.
박물관 안의 한 면에는 영국 의회에서 글래드스톤(William
Ewart Gladstone, 1809~1898)이 연설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그가 당시 아편 거래를 위한 전쟁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는
도의의 편이었다. 그러나 영국은 전쟁을 일으켜 중국을 굴복시켰다. 청 왕조는 중국을 지키지도 임칙서를 지켜주지도 못했다. 도의의 세상이
아니었다.
청 왕조의 중국이 기울고 있을 때, 홍수전이란 인물이 등장했다. 몇 차례 과거에 낙방한 그는 스스로 예수의
동생임을 자처하고 배상제회(拜上帝會)를 결성했다. 그의 군대는 순식간에 남경을 함락하고 중국을 뒤흔들었다. 이른바 ‘태평천국의 난’이었다.
홍수전은 광저우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태어났다. 기행 첫날 방문한 홍수전 옛집과 기념관에서 소개하듯이, 후대 역사인물들은 태평천국의 난을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홍수전은 새로운 시대를 열기에는 국량이 작았다. 리더십의 한계와 내부 분란으로 무너졌다.
이제 중국은
어디로 갈 것인가? 강유위와 양계초가 길을 제시했다. 모두 광동성 남쪽 출신이었다. 기행 5일째 찾아간 광저우의 구씨서실(邱氏書室) 안에는
강유위가 쓴 ‘만목초당(萬木草堂)’이란 편액이 걸려 있었다. 일찍이 서양 문물에 관심을 가진 강유위가 이곳에서 강학을 하며 양계초와 같은 제자를
양성했다. 이곳 표지판에는 만목초당을 ‘무술변법책원지(戊戌變法策源地)’라고 소개했다. 무술변법의 계책이 시작된 곳이란 뜻이다.
강과 양의 변법자강운동은, 청일전쟁의 패배로 한계를 드러낸 중체서용운동을 대신했다. 그러나 개혁에 돌입한 지 103일만에
막을 내리고 말았다. 이른바 ‘100일 유신(무술변법)’이다(1898). 입헌군주제 개혁은 그나마도 시행되기 힘들었지만 한계가 있었다.
이제 혁명을 통한 공화제 수립이 중국의 목표가 되었다. 민족, 민주, 민생의 세 가지를 주장한 손문이 지도자로 부상했다. 그
또한 광저우에서 가까운 향산(香山: 현재의 中山) 출신이었다. 광저우에는 손문을 기념하기 위한 중산기념당이 있다. 건물 전면에는
‘천하위공(天下爲公)’이란 편액이 걸려 있었다. 광저우의 발전상은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지만, 손문이 말한 혁명이 모두 완성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나라 안팎의 지도자들, 도의가 있었으면
광동성의 인물들이 중국의 길을 찾아 분투할 때 ‘나쁜 놈’으로 거명되는 인물이 있었다. 바로 원세개(袁世凱, 위안스카이,
1859~1916)였다. 하남성 출신인 그는 변법개혁운동을 지지하는 듯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배반했다. 손문의 혁명과정에서도 황제가 되려는
권력욕에 중국의 나아갈 길을 방해했다. 그가 임오군란, 갑신정변 무렵에 조선에 와서 자행한 방자하고 무도하며 시대착오인 행위를 더 말해 무
하겠는가.
중국 근대에 광동성에서 출현한 인물들을 보면, 시대적·지리적 환경이 인간의 성장에 미치는 영향이 막대함을 새삼 알
수 있었다. 또한 인간은 홀로 모든 것을 완성할 수는 없고, 함께 만들고 이어 달리며 그 자질과 능력이 향상된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한 가지 더. 역사 속 옛사람을 만나면서 개인의 품성과 자질을 생각해본다. 큰 역사적 흐름 속에 일개인의 선과 악이 얼마나
영향을 미치랴. 하물며 선악이란 것도 일도양단하기 어려운 것인데. 그럼에도 사람이란 도의와 양식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다. 아무리
국가의 일이 시스템에 의해 움직인다고 하지만, 구체적으로 임무를 수행하는 인물에 따라 많은 차이가 생긴다. 동서고금이 다르지 않다. 나라 안팎의
뉴스를 장식하는 정치 지도자들이 하나둘 떠오르니 마음이 편치 않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