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를 따라 출애굽한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복지를 향하는 길목을 가로막는 나라들마다 토담 무너지듯 무너지는 것을 목격한 모압 왕 발락이 자기 관할하에 있는 당대의 하나님의 선지자 브올의 아들 발람에게 이스라엘 민족을 저주하도록 부탁하였습니다. "보라 한 민족이 애굽에서 나왔는데 그들이 지면에 덮여서 우리 맞은편에 거하였고 우리보다 강하니 청컨대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하라 내가 혹 쳐서 이기어 이 땅에서 몰아내리라 그대가 복을 비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줄을 내가 앎이니라"(민수기 22:5~6) 하였습니다. 이런 부탁을 받은 발람이 하나님께 기도하였으나 하나님이 발람에게 이스라엘 민족을 저주치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모압 왕 발락이 전보다 더 많은 귀족들을 발람에게 보내어 자신의 부탁만 들어주면 발람을 그 나라에서 크게 높이고 존귀케 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뜻하시고 허락지 않은 사항에 대해 선지자가 자기 야욕이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의 뜻으로 재차 하나님께 그 의향을 물어보는 것도 죄악입니다. 그러나 선지자 발람은 발락의 융숭한 대접을 받고 발락의 뜻으로 하나님께 이스라엘을 저주할까요 말까요 하는 식으로 또 물었습니다. 하나님의 종이라면 하나님의 뜻이 한번 결정되었으면 그것을 자신의 불굴의 소신으로 삼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발람은 사람들로부터 받는 융숭한 대접에 미혹되어 하나님의 처음 뜻이 재고(再考) 되기만을 바랐습니다.
이때부터 발람은 유혹의 욕심에 빠진 상태에서 하나님의 선지자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민수기 23:19) 하심 같이, 하나님이 한번 결정하신 일에 대해 사람의 뜻이 개입되어 그 뜻을 돌이키고자 재차 여쭙는 것은, 자신이 드리는 제물과 정성이 혹시 하나님 보시기에 미흡하여 더 많은 제물과 피땀 어린 기도를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마치 귀신 들린 무당에게 굿을 의뢰한 사람이 복채(卜債)가 적으면 혹 점괘나 신내림이 신통치 않을까 하는 걱정과도 같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태복음 5:18) 하셨고 또,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브리서 13:8) 하심 같이, 하나님이 작정하시고 뜻하신 모든 말씀은, 진실 쪽으로 점점 더 가까워지는 의미로만 변형과 변경이 가능할 뿐, 처음 정하신 뜻은 천지가 변할지언정 털끝만큼도 변경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신학자들이 발람 선지자와 같이 태초에 뜻하신 하나님의 말씀일지라도 오늘날 이 시점에 이르러서는 혹 그 뜻을 돌이키지 않을까 하는 요행심으로 새로운 해석을 찾아 구하느라 수십여 년의 세월을 성경 연구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모압 왕 발락이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대답하는 발람 선지자의 말을 악착 같이 변경시켜 보려고 세 번식이나 제단과 예물을 바꾸어 가며 제사를 드리면서 하나님이 제발 이스라엘 민족을 저주해 주도록 바랐습니다. 마치 사람들이 무당에게 상당한 값을 더 지불하면 귀신이 흡족히 생각해 신내림 굿을 해 주는 것처럼, 하나님 또한 그러한 신이길 바라며 상술적인 흥정을 펼쳤습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을 사단과 같이 취급하려는 타락한 선지자들의 생애이자 말로입니다. 하나님이 끝내 모압 왕 발락이 원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이스라엘 민족을 저주하지 않고 축복하게 되자, 발람이 지금껏 자신을 존대해 준 발락에게 보답하는 차원에서 이스라엘이 망하는 비법을 귀뜸해 주고 떠났습니다.
"그러나 네게 두어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요한계시록 2:14) 하심 같이 발람이 발락에게 가르쳐 준 것은, 저들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우상 앞에 무릎 꿇게 하고 음란한 죄를 저지르게 하면 하나님께 미움을 받아 벌을 받게 된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래서 모압 왕 발락이 이스라엘 진 주변에 우상의 단들을 펼쳐 놓고 거기에다 음심이 가득한 여인들을 배치시켜 이스라엘 두령들을 초대해 먹이고 간음하도록 하였습니다. 이 일로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염병을 퍼뜨려 죽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의 두령들을 잡아 태양을 향하여 여호와 앞에 목매어 달라 그리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이스라엘에게서 떠나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사사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관할하는 자 중에 바알브올에게 부속한 사람들을 죽이라"(민수기 25:4~5)고 명령하고 있는 도중에도 이스라엘 두령 하나가 미디안 여인을 데리고 와 자기 장막에 들어가 행음하였습니다. 이것을 본 제사장 아론의 증손자 비느하스가 하나님의 진노로 대신 격분해 창을 들고 뒤따라가 저들의 배를 관통시켜 죽이자 만연되고 있는 염병이 그제서야 그치게 되었습니다. 이 때에 염병으로 죽은 자가 2만 4천여 명이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해 하나님이 모세에게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의 노를 돌이켜서 나의 질투심으로 그들을 진멸하지 않게 하였도다 그러므로 말하라 내가 그에게 나의 평화의 언약을 주리니 그와 그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이라 그가 그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니라"(민수기 25:11~13) 하시며, 하나님의 질투심을 대신해 간음한 자들을 죽인 비느하스와 그 후손들에게 북을 주셨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는지 동행하고 있지 않는지를 알려면, 세상 죄악의 만연에 대해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미워해 책망(제재)하는지 그냥 방관하는지를 살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남을 미워하는 미움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즉 사사로운 이권 때문에 남을 미워하는 악한 탐심의 미움이 있고 또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으로서 개·돼지 같은 짓을 하거나, 탐심으로 남의 것을 도적질하거나 빼앗는 강도 짓을 하게 되면 하나님이 그들을 미워하는데, 이 때 하나님의 미움을 대신해 그들을 미워하는 것이 바로 정의입니다. 악한 탐심의 미움은 죗값을 치르지만 하나님이 미워하는 일을 대신해 미워하는 대리 미움은 정의가 됩니다. 소인배들은 자신의 이권과 탐욕을 위해 남들을 미워하지만, 정의로운 분들은 하나님과 국가와 민족과 사회가 미워하는 악인들을 하나님과 국가와 사회를 대신해 미워하고 책망합니다.
사람의 탐심에서 발생되는 이기주의 미움과 하나님과 국가와 민족과 사회가 미워하는 공공의 적을 대신해 미워하는 대리 미움이 바로 인류 역사의 다툼과 분쟁의 근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복)과 미움(채찍)은 표현 방식만 다를 뿐, 내용은 다 선하고 의롭습니다. 즉 사랑할 수 없을 정도로 비뚤어져 있을 때에는 미움이란 매로 교정해 주며, 또 매로 교정해 바로 세워지면 복을 주어 사랑합니다.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잠언 13:24) 하심 같이, 선악에 근거한 부모의 사랑(당근)과 미움(채찍)은 모두 선하나, 유괴범들의 무분별하고 무조건적인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미움 그 자체이며 죽음(멸망)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의 선악에 근거한 예수님의 인간 사랑 속에는 죄를 미워해 근절하고자 하는 매도 속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을 사랑만 하고 저들의 죄를 미워하지 않았더라면, 결코 십자가에 달려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가 참혹한 십자가 형벌로 죽는 것은, 그만큼 세상 사람들의 죄를 미워하였기 때문입니다.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야고보서 4:4~5) 하심 같이, 예수님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성령 또한 세상 죄에 대해 선전포고를 한 상태입니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하실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한복음 16:7~8) 하심 같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오신 성령 또한 예수 믿는 자들로 하여금 아직도 세상에 남아 있는 죄를 미워해 멸하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성령이 거하는 참된 신앙인들은 비느하스와 같이 세상 죄를 여지 없이 미워해 죽입니다. 비느하스는 창으로 악인의 몸을 찔러 죽였으나, 예수님(성령)은 하나님의 검으로 악인의 악을 찔러 죽입니다. 악인을 죽이는 방법은, 악한 자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단죄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 수도 서울 시청 광장에는 동성애자들이 소돔·고모라인들의 축제를 펼칩니다. 이 일은 마치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을 향해 가는 길목에 모압 왕 발락이 우상의 제단을 배설해 놓고 여인들과 간음해 죄짓도록 유혹하는 짓과 같습니다. 동성애자들이 미물보다 못한 짓을 하여 불치병 에이즈에 걸렸으면, 그 상태를 부끄러워 하고 자가격리되어 더 이상 타인들이 자신들과 같은 불행에 빠지지 않도록 자숙하여야 합니다. 즉 자신들을 위험 표지판으로 삼아 아무도 본받지(접근하지) 못하도록 하지 않고 도리어 자신들의 가증스런 성행위가 정상적인 짓인냥 자랑하듯 떠벌리어 과시하니, 이것은 물귀신처럼 한 사람이라도 더 자신들과 같은 불치병 환자가 되게 유혹하는 짓입니다.
"예루살렘이 멸망하였고 유다가 엎드러졌음은 그들의 언어와 행위가 여호와를 거스려서 그 영광의 눈을 촉범하였음이라 그들의 안색이 스스로 증거하며 그 죄를 발표하고 숨기지 아니함이 소돔과 같으니 그들의 영혼에 화가 있을찐저 그들이 재앙을 자취하였도다"(아사야 3:8~9) 하심 같이, 사람이 죄를 저지르고 부끄러워 하고 숨는 것은 그래도 하나님께 불쌍히 여김을 받을 수 있는 구원의 여지가 있지만, 지은 죄를 발표해 자랑하는 것은 더 이상 정상참작을 해 줄 수 없는 근절되어야 할 악입니다, 동성애자들이 추악한 성행위를 자랑해 발표하거나, 촛불 세력들이 광화문 광장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희롱하는 것을 자랑해 발표하는 일을 혁명으로 존중하는 것은 유황불에 타 죽을 죄악입니다.
인간 사회에서 이 같은 악을 공공연히 자랑하는 것을 보고서도 하늘의 공직자가 된 그리스도인들이나 국가의 치안을 담당하고 있는 관계 당국자들이 제3자의 입장에서 방치해 방관하게 되면, 하나님이 그들 모두를 동일한 죄악(전염병)으로 취급해 유황불로 소멸시킵니다. "볼찌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터이요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찌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요한계시록 2:22~23) 하심 같이,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이 온 세상을 이 같이 다스리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일을 대신 사랑하는 일로도 으뜸이시지만,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일을 대신 미워하는 일로도 으뜸이십니다. 그러므로 그의 심령 속에는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고 우주보다 넓은 사랑도 있지만, 반면에 세상 모두를 불로 태우실만한 가공할 미움(진노)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의 심령은 예수님과 같지 않고 아무나 무분별하게 사랑만 하려 할 뿐, 예수님이 미워하시는 일을 대신해 책망치 않습니다. 어쩌면 그렇게도 오늘날의 동성애자들과 같이 부패하였는지 하나님이 탄식하고 있습니다. 사랑(칭찬)할 줄만 알고 미워해 내칠(책망할) 줄 모르는 분별(이성) 없는 동성애자 짓에서 돌이켜 저들의 죄악을 신랄하게 집요하게 단호하게 꾸짖고 책망하십시오. 죄악을 책망해 물리치지 않고 죄악을 묵인해 용납하는 것 또한 영적인 동성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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