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사 다이제스트 100
최초의 문명, 야요이 시대
한반도로부터 온 벼농사와 금속기 문화(기원전 3세기 ~ 기원후 3세기경)
그때 세계는
기원전 334년 : 알렉산더 대왕, 동방원정(~323년)
기원전 108년 : 고조선 멸망; 한군현 설치
동모는 한반도에서 규슈 북부에 전래되어 묘지의 부장품으로 쓰였다. 나중에 대형화되어 제기로 바뀌었다.
기원전 3세기경, 벼농사를 짓고 금속제 도구를 사용하는 무리가 갑자기 규슈 북부 지역에서 나타나더니 일본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전파 속도는 무척 빨라서 1세기경에 이미 도호쿠 지방 남부까지 도달했다. 이들이 만든 토기가 최초로 발견된 장소의 이름을 따서 야요이(彌生) 문화라 하며, 이 시대를 야요이 시대라 한다. 야요이 시대는 기원전 3세기에서 기원후 3세기까지 약 600년간 지속되었다. 일본은 야요이 시대에 이르러 식량을 채취하는 단계에서 식량을 생산하는 농경 사회로 발전하게 된다.
농경에서 밭농사는 별다른 기술 없이도 적은 인원으로 가능하지만 벼농사는 그렇지 않다. 반드시 고도의 농사 기술과 집단 노동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벼농사 유적이 규슈 북부 지역에만 돌연히 나타난 것이다. 이는 조몬 문화의 내적인 발전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보기 어렵다. 벼농사 · 금속기는 외부에서 전해진 문명임을 알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 외부는 바로 한반도 남부다.
중국에서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농경을 전해 줄 수도 있었을 텐데 어째서 한반도 남부에 살던 이들이 일본으로 건너간 것일까? 왜 규슈 북부 지역에서 야요이 문화가 시작된 것일까?
이는 지리적인 유리함 때문이었다. 규슈 북부는 외부에서 일본 열도로 들어오기 손쉬운 곳이었다. 당시의 해상 교통 기술로 일본에 갈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지역이 한반도 남부였다. 한반도 남부에서 쓰시마 섬을 거쳐 규슈로 가는 길은 중국 역사서에서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 길은 야요이 시대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결정적인 문명의 통로로 이용된다.
지금도 부산에서는 맑은 날이면 일본의 쓰시마가 바라보인다. 가까울 뿐만이 아니었다. 해안에서 뗏목을 띄우면 해로를 따라 큰 풍랑 없이 저절로 닿는 곳이 쓰시마이다. 쓰시마에서 규슈 북부에 가기 전, 이키 섬이 있는데 그다지 멀지 않다. 이키섬을 거쳐 규슈 북부까지는 중간에 있는 섬들을 징검다리로 삼고 목적지를 직접 눈으로 관측하면서 항해할 수 있다. 이처럼 북부 규슈는 고도의 항해술이나 선박 조선술 없이도 쉽게 한반도 남부에서 일본 열도에 도달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중국은 구로시오(黑潮)해류가 구로남지나해에서 태평양 쪽으로 빠르게 흘러가므로, 거칠게 급류로 흐르는 구로시오해류를 건너서 일본 열도에 가기 어려웠다. 때문에 중국과 직교역 해상로를 열 수 없었다.
야요이 시대는 조몬 시대와 마찬가지로 여러 개의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지붕을 덮어 만드는 수혈식 주거에서 4~5명 정도가 생활했다.
농경을 전해 준 야요이 시대 한반도 남부 사람들은 구체적으로 누구였을까?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벼농사는 밭농사처럼 단순히 씨를 뿌리는 것이 아니라 고도의 기술과 집단 노동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소수 인원의 이동으로는 정착하기 어렵다. 반드시 고도의 기술을 습득한 집단이 이주하여 장기간 재배해야 한다. 한반도 남부에 있던 어떤 집단이 왜 일본으로 이동했을까? 자료가 부족해서 어떤 집단이 언제 어떻게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구체적으로 단정 지을 수는 없다. 많은 고고학적 자료와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야요이 시대 일본에 농경을 도입한 사람들은 한반도 남부에서 집단적으로 이주해 온 사람들이었음이 확실시된다. 한반도의 대표적 매장 풍습과 동일한 방식의 지석묘가 북규슈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으며, 그 지석묘에서 발견되는 인골의 평균 신장이 조몬 시대 일본인보다 5㎝ 정도 크고, 얼굴도 평면적이어서 한반도 남부 사람에 가깝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벼농사와 금속기 문화는 기원전 3세기에 규슈에서 시작하여 기원전 2세기경에는 긴키(近畿) 지방으로 전파되었다. 기원 원년 즈음에는 간토(關東) 지방에서 도호쿠(東北) 지방 남부로, 2~3세기에는 도호쿠 지방 북부로까지 확산되었다.
한반도에서 일본 열도로 금속기와 벼농사가 전해졌다. 한반도 → 이키섬 → 규슈 북부 → 긴키 지방.
야요이인이 한반도 남부에서 건너온 외래인이었다면 원주민인 조몬인은 어떻게 되었을까? 조몬 시대의 유적은 일본 동부와 북부에 집중적으로 분포한다. 이곳은 멧돼지나 사슴, 연어와 송어 같은 사냥감이 풍족한 곳으로, 이를 주식으로 삼는 조몬인이 모여 살았으리라 추정된다. 지금의 긴키 지방, 즉 서쪽 일본은 조몬 시대에는 그다지 사람이 많이 살지 않았다. 일본의 인류학 권위자인 고야마 슈조(小山修三)는 "조몬 시대 발전기의 일본 열도 전체 인구는 26만여 명이며, 대부분 동부에 살았고 서부에 살던 사람은 2만여 명에 불과하다"고 추정했다.
그러나 긴키 지방은 야요이 시대를 맞아 새로운 문명의 요람으로 떠오른다. 규슈 북부에서 다른 지역으로 세력을 넓히기 위해서는 세토(瀨戶)내해(內海) 나이토해의 해류를 타고 이동하는 것이 가장 안정적이다. 다른 길은 거친 조류로 인해 손쉽게 갈 수 없기 때문에 세토 내해는 안정적인 해상 교통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규슈 북부에서 세토내해를 건너 비교적 쉽게 도착할 수 있는 곳이 지금의 긴키 지방이다. 긴키 지방은 현재 오사카(大阪), 교토(京都), 고베(神戶) 등의 도시가 있는 지역으로 햇빛이 잘 들고 기후도 온화한 데다가 넓은 평야가 있다. 벼 이모작을 하기에 아주 좋은 조건이다. 규슈 북부에서 시작한 벼농사는 긴키 지방에서 꽃을 피웠다. 야요이 시대에 긴키 지방은 규슈 북부와 더불어 일본의 2대 중심지가 되었다. 이후 고대의 수도가 전부 긴키 지방에 자리 잡을 정도로 일본 역사의 중심 지역으로 성장한다.
긴키 지방의 경우 조몬인이 많지 않았으므로 두 문화 간 충돌은 그리 심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경쟁이 치열해지는 경우도 생각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목기나 석기를 사용하던 조몬인들은 금속 도구를 앞세운 야요이인에게 압도되고 흡수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큰 갈등과 대립 없이 쉽게 융합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농경 문명은 동쪽으로 전달되어 홋카이도를 제외한 일본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조몬 시대가 1,000년을 단위로 발전해 나갔다면 야요이 시대는 100년을 단위로 빠르게 발전했다. 마치 갓난아기가 엄마의 젖을 빨듯이 일본 사회는 한반도의 선진문명을 빠르게 흡수하며 문명의 단계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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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정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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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지식백과] 최초의 문명, 야요이 시대 - 한반도로부터 온 벼농사와 금속기 문화(기원전 3세기 ~ 기원후 3세기경) (일본사 다이제스트 100,
2011. 12. 30., 가람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