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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드 성주배치 배설, 우주공원을 조성 일본을 제앞해야↔☆ 2018-03-19 21:5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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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81     추천: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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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月波亭(月パジョン)(출처:명량왜곡과 진실307P 미출판자료 공개)

    靑山(清算)ああ、
    デョヒていただ
    綠水ㅣ(ノクスが)だうれしい


    無情(無情)した山水(算数)も
     
    あるかうれしいば
     
    ましてや)有情(油井)した様だニルロムスムハリオ。
    一昨日いつ突進
     
    このように
     
    ジョリ行く第

    月波亭(月パジョン)発根ダルエ
     
    ヌィスルを食べた警固
    鎭江(錦江)の輝ドゥンヌン編みが
     
    昨日ロンガせよ。

    排泄は歌、

    熊川海戦で倭船600隻を全滅させていた盲腸である。しかし、その次の閑山島海戦では、敵に惨敗をした。

    長い水中生活に全身は病気が聞いて、

    敗戦の屈辱に心もうすらぞくぞくである。周りを見回してみると、

    青い山々が屏風のように取り囲んでいる。変わらない。

    「清算ああよくあったのか?」「青いムルア君嬉しいね。」

    世界はそのように暖かくしていがないから海を駆け巡るた盲腸の胸がどうして火に燃えて真っ黒に足かせとなり、か運賃。



    晋州城で恨みを、

    加藤、小西  ソソヘンジャン、ドードーダッカドラ、九鬼嘉隆, 島津義弘 水軍を抜いて鹿児島薩摩の部隊を撃破した熊川海戦がようにね
    義明と決戦がで殺すことができたが、腕だけを要求した。?
    殺すことあったが、
    羽柴秀勝が思い出し生かし見た。


    壬辰倭乱侵略を停止し、

    朝鮮、日本の友好同盟を認識させようと
    川岸に青い柳の、友と酒一杯交わしたその時遥かある。ただし柳が、

    その葉であり、茎がディッキー精子で月光立ちこめ酒を交わしていたことが、

    まるで昨日のであるよう考慮される姉。


    戦争を終わらせ者、黒田吉高伊達政宗羽柴秀勝それら浮上させ、返し送信は、

    豊臣秀吉が長寿が負傷したままに侵略を主張することを報告侵略を停止を心を持つようにしようと常であった。
    。徳川ヒダて義昭を殺すことができる場で九死に一生の機会を与えた。

    しかし、戦争は終わらず陰謀と謀略で弾劾されて病気の治療のために帰郷する必要が常であった.




    排泄は、日本軍全滅ではなく、艦砲打撃を加えて防御しようということであった何とか日本軍意志折っ撤退させようとシンスギル戦っていたしたがって、日本の兵士たちを無害、日本軍長寿の酒宴負傷負わせた羽柴秀勝肋骨黒田吉高マー事務はい義明殺さなかった戦国時代の日本での障害者一般的になることがなかった




     


    배상룡[ ]   

    원본글 출처

    배상룡의 묘명()
    저자허목()
    이명 : 자장() : 등암()
    원전서지국조인물고 권41 사자()

    만력(, 명 신종()의 연호. 1573~1619) 말엽에 나 허목은 영남의 여러 고을을 맡아 다스리시던 선인(, 허교())을 따라다니다가 거타(, 거창()의 고호)의 객관()에서 공을 처음 알게 되었다. 공은 자신을 간수함이 엄정하고 취사()가 올바랐으며 군자()의 풍도를 말하기 좋아하여 나는 마음으로 존경하였다. 그 후에 한강() 정 선생(, 정구())이 몰(歿)하여 서로 제자의 반열에서 조상하였는데, 적조()하기 10여 년 만에 남쪽 선비를 통하여 전현()들의 유적()을 구해 보기를 청하였다. 그해에 상변(, 고변())한 일이 있어 선량한 사람들이 연루되었는데, 공도 구속되어 서울로 올라와서 ≪오선생예설()≫을 나에게 주면서 이르기를, “나는 죽어도 (이 학설을) 저버릴 수 없다.” 하였다.

    공이 방면되어 (고향으로) 돌아간 지 몇 해 뒤에 나는 영남으로 피난을 가서 어른들한테 지금까지 듣지 못했던 바를 많이 들었고 매양 공을 찾아뵙고 노덕()으로 섬겼다. 몇 해 전에 공의 상사()를 듣고 침문() 밖에서 곡()을 하였고 장례를 모실 때에는 애사()를 지어 애도하였다. 지금 그 두 아들이 3년상을 치르고 자기 선인()의 묘소에 표()를 세우려 하여 사람을 1천여 리 길에 보내서 나에게 명()을 청하였다. 나는 덕을 사모하는 정성에서 차마 사양할 수 없어 공의 선행()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난 바를 서술하여 돌에 새기게 하였다.

    공은 재주와 식견이 남들보다 훨씬 뛰어났다. 어려서부터 한강 선생()을 스승으로 섬겨 군자의 가르침을 들었고, 힘써 공부하여 여러 차례 과시()에 뽑혔으나 불행히도 선장군(, 배설())께서 비명()에 가시자 다시는 과거를 보지 않고 이름을 묻어두고 나서지 않았으며, 힘써 농사를 지어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아우 하나가 있어 어려서 홀로 되니 공이 마음속으로 더욱 안쓰럽게 여겨 쉬지 않고 가르쳤으며, 잘못이 있으면 눈물을 흘리면서 매질을 하니 학문이 날로 진취하여 이름이 남주()에 널리 알려졌는데, 바로 배상호() 계장(, 배상호의 자())이다. 태학()에 올랐으나 명운이 없어 일찍 요절하니 공이 마음이 상하여 더욱 세상사에 낙이 없어 하다가, 무흘산()의 동학()을 찾아가 늙도록 그곳에서 살면서 별호를 등암()이라 하고, 혹자가 현량()으로 천거하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으며 또 끝끝내 밀어주는 사람도 없어 그대로 몰하였다.

    공은 평생에 한없이 선()을 좋아하여 남의 허물을 보면 부끄러움이 자기에게 있는 듯이 하였다. 그 독실한 행실은 친한 이를 친하게 함으로부터 비롯하여 인애()가 소원한 곳까지 미쳤으며, 온 집안이 모두 권하고 가르쳤으므로 집안은 엄격하면서도 은애로움이 있었다. 그러나 가장 중히 여긴 바는 역시 관혼상제()에 있었다.

    공의 휘()는 상룡()이요, 자()는 자장()이며, 성은 배씨()이니, 성주인()이다. 조부는 사재감정() 휘 덕문()이요, 아버지는 경상도 수군절도사 휘 설()인데, 모두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어머니 정부인() 송씨()의 본관은 야성()이니, 충순위() 송원()의 따님이다. 공은 명()나라 만력() 2년 우리 선조() 7년 갑술(, 1574년)에 태어나 효종() 6년 을미(, 1655년)에 몰하니, 나이는 82세이다. 유인() 거창 신씨()는 사재감정 신인서()의 따님으로, 온공() 독후()하여 효성으로 시부모를 섬기고 형제 자매간에도 각기 마음을 다하였으니, 역시 부인으로서는 어질다고 일컬어졌다. 공보다 23년 전에 몰하여 합장한 묘소는 지금의 물법() 후리곡()에 있다. 2남 2녀를 두어 아들은 배세유(), 배세기()요, 두 사위는 이유전()과 김시수()이니 모두 사인()이다. 공은 이미 몰하였으나, 그 유풍()과 여교()는 자손에게서 또한 볼 수가 있다. 다음과 같이 명()을 쓴다.

    아! 보배를 안고서 숨어서 사니 알아주지 않아도 후회치 않았으며, 확고하고 화충()스러웠으니 순실히 처세하여 자랑함이 없었는데, 고을 사람 감복하고 존경하여 아직도 노덕() 살아 있다 여기네.     (출처:국조 인물고 배상룡)     

          

    국조인물고 배상룡

    [네이버 지식백과]배상룡 [裵尙龍] (국역 국조인물고, 1999. 12.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배씨 종문이 보관하고 있는 세루 장군이 하시바 히데카츠(표주막 문양의 황금부채)를 빼앗고 갈비뼈 하나를 획득 하고,

    구로다 요시타카의 (下刀) 동생 구로다 분신을 척살하고 획득한 구로다 가문의 칼 두점, 


    <고려선전기 高麗船戰記>는 왜함대에 종군한 69세의 도노오카(外岡甚左衛門)가  부산포에서 작성한 전황기록문서이다. 임진왜란을 일으키게 된 자국 내의 사정과 부산포 침공 이후 왜의 수군이 겪은 연패의 참상을 기록한 것으로 “어리석은 노인의 붓끝이 후일의 비웃음을 무릅쓰고 써놓고자 하는 것이다.”라고 맺고 있다.


    여기에는 한산대첩에 이어 7월 10일에 있었던 안골포해전(安骨浦海戰)의 실전상황이 목격한 대로 충실하게 기술되어 있다.

    “구키(九鬼嘉隆)와 가토(加藤嘉明)는 와키자카(脇坂安治)가 전공을 세운 것을 듣고, 같이 6일에 부산포로부터 나와 바로 해협 입구에 이르러, 8일에는 안골포의 오도(烏島)라는 항(港)에 들어갔다. 그리하였더니 9일(朝鮮曆 10일)의 진시(辰時:오전 8시경)부터 적의 대선 58척과 소선 50척 가량이 공격해 왔다.


    대선 중의 3척은 맹선(장님배: 盲船, 거북선)이며, 철(鐵)로 요해(要害)하여 석화시(石火矢), 봉화시(棒火矢), 오가리마따(大狩鉢) 등을 쏘면서 유시(酉時,오후 6시경)까지 번갈아 달려들어 쏘아대어 다락에서 복도, 테두리 밑의 방패에 이르기까지 모두 격파되고 말았다. 석화시라고 하는 것은 길이가 5척 6촌(약 117.6cm)의 견목(堅木)이며, … 또 봉화시의 끝은 철로 둥글게 든든히 붙인 것이다.

    이와 같은 큰 화살(大箭)로 다섯칸(1칸은 약 1.25m), 또는 세칸 이내까지 다가와 쏘아대는 것이다.…” (鍋鳥家에 소장된 筆寫原本에서).

     

     

     

     

    김완의 해소실기에는 배설 장군과 김완장군이 마지막까지 적들의 등선육박전에 맞서 사투를 벌이는 기록이 생생하고, 칠천량 해전에서 적에 기습공격을 당한 배설 장군이 일본 요시아키 장군과 직접 배위에서 배세루를 잡으려는 요시아키 장군과 결투가 벌어졌다.

     

    일본군에 목표는 이순신이나 원균이 아니라 "배세루부대" 였다는 사실과 요시아키가 포위망에 갖힌 배설의 지휘선에 몸소 올라 칼을 휘두러다 배설장군의 칼에 오른쪽 팔이 베이고 칼을 놓친 상태에서 일본 장군에 체면도 버리고 바다로 뛰어 내려 구사일생으로 살아돌아 갔다는 요시아키 장군기

     

    일본군이 주도권을 잡고 김완 장군을 포로로 잡은 요시아키 군대가 부대장군이 퇴각하는 함선위에 올라 공을 세우려다 팔을 잃어버린 칠천량 해전의 치열함이 생생하다.



    난중일기 을미년 스무날(계사)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식후에 우수사에게로 가다가 길에서 배수사(설)을 만나 배 위에서 잠깐 이야기했다. 밀포 둔전 만든 곳을 살펴볼 일로 간다고 했다. 그길로 우수사에게로 가서 몹시 취하고 저물녘에 돌아왔다."

    해석, 충무공은 전라우수사를 만나서 술을 취했는데 경상우수사 배설장군은 배를 타고 밀포 둔전 만드는 곳으로 가고 있는 모습이 난중일기에서도 배설장군의 식량을 만들어 백성을 구휼하려는 성실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또 "소설가 김경진의 의견에 따르면 그가 경상우수사로 부임하던 시절 판옥선이 25척까지 증가하였고 경상우수군의 굶주림도 어느정도 해결시켰다고 말한다. 이중 판옥선이 25척까지 증가했다는 부분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일본인들 눈에는 배세루 조선 수군의 배가 한번 물리면 죽는 지네를 닮은 것으로 극한 공포로 그리고 있다. 분명히 창제귀선과는 모양이 확실하게 다르지만, 김억추 장군이 말하는 장작 귀선의 모습 그대로 장작을 덧대인 대형 함선모양 이다.


    排泄歌うかつて熊川海戦で倭船600全滅させていた盲腸である調整奸臣スパイ内筒朝鮮軍買わ運転してチルチョン海戦では、敵に惨敗喫した長い水中生活全身病気が聞いて、敗戦屈辱心もうすらぞくぞくである

    배세루 우주선의 모습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6∼1598)의 일대기를 그린 18세기 일본의 장편소설 & #39;에혼다이코기(繪本太閤記)& #39; 6편 권 6에는 알 듯 모를 듯한 그림이 실려 있다. 거대한 배와 뗏목 수준에 불과한 작은 배가 싸우는 장면. 책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다루고 있다. 임진왜란. (그림 글 출처:문화일보 김시덕) 



    조선군은 일본군과 전면전이 한 번도없었다는 점에서 토요토미의 강적은 일본이 말하는 세루,  "배세루"라는 우주선을 만들어 나타는 외계인이 누구일까?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6∼1598)의 일대기를 그린 18세기 일본의 장편소설 ‘에혼다이코기(繪本太閤記)’ 6편 권 6에는 그림이 실려 있다. 거대한 배와 뗏목 수준에 불과한 작은 배(일본)가 싸우는 장면. 책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다루고 있다, 임진왜란. 에도(江戶)시대 일본인들이 듣고 또 읽고 상상한 조선수군의 ‘난공불락’ 배는 거북이보다 지네에 가까웠던 모양, 조선군의 거함의 위압감이 묘한 통쾌함을 준다.)



    *명량, 노량해전 배즙 이순신 손문욱의 역할과 공적분석

    배즙(裵 楫)명종 19년 탄생(1564~1599.7.16)

    꽃다운 35세로 노량해전에서 경상우수사 조방장으로 장렬히 전사했다.(배설장군의 동생) 

    경상 우도병력 전함 12척을 칠천량해전에서 구해내어 명량 해전을 실제 지휘한 후 성공 시켰으며,

    노량해전에서 장렬히 전사했다.   

     

     

    배 즙(裵 楫)  자는 통중(通衆), 호는 명암(明庵)으로 배덕문의 3남이다.

    공은 기국이 넓고 뛰어났으며 용력이 출중하였다. 일찍이 가풍을 몸에 익혔으며 학문에 전념하여 경서와 사기에 통달 하였다.

    1590년(선조23) 무과 별시에 급제하여 훈련원 습독에 올랐는데 조정에서 말하기를 "지방 고을에서 이와 같이 빼어난 인걸이 배출되리라고는 미쳐 생각지도 못했다".라고 했으며 다시 사직(司直)에 제수 되었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부친 배덕문이 의병을 일으켜 왜장 黑甸句의 목을 벨 때에 공도 참여하였고, 개산진의 싸움에서도 크게 전공을 세우고 돌아오자 행재소(임금이 임시로 거쳐하는 곳)로 부터 선무사(宣撫使)에 제수되었다.


    1597년(선조30) 정유재란 때는 조방장으로써 백씨 설(경상우도 수군절도사)과 함께 한산도에서 대승하고 노량에 이르러 갑자기 불어난 적에게 포위되었다. 이 때 공은 비분강개하여 호령하기를 "바다의 기운을 맑게 할 수만 있다면,이 한목숨 미련없이 바치리라".하고 적진을 종횡무진 유린타가 유탄을 맞아 순절 하였으니 향년 35세였다.


    ㄱ, 명량 노량해전 기여도


    1,명량, 노량해전의 1등 공신 이순신 장군,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이 조정에 전해지자 선조는 이순신 장군을 우의정에 추증, 1604년 선무공武功臣) 1등에 녹훈되고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 좌의정에 추증, 1793년(정조 17) 다시 영의정이 더해졌다.


    2, 명량, 노량해전의 2등 공신 배즙 장군,


    1610년(광해2) 선무원종 2등공신에 녹훈되고 가선대부 병조참판에 증직되었으며 의금부와 훈련원의 지사에 추증되었다. 이같은 공의 사실이 경산지와 영지에 등재되어 있으며 경북 성주군 대가면 도남1리 후포(뒷개) 숭조대에 배즙 장군의 갑옷을 묻고 유허비를 세웠다.(묘소는 경북 고령군 노2리 명곡 서우재에 있다.)


    3, 노량 해전의 2등 공신 손문욱 장군,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자 노량해전을 대신 지휘 2등공신 절충장군에 승품되었다. 절충장군 손문욱은 권율의 궁중에서 인목대비를 축출하는 조정의 혼란을 부채질하여 세력을 누렸으나, 얼마되지 않아서 배설과 금란지교를 맺은 한준겸이 인조반정을 읽으켜 손문욱과 간신들은 비참하게 죽고 말았었다.



    손묵욱은 일본에 자진해서 대마도주의 가신 야나가와 시게노부를 통해 대마도주의 장인인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장으로 부역하였으며,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이며 고니시 소서행장의 부장이다. 원균과 배설은 손문욱과 요시라의 부하들과 수군을 사정없이 죽였기에 악연을 가지고 있었다.




    ㄴ,한민족의 영웅 이순신 장군님의 난중일기를

    가슴은 뜨겁게 머리는 차갑고 냉정하게 평가하겠습니다. 



    "정유년 난중일기 8월19일자에 이순신은 배설장군의 숙배거부를 적고 있는데 일반인들은 이를 비평합니다.

    그러나 저는 다르게 봅니다
    이날 이순신이 숙배를 요구한 교유서는 8월3일에 받은 통제사임명장입니다

    그렇지만 이순신은 8월15일에
    수군을 폐하라는 교유서를 받았습니다   그러면 앞의 교유서는 무효가 된 것이지요

    여기에 숙배하면 이순신과 함께 항명을 하는 형국이 되지요

    그래서 다음부터 이순신과 갈등이 시작됩니다

    항명하는 이순신과 명을 따르는 배설장군 과 말입니다

    선조실록 승정원일기 난중일기 등 모두 20여 종류라 작업 기간도 좀 걸릴 것입니다(배윤호)"


    네, 명공은 육전에 합류하라는 어명을 배설에게 떠 맡겨 육지로 보내고 배에 집착하는 이순신 장군에 모습도 난중일기에 보여주고 있습니다,

    베설 장군 입장에서 집요하게 배와 부대를 넘겨 받길 희망하는 이순신 장군의 의견에 다라도 경상 우도 수군의 조방장인 배즙 장군이 수군을 실질 지휘하고 있으니 배설이 흔쾌히 요양차 육지로 올랐을 가능성은 매우 높습니다.





    요즘 조그만한 티코 승용차도 운전면허증 있어야 운전합니다.

    더욱이 종북아시아에서 가장 크다란 전함이 그냥 운영되겠습니까?

    이러한 큰 배는 기라졸과 포수 기타 전함을 룬용하는 병력이 하루 아침에 만들어 져서 전투를 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임진왜란 당시의 군사들은 지금과 달리 주장이 다로 있어 다른 장군의 지휘를 받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이순신 장군은 1597년 8월 19일 숙배식을 거행하고 배설 장군이 9월 2일 육지로 하선한 이후 2주후에 명량 대첩이나 노량해전 까지 배즙 장군이 군대를 운용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육지에서 응원한 민초들이나 갑판위에서 백병전을 한 병사들이 보충되어 이순신 장군의 휘하에 있었다는 추정이 가능한 부분이 있습니다.




    배즙 장군이 배설 장군을 따라 전투에 임하게 된 것은 충주 탄금대 전투와 상주전투 조경의 추풍령전투에서 조선군이 대패하고 전멸 당한 현장에서 배설은 살아 남아 김천의 향병을 모아서 수십명의 잔병들과 항거하고 있었다.


    배설이 일본군과 조선군의 무기와 전투 전술의 무지에서 대패함을 아버지인 배덕문에게 알리고, 14세에 과거에 장원한 아들 등암 자장을 곽재우 장군에게 보내 의병을 거병할 것을 요구하 과정에 배건 부부가 먼저 배설의 요구로 긴 죽창을 수백개 준비해서 배설부대에 전해주려다가 일본군에 포위되어 부부와 200여 명의 성주 의병들이 전멸하자, 배즙 장군이 죽창과 와룡매와 버들 나무로 도깨비 방패를 만들어 배설과 함께 전장을 누비게 된 것이다. 



    일본군은 아시가루 장창으로 상주 탄금대 추풍령 전투 에서 약 20만 대군의 목을 댕강댕강 잘라 충주 탄금대를 끼고 강물이 흐르지 못할 정도로 고니시가 9만명의 수급을 잘랐던 잘 나가던  일본군들이었다.



    그런 일본군이 배설과 배즙 장군의 죽창부대에  크게 당황해 했었다. 체구가 외소한 일본군들에 비해 조선군은 늙은 큰호박 하나정도의 더 큰 키와 잘 발달된 체격을 이용 10자(3m) 크기의 죽장을 말 위에서 배즙 장군과 그 부하들이 내려 꽃는 공격력은 가히 모든 일본군의 두려움의 대상이었었다.



    일본 전국시대를 통일한 쟁쟁한 무사 24기사가 배즙 장군의  부상진 전투에서 전멸하고 그 수장인 하시바 히데카츠의 갈비뼈 하나를 배설 장군이 취할 수 있었든 것도 바로 무기와 전투전술의 우위 때문에 가능했었다. 하시바 히데카츠가 토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받은 조선정벌 승인 표주박문양의 황금부채 마저 빼앗기고 겨우 목슴이 붙어 도망쳤으나 끝내 칠천량에서 죽어 시체가 되어 돌아가게 할 수 있었든 것도 배즙 장군의 뛰어난 무공이 배설 장군을 바쳐주었었다.





    5, 배설 장군의 묘소 바위에 각자로 기록된 봉토는 “周回 二十 里”이다.

    장군의 묘소를 기준으로 지름 16Km, 이것을 면적으로 계산하면 200제곱킬로미터로 성주 전체면적의 약 3분의 1에 해당되고, 약 6.000만 평의 땅을 하사받은 것이다. 이는 조선 왕조 역대 어느 왕족도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묘지도 배설의 장산에 규모에 못미칠뿐 아니라 임진왜란 참전 모즌 장수에게 내려진 봉토 전체보다도 더 큰 규모의 장지로 선조의 스승 퇴계  이황선생에게 내련진 사원의 규모보다도 약 만배가 넘는 규모이다.


     

    실제로 이정도 거리 안쪽으로 배설장군의 후손이며

    지금 살고있는 후손들의 선대 묘소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고 이렇게 묘소가 있는 산들은 모두 배씨의 종산으로 되어 있다.

    이것을 면적으로 계산하면 200제곱킬로미터가 조금 넘는 면적이다.

    이러한 면적은 지금의 성주군 전체면적의 약 3분의 1에 해당되는 넓이이다.

     

    지금 배설장군의 묘소는 경북 성주군 금수면 명천리에 있다.

    그 부친의 묘는 경북 성주군 대가면 옥화리에 있다.

    그 큰 아들의 묘는 경북 성주군 대가면 도남리에 있다.

    그 둘째아들 상호의 묘는 성주군 벽진면 외기리에 있다.

    막내아들 상보의 묘는 성주군 가천면 중산리에 있다.

    이 분들의 후손들의 산소도 주변 금수면, 벽진면, 대가면, 가천면, 성주읍등지 곳곳에 흩어져 있으며

    이 산들은 모두 배씨의 종산으로 되어 있으며 일부는 대종중에서 관리하고 일부는 소종중에서 관리하고

    일부는 12촌이내의 대소가에서 관리하고 있다.

     

     

     "수군의 선임 장수인 배설장군에게 작전계획을 물었습니다.

    배설장군은 나라의 명을 쫒아 수군을 육군으로 편입하여 전쟁을 수행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순신장군은 "불청하여 배설장군은 육군으로" 갔습니다. 


    통제사가 된 이순신장군이 과거 자신의 휘하 장수가 아닌 배설장군을 자신에게 내려진 '명공육전 명령'(육지 잔병을 규합하라는 명령)을 배설 장군에게 대신하게 하고 자신은 전함을 동생 배즙장군과 수군을 지휘하게 됨을  '재조번방지'라는 고서에서 '배설을 속이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배윤호)"

     

     

     

    주회 20리, 역모로 몰린 배설 장군에게 내려진 장지의 규모는 임진왜란 참전 모든 장수들이 받은 땅보다 많고  

    임진왜란을 패배하게 원인을 제공한 장수에 대한 포상치고는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그것도 역모로 참수 되고 6년 만에 선조 대왕 스스로 복권 시킨 후 내린 것이다.


    의병장 김덕령이 참수 후 70년 만에 겨우 억울한 점이 서류상 신원된 것과는 비교되어 억울함을 입증하고 있다. 

    (난중일기♡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를 중심으로 배즙 장군의 활동을 살펴보고자 한다. 

     


     

     8월17일

    장흥땅 백사정에 이르러 점심을 먹은 뒤 군영구미(장흥군 안양면 해창리)에 이르니 일대가 모두 무인지경이 되었다.

    수사 배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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