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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05년 12월 16일 오후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사학법 강행처리 무효 대규모 장외집회에서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와 이명박 서울시장 등이 사학법 반대구호를 외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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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김상곤 전 경기교육감을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장관으로 지명했을 때 보수야당인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은 국회보이콧을 선언했다. 김상곤 장관이 논문 표절 의혹에 휩싸였고, 이념적으로 사회주의적 편향이므로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김상곤 장관의 논문 표절 여부를 심사하는 당사자인 서울대 연구진실성위원회는 인용부호 누락 등은 20년도 더 된 당시의 관행이었으므로 표절이 아니라는 공식 입장을 내놨다. 또, 국가보안법 폐지나 주한미군 철수 등의 주장 역시 학자로서, 시민으로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으로 이를 이유로 불이익을 주는 것 자체가 구시대적 적폐이며, 우리 헌법이 규정한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위헌이라는 비난을 피하기 힘들다.
결국 김상곤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보수야당의 반대속에서 우여곡절 끝에 5일 공식 취임했다.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은 김상곤 장관 취임에 반발해 이날 추가경정예산안 심사에 불참했다.
2005년 사학법 빌미 한나라당의 몽니, 모든 걸 바꾸었다 |
▲ 지난 2005년 12월 13일 당시 한나라당은 사학법 개정안 처리에 반발하며 장외투쟁에 나서 서울 명동등지에서 집회를 가졌다. 장외투쟁에 나선 박근혜 대표등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맨 오른쪽은 전여옥 당시 한나라당 의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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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05년 12월 23일 오전 국회 의장실에서 농성중이던 당시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와 강재섭 원내대표 등 한나라당 의원들이 해산하기에 앞서 사학법 무효와 김원기 의장 퇴진을 요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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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어느 정부에서나 출범 후 첫 추경안과 정부조직법 개정 문제는 대체로 야당들이 협조해서 통과시켜주는 게 정치적 관례였다. 선거 기간 동안에는 모든 대선 후보와 정당이 협치를 말했지만 새 정부 출범 후 사실상의 협치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소수 야당이 새로 출범한 다수 정권의 발목을 잡으며 몽니를 부리는 모습은 이전에도 있었다. 소수 보수야당이 다수 여당의 새정부에 대해서 몽니를 부렸던 대표적인 사건이 지난 2005년 12월 사립학교법 개정 이후 2006년까지 이어졌던 한나라당의 국회 보이콧이 아닐까 한다.
노무현 정부 시절이던 2005년 12월 9일. 국회에서는 사립학교법 개정안을 통과시키려는 열린우리당(당시 여당)과 이를 막으려는 한나라당(당시 야당) 사이에 몸싸움이 벌어졌다. 결국 김원기 국회의장의 직권상정으로 사립학교법 개정안이 통과됐다. 국회에 제출된 지 적게는 1년 6개월, 길게는 6년을 끌어온 사학법 개정안의 통과에 여당과 교육계는 대체로 환호했다.
그러나 열린우리당과 노무현 정부의 환호도 잠시, 박근혜 당시 대표를 선두로 한나라당이 국회를 전면 보이콧 하고 나섰다. 본회의뿐 아니라 예결위를 포함한 모든 상임위원회를 거부하고 거리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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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05년 12월 13일 거리장외집회에 앞서 열린 한나라당 의원총회에서 당시 박근혜 대표와 최연희 사무총장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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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대의 박근혜, 홍신학원의 나경원, 현대학원의 정몽준 등 한나라당의 여러 의원들이 사학의 직간접 당사자였다는 점에서 예견된 일이었다. 한나라당과 뜻을 같이 하는 사학재단들은 신입생 모집 거부와 학교 폐쇄를 언급하고 나섰다. 특히, 보수적인 개신교사학들이 앞장 섰다.
사립학교법 개정은 위헌이라며, 전교조가 학교를 장악하려는 음모라며, 학생들을 사회주의 전사로 만드는 법안이라며 색깔론을 꺼내들었다. 한나라당의 정치인들은 거리에서, 교회에서 국민들을 거짓선동했고, 교회마다 사학법 개정을 반대하는 현수막이 걸리고, 전단이 뿌려졌다.
어느 정도의 반발을 예상했던 열린우리당은 '사학법 일점일획도 고칠 수 없다'며 초기에는 강하게 맞섰다. 그러나, 국회 올스톱이 장기화되자 예산안 처리에 비상이 걸린 열린우리당과 노무현 정권은 예상보다 훨씬 거센 반발에 당황하기 시작했고 결국 한나라당에 손을 내밀었다.
이른바 '산상합의'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
▲ 지난 2006년 1월 30일 오전 당시 김한길 열린우리당 원내대표와 이재오 한나라당 원내대표가 북한산 대동문에 올라 '산상합의문'을 발표한 후 악수를 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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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를 넘긴 2006년 1월 30일, 당시 열린우리당 원내대표였던 김한길 의원과 한나라당 원내대표였던 이재오 의원이 북한산에서 만나 '사학법 재개정 합의'에 이른다. 이른 바, '산상합의'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전략적 후퇴(?)를 택했다고 변명했지만 사실상 항복 선언이었다.
후폭풍은 엄청났다. 이후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국민 대다수의 지지를 받던 사학법 개정을 반대하여 '부패사학 옹호당, 비리사학 몸통당'이라는 비난을 받던 한나라당은 정당성(?)을 확보했다. 여당이, 노무현 정부가 크게 잘못한 것이 있기 때문에 양보한 것 아니냐는 한나라당의 선전선동이 그대로 먹혀들었다. 산상합의는 이런 마타도어의 훌륭한 선전도구가 됐다.
이렇게 해서 어렵게 개정된 사립학교법은 제대로 시행도 해보지 못하고 그해 7월 재개정되는 운명을 맞았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사학법의 후퇴에서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학법과 함께 개혁입법으로 불리던 국가보안법 폐지는커녕 개정 이야기도 못 꺼내게 되었고, 노무현 정부의 개혁 시도는 사사건건 한나라당이라는 암초에 부딪혀 좌절했다.
그 와중에 노무현 대통령이 얼마나 답답했으면 2005년 7월엔 한나라당과의 대연정 제안까지 꺼냈만 한나라당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비웃었다. 설상가상으로 농민과 노동 열사들이 생겨나는 국면에까지 이르러 개혁세력과도 등지는 상황이 겹쳤다.
개혁세력은 흩어졌고 한나라당을 중심으로 하는 보수정치 세력은 사학법인들에 보수적 종교계, 그리고 보수적 시민사회단체들까지 똘똘 뭉쳤다. 이후 열린우리당은 국회의원 보궐선거와 지방선거 등에서 판판이 깨졌고 국회 과반이 무너졌다.
결국 임종인 의원을 필두로 열린우리당 국회의원들의 탈당이 이어졌고 대선을 앞두고 열린우리당은 그해 대선을 앞두고 대통합민주신당에 통합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리고 2007년 대선에서 정동영 후보는 당시 사상 최대 표차로 보수당의 이명박 후보에게 패하는 망신을 당했다. 그리고 이명박 정권은 박근혜 정권으로 이어져 10년 보수정권의 전성기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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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05년 12월 16일 오후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사학법 강행처리 무효 대규모 장외집회에서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과 강재섭 한나라당 원내대표가 나란히 서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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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천만 촛불의 힘으로 박근혜 정권이 탄핵되고 다시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기까지 10년의 적폐는 이렇게 시작됐다. 보수 정권 탄생에 여러 계기가 있었겠지만 가장 결정적인 시발점은 사학법 후퇴로 대변되는 '산상합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학법 재개정을 주장하면서 한나라당이 국회를 보이콧하고 몽니를 부릴 때 열린우리당과 노무현 정부가 굴복하면서 스탠스가 완전히 꼬이기 시작했다. 사학법의 후퇴는 말할 것도 없고 이상의 개혁 법안 처리는 불가능해졌다. 시민사회와도 멀어졌고 노동계와도 척을 지게 되었고 이후의 모든 선거에서 패배했다.
반면 한나라당을 중심으로 한 보수세력은 정치, 경제, 종교, 시민사회, 보수언론 할 것 없이 똘똘 뭉쳤다. 그 중심에 박근혜가 있었고, 이것은 박근혜가 이후 대통령으로까지 당선되는 데 결정적인 힘이 됐다.
협치 빌미로 '산상합의' 굴복이 반복되면 또 망한다물론 열린우리당의 해산과 노무현 정부의 정권 상실 원인을 사립학교법 후퇴 하나로 단순화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박근혜가 보수 정치권의 아이콘으로 우뚝 서게 된 계기가 이 사건이었으며, 개혁 세력은 실망해 분열하고 보수 세력은 똘똘 뭉치게 한 가장 중요한 계기 역시 이것이었음은 부정하기 힘들다.
한국 사회가 여전히 색깔론이 위력을 떨치는 전근대적 사회였음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기도 했다. 사실 한나라당과 보수세력들이 사학법을 반대하면서 내걸었던 색깔론은 전혀 근거도 없는 마타도어였지만 당시에는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사학법에 대해서 색깔론을 제기하면서 제기된 사학법 위헌 소송은 무려 6년이 지난 2013년 12월 기각됐다. 대부분 이명박근혜 정권에서 임명된 재판관들로 이루어진 헌법재판소에서도 사학법에 대해서 제기된 위헌 소송에서 단 한 조항도 위헌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즉, 개정된 사학법의 모든 조항이 헌법에 합치된다며 합헌 판결을 한 것이다.
그러나, 사학법이 위헌이라며 거리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전교조와 열린우리당, 노무현 대통령을 비난하던 박근혜와 한나라당을 비롯한 보수정치권과 보수종교계, 그리고 이들의 말을 받아쓰기하듯 보도했던 보수 언론은 그 어떤 사과도 하지 않았고, 그 흔한 변명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학법 후퇴에서 시작된 정권의 상실, 그리고 탄생한 보수정권 10년은 되돌릴 수 없는 역사가 되어 버렸다. 역사를 되돌릴 수는 없지만 교훈은 얻어야 한다. 국민의 지지를 가장한(=국민의 지지도 없는데) 보수 정당의 협박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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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4일 오후 청와대 본관에서 김상곤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과 김은경 환경부 장관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뒤 차담회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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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교롭게도 이번 자유한국당의 국회 보이콧의 원인이 된 김상곤 장관은 당시 사립학교법 개정 국면에서도 중심에 있었다. 바로 부패사학척결과사립학교법개정국민운동본부의 공동대표가 김상곤 장관이었다. 누구보다 이 과정을 잘 알고 있다. 그러니 그 교훈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다시는 이런 실패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노무현 대통령이 말한 대연정은 지금의 협치보다 훨씬 더 큰 실험이었다. 그러나 보수 세력은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만 했지 결코 손잡고 정권의 성공을 도와줄 뜻이 없었다. 협치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협치를 빌미로 굴복을, 야합을 미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2006년 노무현 정권과 열린우리당이 한나라당의 말도 안 되는 사학법 몽니에 굴복해서 시작한 '선의의 양보(사실상의 후퇴와 굴복)'가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2017년 문재인 정부는 돌아봐야 한다. 2006년의 노무현 정부는 2017년 문재인 정부의 반면교사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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