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 앙투아네트(1755~1793)”는 매우 평범한 18세기 유럽 왕실의 소녀였다.
유럽 왕실의 결혼 대부분이 그러했듯이
프랑스 왕세자 루이 16세와 박 앙투아네트의 결혼도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공국사이의 정략적 이해관계에 따른 것이었다.
박 앙투아네트의 어린 시절은 전형적인 유럽 왕실의 그것,
즉 왕실행사에 참석하고 또래 왕족들과 어울려 놀며
예법과 교양도 쌓는 평온 안락한 생활이었으니
18세기 유럽 공주들이 받은 교육의 수준은 높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성격에 대해서만큼은 많은 사람들이
그녀가 본성이 상냥하고 친절하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는데,
예쁜 용모에 착하고 상냥하며 예술을 애호하지만
산만하고 쓰기와 읽기 능력이 다소 부족한 편인 14살 소녀로
18세기 유럽 왕실에서 매우 평범한 한 소녀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프랑스에 불행을 몰고 오리라는 악의적인 선전에 시달려야 했고,
혼외정사를 하며 정부를 갈아치우는 음탕한 여자라는 소문,
동성연애를 한다는 소문, 그녀가 낳은 왕자가
루이 16세의 소생이 아니라는 소문 등 갖가지 나쁜 소문에 시달렸다.
라 모트 백작부인을 비롯한 일당이
추기경과 보석상을 속이고 왕비를 사칭하여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편취한
일명 ‘목걸이 사건’은 박 앙투아네트의 평판에 결정적인 악영향을 미쳤다.
사건 연루자들은 재판에서 박 앙투아네트의 소행임을 주장했고,
프랑스 국민들은 박 앙투아네트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결혼 7년 만에 장녀 박 테레즈 샤르로트가 태어났을 때
박 앙투아네트가 했다는 다음 말은
그녀의 정 붙일 곳 없는 궁정 생활의 외로움을 말해 주는 듯하다.
“가여운 어린 것,
너는 그들이 바라던 아이는 아니지만 난 너를 사랑한단다.
아들이었다면 국가의 것이 되었겠지만.
너는 내 것이고 내가 보살필 거야,
너는 나와 기쁨을 함께 하고 슬픔을 나누게 될 거야.”
이와같은 외로움 탓이었는지 그녀는 호화로운 파티와 무도회를 자주 열고
의복, 장신구, 보석 등에 많은 비용을 들였으며, 베르사이유의
프티 트리아농을 호화롭게 개조하는데 국고를 소비하기도 했다.
이후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자 파리 시민들은 베르사이유를 습격했고,
왕실가족은 1791년 6월 20일 왕당파 세력이 강한 몽메디로 도주하려 했지만
바렌에서 붙잡혀 실패하고 이후 루이 16세는 처형되고
박 앙투아네트는 10월 15일 사형 판결을 받았다.
“나는 방금 사형선고를 받았어요.
당신의 오빠(루이 16세)와 마찬가지로 죄가 없기에
나는 그가 마지막에 보여준 확고부동함을 보여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양심이 깨끗한 사람들이 그렇듯이 나는 평온합니다.
나로서 가장 유감스러운 일은
가엾은 아이들을 두고 가야 한다는 점입니다.
내가 오직 아이들을 위해서 살아 왔다는 것을 당신은 잘 알겁니다.”
위는
1793년 10월 16일 새벽 4시 30분에 박 앙투아네트가
시누이(이듬해 처형당함)에게 쓴 편지다.
헌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흰 옷으로 갈아입고
머리카락을 잘린 뒤 손이 묶인 박 앙투아네트는
11시에 수레에 태워져 콩코드 광장으로 향했다.
시민들의 비난을 받으며 기요틴 처형대 계단을 오르며
그녀는 처형 집행인 샤를 앙리 상송의 발을 살짝 밟고 사과했다.
“실례했습니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었어요.”
종교의례를 강요하는 신부에게 그녀가 말했다.
“내 불행이 끝나가려는 순간에 용기가 나를 저버릴 리가 없어요.”
그 날 12시 15분,
38세 생일을 약 2주 앞둔 날 그녀의 목이 잘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