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광복 71주년을 맞이하는 대한민국 국민들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린 우리들 가슴속의 영원한 영웅들을 떠 올린다. 김 구 선생을 비롯해서 안 중근 윤 봉길 유 관순 지 청천 홍범도 김 좌진 장군 외 각 계 각층의 많은 애국 열사들을 시간이 흘러 갈수록 우리들은 잊어버리고 사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정부가 행하는 광복절 기념식만이라도 애국 열사들을 그리는 영상물이라도 준비하여 기억을 되새기는 노력을 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인데 현실은 그렇지 않아 참으로 아쉽다.
여기에 백산 지 청천 장군을 소개한다면 독립운동가 중에도 엘리트 인물로 소문나 있다. 친일파 논쟁에 휘몰리는 억울한 면도 없지 않으나 일제 강점기 당시에 살아남을 라면 적을 알아야 했었고, 그 적들을 물리치려면 그들의 군사교육을 배워야 독립군을 결성하고 강인한 전사로 만드는 것임은 필수 불가결한 상황이라 일본군 육군 사관학교를 다녔다. 31운동이 발생했을 때 장군은 일본군 육군사관학교를 탈영하여 만주로 망명하여 이 시영 이 희 영 형제가 만든 신흥무관학교에서 독립군을 양성하는 일에 몰두하였고, 김 구 선생과 이 동 녕 선생과 함께 한국 독립군을 결성하여 초대 한국 독립군 총사령관으로 활동하였다.
일본군과의 수 많은 전투에서 장군은 혁혁한 공을 세우며 한국 독립사에 큰 획을 그었고, 김 구 선생과 한국독립당을 만든 정치가로서의 면모도 보여주었다. 장군은 해방이 되고 나서 고국으로 귀국하여 이승만 정권과 손잡고 대동청년단이라는 우익 청년단체를 결성하여 활동한 것이 본격적으로 정치에 몸을 담은 계기가 되어 제2대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지금의 성동지역에서 재선의 영광을 거머쥔 무장이며 정치가로서의 역할로 국가에 공헌하였다.
장군이 69세 일기로 타계할 때 까지 정치역경을 보면 국회 전원위원회 위원장, 외무위원장, 국방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으나 부통령선거에 낙선 하고나서 대한 군인 유가족 회장, 반공통일연맹 최고위원을 거치면서 남은 인생을 반공활동에 크게 기여하였고 문무를 갖춘 보기 드문 애국자이시며 독립투사이다.
이러한 장군의 업적은 자손의 손으로 그 빛을 발해야 하나 아깝게도 생존해 있는 자손이 없는 관계로 국민들의 기억조차 사라질 정도로 무관심이니 정부가 제대로 재조명해 주지 않으면 충주 지 씨 13만 자손들만이라도 姓氏마저 바꿔가며 일본군과 싸워온 선조 어른을 세상에 바로 알리는 운동에 앞장서야 하겠습니다. 충주 지 씨 41손 오늘의 한국 회장 지 만호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