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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안의 다이어리 새해의 가장 즐거운 고민은 마음에 드는 다이어리를 고르는 일이다.
이제는 알차게 살아봐야지, 하고 결심하면서 하루 한 페이지를 쓰는 노트 사이즈를 구매했다가 일주일이 못 가 포기한 경험이 있다. 올해엔 다양한
디자인과 용도를 뽐내는 무수한 다이어리의 경쟁을 물리치고, 매년 구매하던 회사에 나온 것 중에 제일 작고 얇은 것을 샀다. 무엇이든 가볍고
포터블하며 자유로운 느낌을 준다면, 그것으로 족하다(개인적으로 사물의 무게는 구매 결정의
최우선순위다.).
아무리 좋고 훌륭해도 내게 맞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화려하거나 고급스러울 필요도 없다. 일상을
잘 챙기는 목적에 충실하면서 휴대에 부담 없을 정도로 가볍고, 볼 때마다 기분 좋은 디자인이면 된다. 각자의 사이즈와 역량에 맞는 선택이 어찌
다이어리뿐이랴. 의욕이나 희망조차 자신에게 최적화된 것만이 참다운 행복과 연결된다는 것을 알게 된 나이를 맞은 것이다.
삶에는 보람이라는 것이 있어야 한다 살면서 제일 중요한 건 성공이나 출세, 건물주가
되는 게 아니라 일상의 행복이라는 담론이 번져가고 있다. 고연봉이 아니라 휴식이 있는 삶을 선택하려는 이도 는다고 한다(그런데 한국 사회에서 이는 모순 형용처럼 여겨진다. 연봉이나 지위가 높아야 휴식도 가질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혹이 좀처럼 줄지 않기에.). 그러나 무엇이든 문화를 형성해 제도로 정착되기 위해서는 개인의 선택만으로는 부족하다. 혼자 무언가를
포기하며 선택한 삶이 너무 큰 희생을 담보로 하거나 사회적 소외를 초래한다면, 그것은 정당한 의미에서의 선택이 아니라 배제가 되기 때문이다.
합리적인 선택에 대한 사회적 공감과 윤리적 성찰,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삶에는 보람이라는 것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노력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기도 하고, (물질적, 심리적, 정서적) 투자에 대한 성과이기도 하며, 도덕적 정의에 대한 사회적 책임과
신뢰이기도 하다. 그것이 어그러질 때, 우리는 배신당했다거나, 뒤통수를 맞았다고 표현한다. 그 대상이 모호하기에 사람, 회사, 제도, 시대라는
말 대신, 운명이라고 말하게 된다. 공연히 운명을 탓하는 것이다. 이것은 타인을 공격할 수 없기 때문에 스스로를 공격하는 심경과 유사하다.
피해자는 개인이지만, 가해자는 당사자와 뫼비우스의 띠처럼 얽혀 있는 사회, 문화, 시대, 세계 그 자체이기에, 누구를 상대로 잘잘못을 따져야
할지 알 수 없는 것이다(사실은 모른 체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각자가 추구하는
보람이란 그 자체로 사회적이다.
목적 지향적 삶의 폭력성을 성찰해야 새해에는 누구나
다짐을 하고 서원을 세우며 계획을 실천하려고 한다. 삶에 목적을 갖는다는 것은 의욕에 불을 지피고, 사는 의미를 일깨워주기에, 중요하고 기치가
있다. 그러나 목적을 달성하는 것보다, 그 과정을 얼마나 정당하고 평화롭게 이루어냈는가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목적 지향적 삶과 공공성의
추구라는 모토가 얼마나 많은 폭력과 무리수를 자초했는지를 한국 근현대사를 통해 절감한 바 있지 않은가. 목적 지향성 자체보다는 목적에 도달하는
과정의 성실함, 평화로움, 배려, 존경의 마음이 목적 자체를 의롭게 하고 가치 있게 만든다는 것을 고려했으면 한다.
올해는
다이어리의 첫 페이지에 무엇을 적을까 생각하면서, 그간의 인생관을 다시 점검해 보게 되었다. 올해 나는 존중, 용서, 참회에 대해 공부해 보려고
한다. 그리고 내 공부가 내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에 대해 지켜보려고 한다. 수많은 선택지 중에서, 헐겁고 나약한 마지막 한 줌의 도덕을
붙드는 선택이 결국 이 세상을 견고하게 버티며 가치를 일궈냈다는 것이 지금까지 내 공부가 내게 응답한 가르침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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