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설 장군의 웅천 해전. 안골포 다대포 해전 승리를 당시 일본측의 기록에는 케이넌일기. 루이포로스일기, 10여곳의 여러 문헌에 규모가 나와있고 10여 회에 이른 부산해전의 시간 까지 나와있다.
당시 3도 수군편제이나 원균은 배설에게만 적을 치라고 허락했기 때문에 전라 충청수군의 전투가 아님은 분명하다고 할수 있고, 10여회의 일본군 14만 대군을 상대로한 전투에서 일본기록 거의 모두가 자신들이 패배했다고 판단 한점이 특이하다.
사실이 이래 급박하니 권율과 유성룡이 원균을 닦달할만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배설군대가 일본군을 어쩡 괴멸시킬수도 있다는 위기와 이순신장군이 백의종군 이후 죽게될 위험성이 공존한다.
<고려선전기 高麗船戰記>는 왜함대에 종군한 69세의 도노오카(外岡甚左衛門)가 1592년 7월 28일 부산포에서 작성한 전황기록문서이다. 임진왜란을 일으키게 된 자국 내의 사정과 부산포 침공 이후 왜의 수군이 겪은 연패의 참상을 기록한 것으로 “어리석은 노인의 붓끝이 후일의 비웃음을 무릅쓰고 써놓고자 하는 것이다.”라고 맺고 있다.
여기에는 한산대첩에 이어 7월 10일에 있었던 안골포해전(安骨浦海戰)의 실전상황이 목격한 대로 충실하게 기술되어 있다.
“구키(九鬼嘉隆)와 가토(加藤嘉明)는 와키자카(脇坂安治)가 전공을 세운 것을 듣고, 같이 6일에 부산포로부터 나와 바로 해협 입구에 이르러, 8일에는 안골포의 오도(烏島)라는 항(港)에 들어갔다. 그리하였더니 9일(朝鮮曆 10일)의 진시(辰時:오전 8시경)부터 적의 대선 58척과 소선 50척 가량이 공격해 왔다.
대선 중의 3척은 맹선(장님배: 盲船, 거북선)이며, 철(鐵)로 요해(要害)하여 석화시(石火矢), 봉화시(棒火矢), 오가리마따(大狩鉢) 등을 쏘면서 유시(酉時,오후 6시경)까지 번갈아 달려들어 쏘아대어 다락에서 복도, 테두리 밑의 방패에 이르기까지 모두 격파되고 말았다. 석화시라고 하는 것은 길이가 5척 6촌(약 117.6cm)의 견목(堅木)이며, … 또 봉화시의 끝은 철로 둥글게 든든히 붙인 것이다.
이와 같은 큰 화살(大箭)로 다섯칸(1칸은 약 1.25m), 또는 세칸 이내까지 다가와 쏘아대는 것이다.…” (鍋鳥家에 소장된 筆寫原本에서).
배설이 장작귀선 거함 돌격선 두척을 투입했다는 조선측 기록인 제조번 방지의 기록과 일본이 세척의 거함 맹선이 투입되어 일본군의 피해가 막심하다는 기록, 나는 일본측 기록이 사실에 가깝다고 보여진다.
당시 호남을 대표하든 동인정권에서 배설의 전투규모를 아예 기록하지 않았고, 일체의 포상도 없었을뿐 아니라 배설을 도망자로 몰았다는 것만봐도 지도층이 얼마나 영리한지 알수 있다.
배설이 지휘한 함선의 규모가 분명하고 병령도 약 1만여 병력 추정이 가능하다. 전투시간이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공격을 퍼부어 일본군들이 전부 후퇴하고 있는 모습도 특이하다.
김완의 해소실기에는 배설 장군과 김완장군이 마지막까지 적들의 등선육박전에 맞서 사투를 벌이는 기록이 생생하다.
칠천량 해전에서 적에 기습공격을 당한 배설 장군이 일본 요시아키 장군과 직접 배위에서 배세루를 잡으려는 요시아키 장군과 결투가 벌어졌다. 일본군에 목표는 이순신이나 원균이 아니라 배세루 였다는 사실과 요시아키가 포위망에 갖힌 배설의 지휘선에 몸소 올라 칼을 휘두러다 배설장군의 칼에 오른쪽 팔이 베이고 칼을 놓친 상태에서 너무도 무공이 뛰어난 것을 확인하고는 장군에 체면도 버리고 바다로 뛰어 내려 구사일생으로 살아돌아 갔다는 요시아키 장군기 기록있다.
일본군이 주도권을 잡고 김완 장군을 포로로 잡은 요시아키 군대가 부대장군이 퇴각하는 함선위에 올라 공을 세우려다 팔을 잃어버린 칠천량 해전의 치열함이 생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