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열기로 ‘박근혜 뉴스’는 뒷전이지만 ‘30분 독대에 승마 얘기 15분’ 대목만큼은 쉬 넘어가지 않는다. 2015년 7월25일 삼성 이재용 부회장과 최지성 미래전략 실장, 박상진 대외협력 사장 간의 3자 회동이 열렸다. 이 부회장이 당일 오전 박근혜 대통령을 독대한 뒤의 대책회의였다. 특검 증언으로 본 박 대통령과 이 부회장 간의 독대 분위기는 이렇다. “대통령을 30분가량 만났는데 15분을 승마 이야기를 하더라. 올림픽에 나가려면 좋은 말도 사고 전지훈련도 가야하는데 삼성이 아무것도 안 한다고 한다. 대통령 눈빛이 레이저빔 같을 때가 있다는 기사를 봤는데 무슨 말인지 알겠더라.” 물론 이 증언은 특검과 삼성이 정유라 지원금을 놓고 뇌물과 강요를 다투는 상황에서 후자를 강조하는 차원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럼에도 대통령이 총수를 만나 최순실의 딸 뒤를 봐주지 않는다고 면박을 줬다는 것에는 말문이 막힌다.
재벌은 늘 대통령을 감히 쳐다볼 수 없는 상석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사실 양자의 대결은 늘 재벌의 승리로 끝났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 등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도 재벌은 권력의 입안에 혀가 되어 덩치를 키워왔다.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은 물론 박근혜 시절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외쳤던 이명박을 제외하고 모두가 개혁과 상생을 내세웠지만 이내 재벌 편에 섰다. 기업 돈은 받지 않겠다며 호기를 부렸던 김영삼은 세계화에 따른 재계의 협조가 절실해지면서 타협했고, 김대중은 외환위기 극복과정에서 신자유주의에 노출되면서 노동권을 약화시켰다. 재벌개혁을 강조했던 노무현도 소득 2만달러, 개방을 통한 성장 등 재계의 요구를 국정과제로 삼았다. 경제민주화로 당선된 박근혜는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경제활성화로 갈아탔다. 한결같이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맨 앞에 뒀고, 규제완화 등 당근을 안겨줬다.
대선이 종반으로 치달으면서 후보들의 공약이 모습을 갖춰가고 있다. 문재인, 안철수, 홍준표, 유승민, 심상정 후보는 촛불의 정경유착 근절 명령에 걸맞게 징벌적 손해배상제·집단소송제 도입, 총수일가 일감 몰아주기 근절 등 재벌개혁을 약속했다. 그러면서도 대한상의 주체 토론회에서는 ‘기업을 살릴 적임자’라고 말한다. 문재인은 “내가 반기업적이라는 생각을 가진 분이 있다면 참여정부 때를 생각해보라. 정권이 기업에 부당한 요구를 하지 않으니 기업하기가 더 좋지 않았나”라고 반문했다. 안철수는 “22년 전 창업을 해봐서 산업구조나 경제구조 문제점을 잘 안다. 실력으로 대기업이 될 수 있는 구조를 만들겠다”고 말했다. 물론 재벌 개혁과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드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전자는 공정한 시장질서를 만드는 것이고, 후자는 기업들이 맘껏 뛰놀 수 있는 기업환경을 정비하는 것이다. 하지만 따져보자. 상의는 17만명이 회원으로 가입한 경영자 이익단체다. 상법 개정안 도입, 비정규직 철폐, 법인세 인상, 근로시간 단축 같은 개혁 이슈에 부정적이다. 이들 앞에서 기업을 살리겠다고 얘기하는 것은 개혁하지 않겠다는 말과 다름없다. 오히려 “최저임금과 근로시간 단축은 여러 우려가 있지만 바뀌어야 한다”(유승민), “비정규직 문제는 사회 모두가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문제”(심상정)라고 말하는 게 솔직하다. 주요후보들은 일자리, 복지 공약을 내걸면서도 재원 부분 마련에 대해서는 말꼬리를 흐린다. 기업을 의식한 결과이다.
우리는 그간 기업이 잘돼야 국민이 잘된다는 믿음 속에 살아왔다.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2000~2014년 기간 중 국내총생산 누적 성장률은 73%였지만 가계의 실질소득 누적증가율은 30%에 불과했다. 국민 총소득에서 가계소득으로 배분된 몫은 6%포인트 줄었지만 기업소득 비중은 7%포인트 늘었다. 성장의 과실을 기업이 독차지한 셈이다. 금융위기 이후 신자유주의는 수명을 다한 것으로 여겨졌지만 여전히 시장개방, 작은 정부, 기업 기 살리기 같은 모습으로 대로를 활보하고 있다. 한국 경제와 산업이 구조적 함정에 빠졌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대외외존도가 커 외풍에 쉽게 흔들린다. 내수를 키워야 하지만 저출산·고령화로 운신의 폭이 좁다. 전통산업은 중국에 따라잡혔고, 첨단 부분은 선진국과의 격차가 심해 언감생심이다. 그럼에도 대선후보들이 내놓은 4차 산업혁명은 부처 개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재벌에 언제 다시 손을 벌려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자본은 결코 선하지 않다. 시민과 자본 사이의 줄타기 결과는 재벌개혁·경제 민주화 실패, 경제불평등 심화로 이어졌다. 기득권에 추파를 보내고 기웃거릴 거라면 애초부터 개혁 얘기는 꺼내지도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