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 들어선다는 입춘과 동면하던 개구리가 놀라서 깬다는 경칩 사이에 있는 24절기의 하나. 입춘 입기일(入氣日) 15일 후인 양력 2월 19일 또는 20일이 되며 태양의 황경이 330도의 위치에 올 때이다.
. 출처: 우수[雨水] (한국세시풍속사전, 국립민속박물관)
[3]. 한국 임시정부는 일본에 선전포고하였고,일본은 항복하지 않았는데,이 선전포고는 영속적으로 유효합니다.
일본 강점기 잔재인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나 그 추종세력들이 시중 사설 입시기관이나 대중언론에서 아무리 덤벼도 한국 최고(最古,最高) 대학은 성균관의 정통성을 승계한 성균관대입니다. 대학은 과에 상관없이 Royal대인 성균관대나 서강대로 가는게 좋습니다.
사설 입시학원 점수가 어떻게 대중언론에서 나타나도, 교육부에서 확인된 사항이 아니면, 전부 사설 입시기관의 가상 시나리오에 의한 예측치에 불과합니다. 교육부는 이런걸 발표하지 않는데, 전부 사설 입시학원 예상점수만 축적해 이를 입결이라고 활용하는건 문제입니다. 그리고 현재 한국 대학입시는 수시가 대세입니다.
국제법상 상위법인 포츠담선언. 국제법상 하위법인 미군정령으로 주권없는 패전국 일본잔재 경성제대가 서울대가 되고 전국적인 반대를 겪으면서 적산재산의 국유화처럼 국립대가 되었는데...
3]. 국제법은 국내법과 다릅니다. 고종당시부터 을사조약은 무효였기 때문에 국내법 우위로 보면 을사조약.한일병합은 무효였고, 박정희 대통령때 체결한 한일 기본조약으로도 을사조약.한일합병은 한국측 입장으로는 원천 무효입니다. 또한 현행헌법 전문의 임시정부 법통계승으로 보아도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나 각종 왜놈학교들의 주권이나 학벌은 한국영토에 없어왔으며, 그 추종세력들의 자격도 없었습니다.
대중언론이나 사설 입시학원의 자료를 이용하여 매일 덤벼도, 미군정 당시부터 현재까지 국사 성균관[해방후의 성균관대가 성균관의 정통을 승계하여 성대 6백년 역사가 정부의 학술적 정설(定說] 교육이 이어져왔기 때문에, 성균관대의 최고(最古,最高)학벌은 바뀌지 않아왔고, 현재도 그렇습니다.
한국의 정부체제.국가체제중의 하나인 국사편찬위는 국가기관.국책연구기관입니다.
6백년전부터 조선.대한제국 유일무이의 최고 교육기관이던 성균관(성균관의 정통성은 해방후 미군정부터 국사교육을 통하여 성균관.성균관대가 유지.계승시켜옴)같은 유서깊고 정통성있는 Royal대인 성균관대.
[4]. 한국에 주권없는 패전국 일본과 한국내 잔재(경성제대 후신 서울대 및 추종세력)세력의 처리에 대해!
1]. 법이나 교과서.백과사전등뿐 아니라, 대중언론등 전방위적으로 성균관대와 유교의 위상회복이 중요함.
1. 우선 성균관대학과 유교의 안정적 복구를 위하여 협력자들이 필요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강력한 자기의 힘으로 독립을 쟁취하지 못하고, 2차대전때, 연합국측 강대국들의 포츠담선언과 카이로선언에 의해 독립이 언급되고, 미군정의 과도통치가 있었기 때문, 여러가지 복잡한 문제들이 얽히고 설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미군정령은 하위법이고 그 상위법은 국가원수들이 모여서 발표한 포츠담선언(카이로선언 포함. 포츠담선언은 미국.영국.중국 3개국 수뇌회담의 결과로 발표되고 나중에 소련공산당서기장 스탈린도 함께 서명)이기 때문에, 포츠담선언을 받아들여 항복한 일본 잔재 경성제대(그 후신이 서울대)의 한국내 주권은 2차대전 항복과 더불어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포츠담선언에 대한 요약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다 음 -
포츠담선언
[Potsdam Declaration음성듣기]
요약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전인 1945년 7월 26일 독일의 포츠담에서 열린 미국·영국·중국 3개국 수뇌회담의 결과로 발표된 공동선언.
일본에 대해서 항복을 권고하고 제 2차 세계대전후의 대일처리방침을 표명한 것이다. 처음에는 미국 대통령 트루먼, 영국 총리 처칠, 중국 총통 장제스[蔣介石]가 회담에 참가하였으나, 얄타회담때의 약속에 따라 소련이 대일선전포고를 하게 되어 소련공산당 서기장 스탈린도 8월 이 회담에 참가하고 이 선언문에 함께 서명하였다.
이 선언은 모두 13개 항목으로 되어 제1∼5항은 전문(前文)으로 일본의 무모한 군국주의자들이 세계인류와 일본국민에 지은 죄를 뉘우치고 이 선언을 즉각 수락할 것을 요구하였다.
제6항은 군국주의의 배제, 제7항은 일본영토의 보장점령, 제8항은 카이로선언의 실행과 일본영토의 한정, 제9항은 일본군대의 무장해제, 제10항은 전쟁범죄자의 처벌, 민주주의의 부활 강화, 언론·종교·사상의 자유 및 기본적 인권존중의 확립, 제11항은 군수산업의 금지와 평화산업유지의 허가, 제12항은 민주주의 정부수립과 동시에 점령군의 철수, 제13항은 일본군대의 무조건항복을 각각 규정하였다.
특히 제8항에서는 “카이로선언의 모든조항은 이행되어야 하며, 일본의 주권은 혼슈[本州]·홋카이도[北海道]·규슈[九州]·시코쿠[四國]와 연합국이 결정하는 작은 섬들에 국한될 것이다”라고 명시하여 카이로선언에서 결정한 한국의 독립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이 선언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고 소련도 8월 9일 참전하여, 10일 일본은 이 선언을 수락, 14일 제 2차 세계대전은 완전히 끝났다.
. 출처: 포츠담선언[Potsdam Declaration] (두산백과)
일본의 항복부터 지금까지 주권이나 학벌없이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그 추종세력이 일본 강점기 연희전문 후신 연세대, 친일파 김성수가 보성전문을 인수하여 세운 고려대등)나 각종 왜놈학교(전문대나 초급대 수준에서 대학이 된 동국대,경북대.전남대.부산대.서울시립대등. 그리고 전국 각지의 각종 공립 중.고등학교등)들이 오늘에 이른것입니다.
그래서 국사에 나오는 조선.대한제국 최고 교육기관 성균관의 정통을 승계해 온 성균관대를 중심으로, 세계사에 나오는 교황의 위상을 반영하여 교황윤허 서강대를 국제관습법 형태의 Royal대학 동조자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서유럽 학자들의 이론은 세계사 뿐 아니라, 수학, 사회문화.국토지리.세계지리, 물리.화학.생물.지구과학, 음악.미술등 학교교육 전반에 걸쳐 교육되고 있습니다.
세계사에서 황하문명.유교, 한나라 태학.국자감(원.명.청의 국자감은 이후 경사대학당과 베이징대로 승계됨)의 학교교육은 고구려 태학.고려 국자감.조선 성균관(해방후 성균관대로 정통 승계되어 오늘에 이름)과 조선.대한제국 국교인 유교를 가르치는 한국 국사교육에 이론적 지지.동조역할을 해주고 있습니다. 세계사로 보면 한국 유교는 한사군부터 시작되어 수천년에 걸쳐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한국적인 판단으로는 고려.조선시대에 인정하던 기자조선도 유교의 전래에 일정 역할을 하였다고 판단되는데,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위만조선부터 유교가 전래되었다고도 서술하고 있습니다.
2]. Royal대인 성균관대나 서강대 가면 한국에서 최고 높은 Royal대 학벌에, 세계적인 인지도를 가지는 최고 학벌을 얻게 됩니다.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는 비신분제 대학들로 한국영토에 주권이 없거나 낮은 대학들입니다.
조선 성균관의 정통을 성균관대가 승계해왔는데, 한국민족문화대백과를 통하여 성대 6백년 역사는 정부의 학술적 정설(定說)로 보강까지 되어, 성균관대의 최고(最古,最高)학벌은 바뀌지 않아왔고, 현재도 그렇습니다. 대학은 Royal대인 성균관대나 서강대(세계적으로도 드물게 교황 윤허 대학중 하나)학벌이 가장 높고 좋으며, 세계적인 영향력이 있습니다.
대학.종교관련, 한국에서는 한국사.세계사의 정설(定說)을 대체할 이론이 없습니다.
세계적으로도 세계사는 가장 보편적인 정설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런 교과서적 정설이 해당국가에 맞지 않으면, 국가주권이라는 개념을 적용하여, 해당국가만 별도의 이론을 교육시키는 방법도 가능하겠습니다.
대학.종교관련, 확실하다고 인용할 수 있는 이론은 교과서(참고서포함), 백과사전, 전문사전, 오랜동안 애독되어온 전문 학술서등이 가장 신뢰대상인 것 같습니다.
이런 定說에 바탕하지 않거나 위배되는 새로운 이론은, 세계사나, 그나라 국사 및 정부입장과 대조하면서, 定說로는 채택하기 어려운, 새로운 논문.主義등으로 간주하는게 적절한 것 같습니다(학자가 아니면서 문필가.사상가 영역에서 활동하는 필자를 포함하여 누구의 이론이나 주장.主義든간에...).
대학관련, 대중언론이나, 사설 입시학원들의 자료, 시중의 광고용 홍보는 定說이나 학술이론으로 채택해 줄 수 없는 특정집단의 홍보자료로 간주하면 적절한 것 같습니다. 현대에 들어 대중언론과 광고의 범람으로, 오랜 권위를 인정받아온 교과서나, 정부 간행물, 역사서, 경전(유교나 가톨릭등)등의 권위가 훼손될수도 있겠는데, 대중언론과 대중문화는 한계가 있는 매체임은 분명하니까, 상업적으로 돈을 버는데 유리한 측면은 인정하면서도, 오랜 역사와 전통의 대학.학술.문화.종교등의 기득권은 보호되어야 하겠습니다.
한국의 경우 국가기관이며 국책연구기관인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발행해온 국사의 내용을 학교교육에 반영하고, 이전의 예비고사.학력고사나 현재의 수능에 적용하지 않을 수 없을것입니다. 고등고시, 공무원시험, 경찰시험등에서도, 국사편찬위의 발행내용에 크게 벗어나지 않게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학설 그대로 반영하여 출제해 온 특성이 강하다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한국은 公敎育에서 오랫동안 다음과 같이 교육을 시켜왔습니다.
- 다 음 -
1. 한국사 성균관(해방후에 성균관대로 계승되어 600년 역사를 인정받고 있음),
2. 윤리나 한문(또는 국어의 고전)수업에서 가르치는 유교교육 삼강오륜(공자님과 맹자님의 가르침).
3. 세계사 교육:세계사는 서유럽과 교황청의 영향력이 강하게 반영되었다고 판단됨. 그리고 학술적으로 중국의 황하문명이나 한나라 태학. 유교등도 기득권을 중요하게 인정해온 경향
1). 황하문명, 유교, 중국 한나라 태학(그 이후의 국자감. 국자감은 청나라때 경사대학당이 되고 이후 북경대로 계승됨)
2). 에게문명, 로마 가톨릭, 중세유럽의 대학인 볼로냐 대학, 파리대학등
구한말 國外에서 외국세력의 힘과, 한국내에서 유교와의 마찰에 놀란 대원군이 쇄국 정책을 펴고, 서양의 발전된 과학기술 수용까지 거부하면서 유교를 지킨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러나, 세계화시대가 되었으므로, 근대 중국의 침체기 및 한국의 수난기에, 세계사의 주도세력으로 여러 학자들 이름이 거론되는 서유럽과 교황청의 전통과 자격을 감안하여, 유교나 한국에 필요한 가톨릭 예수회(서강대)임을 강하게 느껴, 宮 성균관대(국사교육에서 가르치는 유일무이의 최고 교육기관 성균관의 정통성을 승계한 최고대학으로 600년의 역사를 한국정부로부터 인정받고 있음)=御 서강대(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물게 교황윤허 대학 중 하나)임은 변하지 않습니다.
6백년전부터 조선.대한제국 유일무이의 최고 교육기관이던 성균관(성균관의 정통성은 해방후 미군정부터 국사교육을 통하여 성균관.성균관대가 유지.계승시켜옴)같은 유서깊고 정통성있는 Royal대인 성균관대.
서울대는 경성제대 후신으로 을사조약이 무효고(따라서 국내법 우위의 전통 법이론으로 보면 한일병합도 무효), 일본이 항복하면서 받아들인 카이로선언.포츠담선언에 의해 한국에 주권이나 학벌이 없어왔습니다. 그 추종세력인 서울대.연세대.고려대도 당연히 그런 주권없고 학벌없는 일본 강점기 잔재 서울대의 추종세력.
한국의 현행헌법(1988년부터 시행)에 보장된 임시정부 법통때문에,이론상으로는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는 강행법측면에서 한국에 주권이나 학벌이 없습니다.
한국의 역사적.교과서적.국가적 차원의 최고(最古,最高) 대학학벌은, 조선,대한제국과 마찬가지로, 해방후 미군정부터 현재까지 성균관의 정통성을 승계한 6백년 역사의 성균관대입니다.
한편 세계사를 저술한 것으로 판단되는[대부분 서유럽 학자들의 이름만 나옴. 이는 2차대전 이전 근대에 세계의 지배세력이던 서유럽의 역사가 그렇게 만든것 같음] 서유럽.교황청의 영향력은 지금도 세계사나 여러가지 교과서(참고서 포함).백과사전.학술서적등을 통하여 지금도 유지되고 있습니다. 서강대는 교황윤허로 대통령령에 의해 발행된 한국 민족문화대백과가 그렇게 인정하고 있습니다.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한국에 유교 문화가 전승된 시기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음.
- 다 음 -
이미 고조선시대 즉 위만시대와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시기부터 중국문화와 유교사상이 전승되어왔기 때문에...
4]. 기자조선에 대한 필자의견. 두산백과의 서술을 인용함.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기자조선의 실체를 인정하였지만, 최근에는 이를 부정하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먼저 문헌상으로 기자가 조선에 와서 왕이 되었다는 것을 입증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 필자 주 2). 고려.조선이 인정하던 기자조선이기 때문에, 최근에 부정하는 이론이 지배적이 되었어도, 위만조선에 멸망당한 기준(箕準) 왕이라는 기자의 후손이 역사적으로 존재하므로, 고려.조선이 인정한 기자조선에 대하여는 일본강점기 이후의 부정적인 견해에 의해 그렇게 부정당한 측면이 있는지등도 검토하여야 할 것 같음.
. 필자 주 3). 기준 [箕準]에 대한 민중서관의 설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