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자다, 그리고 나는 교수다. 그래서 나는 여교수다. 그런데 내 성은 ‘여’가 아니다. 내 성은 ‘최’다. 우리 학교에는 ‘呂’ 씨들의 모임이 아닌 ‘女교수회’가 있다.
내 주위에는 많은 남자 교수들이 있다. 그런데 그들은 남 교수가 아니다. 그들은 성씨가 ‘南’이 아니고서는 ‘男 교수’라고 불리지 않는다. 그리고 ‘男 교수회’도 없다.
의사, 선생, 검사 등에서도 그렇듯이 ‘교수’라는 직업명은 이론적으로 남녀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표현이지만, 우리의 언어습관은 여기에 ‘우선 남자로 인식할 것’이라는 꼬리표를 달아놓고, 여자에게는 ‘女’의 화관(花冠)을 씌워 그 의미(!)를 더해준다.
지금 재직하고 있는 대학에 자리를 잡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저녁 무렵 교내에서 마주친 한 (남)교수님께서 나에게 이렇게 말을 건네셨다. “아니 이 시간에 아직도 집에 안 가고 여기서 뭐 하고 있어? 빨리 집에 가서 신랑 밥도 해주고 애도 챙겨주고 해야지!” 나보다 연배가 높으셨던 그 (남)교수님에게는, 주부로서 당연히 가정을 건사해야 할 그 시간에 직장의 울타리 안에서 어정거리는 내 모습이 바로 엉망진창 부실하기 짝이 없는 우리 가정의 모습을 가늠케 하는 확실한 단서와 증거정황이 되는가 보다. 우리 가족에 대한 그분의 진심어린 염려와 우려의 표명은 내가 감히 감사의 말로 응수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순간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이, 선생님께서 지금 이 시간, 여기에 계시는 바로 그와 똑같은 이유로 저도 아직 여기에 있어요!”
저녁 시간에도 연구실을 떠나지 않고 어슬렁거리는 내 모습은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가사노동을 짊어질 책임에 대한 직무유기’의 판단 근거가 되는 반면, “9 to 6”의 근무 시간으로 일을 하는 직장여성들에게는 퇴근 시간을 넘기고도 일터를 벗어나지 못하는 안절부절이 무책임하고 불량한 근무태도로 낙인 되어 불만 유발인자로 작동한다. “여자들은 뽑아 놓으면 그저 집안일이다, 애다 하면서 퇴근할 생각만 하고 있어!”라는 힐난의 소리와 함께. 남자와 여자의 이분법 우리의 머릿속에는 다양한 종류의 이분법이 존재한다. 흔히 말하는 ‘흑백 논리’의 이분법적 사고는 ‘이것(+) 아니면 저것(-)’으로 양분된 절대적 가치가 대상을 바라보는 중요한 잣대다. 여기에는 ‘살아 있는 (+/on)’, 혹은 ‘죽은 (-/off)’ 같은 양극의 대립관계만이 존재하고, 길거나 짧은 것처럼 무엇과 견주느냐에 따라서 그 무엇이 될 수 있는 상대적 관점의 회색지대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는 바로 이 이분법의 잣대 속으로 편입되어 있다. 하지만 이런 분명한 이분법의 잣대 안에서도, 심장이 멈추지 않는 한 뇌의 죽음(腦死)은 ‘살아있음(on/+)’과 ‘죽음(off/-)’에 대한 판단을 유보시키고, 트랜스젠더의 문제는 ‘여자라면 남자일 수 없고, 남자라면 여자일 수 없다’라는 그토록 간단하고 쉬운 문제를 온통 흔들어 놓는다.
과거 우리에게서 난무했던 이분법의 잣대 중에서 가장 우스꽝스러운 것 가운데 하나가 ‘남학생은 독일어’, ‘여학생은 프랑스어’라는 고등학교 교육현장에서 횡행하던 역사의 얼룩이다. 오랜 시간 동안 ‘이과 반 남자’와 ‘문과 반 여자’와 같은 이분법의 원칙에 따라서 많은 직업이 선택되도록 길들여졌다. 그리고 지금도 이분법적 사고를 벗어나지 못하는 편견과 평가의 잣대는 도처에서 여전히 그 위세를 부리고 있다. 생물학적 차이와 사회적 편견이 만든 차별 남녀를 가르는 생물학적 차이의 ‘여자’라는 어휘에 임신과 출산, 모유수유의 의미가 고스란히 ‘엮여있다(!)’. 그런데 세상이 바라보는 여자는 생물학적 관점이 아닌 사회적 통념의 성(젠더) ‘여성’이라는 안경을 쓴 차별적 관점을 통해서다.
남녀의 이분법 안에서 유독 여자에게만 ‘女’의 왕관을 씌워 ‘슈퍼우먼’으로서 등극시켜 놓고, 편견의 무게까지 얹어주며 견디라 한다. 여기에 생물학적 ‘차이’에다 사회의 편견이 만든 ‘차별’까지 한몫하며 거들고 있다.
여성을 사회적 동력으로 끌어들이면서 ‘차별의 시선’을 버리고, 뛰어넘을 수 없는 ‘차이의 벽’을 사회가 함께 나누어 덜어주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느냐 아니냐가 선진국을 판가름하는 한 잣대가 될 수 있다. 그 차이들이 완벽하게 대체될 수 있는 보상은 아니더라도, 경제적 지원과 복지 시스템을 통해서, 차이가 차별로 인식되고 실행되는 부조리를 조금이라도 감소시키려는 노력이 절실한 만큼, 그 어떤 물리적 변화보다도 먼저 이루어져야 할 것은 우리 머릿속에서 곧잘 이분법의 잣대를 들이대며 활개 치는 ‘의식’의 변화임은 말할 것도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