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역사도 역사”라고 주장하는 이들을 향해서
요즘 우리사회를 들여다 볼 때 한탄스럽고 원통하게 하는 일들이 많이 벌어지고 그것을 지켜보려니 왠지 슬픈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 같은 현상들이 더욱 강성해지는 것을 보면서 안타깝게 여기면서 글로 알리고자 하는 것이다.
아마 그 가운데 하나는 역사왜곡 문제라고 본다. 그런데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이 있다는 점이다. 역사 왜곡 문제가 일본과 그 맥을 같이 한다는 사실이다. 일본이 역사 왜곡을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하면서 우리사회도 그 같은 움직임들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일본과 함께 목소리를 내는 자들이 등장을 했고, 더욱 대담해 지면서 시간이 흐를수록 그 경향성이 도저히 납득되지 않고 정도로 과거사 문제를 합법화 하고자 하는 움직임들이 강성해져 가고 있다.
분명히 정도가 아님에도 그 과감성이 도를 넘어서 힘을 형성하고 그 조직력은 우리나라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이와 더블어서 우리사회 현상은 옳고 그르다고 할 수도 없는 웃지도 못할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면서 어안을 벙벙하게 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다음과 같은 의미 부여로 우리사회를 속이기 시작 한 논리전개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아픈 역사도 역사다” “악법도 법이다”라는 식의 논리적 대칭이 아니겠는가? 전혀 문제가 없다. 그 어디를 보아도 당연한 논리이다. 철학이나 사상, 격언, 혹은 성인들의 말을 빌려서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노력들이다.
특히 대중적이고 유행처럼 오늘 시대를 주도해 가고자 함에 있어서 이런 식으로 전달 화법은 인류사회의 정신적 재산이자 사람을 바르게 잘 인도하고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어가는 좋은 사상 체계로써 그 의미가 풍부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매우 위험한 인간적 의지가 동시에 작용된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순수하고 자연발생적 교육으로 작용할 때 그 의미는 풍부하고 인간을 더욱 윤리적 인간으로 인도할 수 있는 지적 재산이다.
즉, 자신이나 자신이 관계되거나 구속 되어 있는 힘의 배경에 도구로 전락되어 요구되고 강요되는 목적이 설정 된 기계적 사회 일 때, 거기서부터 뒤틀려지기 시작하는 파괴적 사회 현상이 주도하여 혼란 사회를 지향하는 비정상사회가 발현(發現)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아픈 역사도 역사이다”라고 주장하는 논리가 자연발생적인가, 의도적이고 강요하여 조작되는 파생적(派生的)인 문제의 사회인가에 따라서 그 주어지는 의의는 근본적으로 갈라진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자연발생적이란, 국가든, 사회든, 가정이든, 개인이든 그 바탕이 자국을 중심하여 자연적으로 일어나고 당한 아픈 삶이었고 사건이었던가? 아니면 침략이나 그에 준하는 주종과 같은 환경 하에서 만들어진 역사요 삶이었던가? 이러한 근원적인 문제로부터 주어지는 국가적 의의를 의미함이다.
그런데 “아픈 역사도 역사이다”라는 논리를 전개하는 이들의 주장은 처음부터 잘못 된 것임을 전제로 해야 할 것이다. 두 영역과 배경에 의해서 그 의미는 크게 다르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사회, 일부의 사람들은 선과 악의 요인들을 섞어서 그것을 역사 문제로 풀고자 한다는 사실이다. 즉, 사실과 현실을 동시에 한 묶음으로 보고자 하는 역사논리라 할 수 있다.
이를 우리는 자기중심과 자기입장에 의거하는 역사적 관점이라고 지적할 수 있다. 즉, 자신이 그렇게 당했거나 자신들의 선조나 조상들이 당하고 행한 그 배경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현실 논리와 힘을 결합하여 또 다시 그 시공간을 만들어 가고자 하는 배경의 역사 논리로 해석할 수 있다.
가령 예를 들자면, 일본이 우리를 침략한 것은 우리 입장에서는 당한 것이고 억울한 면이 있지만 순수한 역사 논리, 혹은 ‘사회 발전적 측면에서는 일본이 기술과 기계 문명 등, 우리사회 진보와 현실적 부의 세계를 가져오게 한 측면을 부정할 수 없다’라는 전재로 자신들의 주장을 편다.
“아픈 역사도 역사로 보자!”라는 논리는 철저히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힘의 배경에서 나오는 이기주의적 발상이다. 이런 점에서 역사는 강대국과 승자 중심적 관점이란 말은 확실히 맞는 말이다.
그래서 인간의 언어는 자기존재를 인식하고 전달하는 매개이지만 한편으로 파괴적인 이기심을 자극하고 전달하는 측면에서 자기사회 앞에 내놓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먹히는 것은 미리 다양성이나 문화관이라는 의미들로 깔아놓은 현대적 특질 때문이다.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함께 두 나라가 미래를 향해서 나아가자!”라는 논리 안에서 공통분모를 찾는 현실이 얼마든지 될 수 있다. 특히 일본이 침략 욕구를 내려놓지 않는 한 두 나라의 슬로건은 역시 먹히지 않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주장하는 자들이 간과하는 것이 있다. 첫 번 째는 자신들의 조부, 부모, 형제들이 당대에 자신들의 안일과 부귀영화를 위해서 나라를 팔았던 길을 택했고, 자신의 다른 민족들에게 고통을 가져다주었고, 그것을 통해서 상대적으로 자신들이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방편으로 삼았고, 그러한 삶을 위해서 거짓되고 사악한 역사를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그처럼 지금도 똑 같이 동일한 행동과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과거의 역할과 배신의 방법을 먹고서 더욱 고도로 속이는 지식과 힘으로 발전되어 내 놓는 역사 슬로건으로써 “아픈 역사도 역사다”라는 논리를 자기 민족 속이는 설득 화법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수단 방법 가리지 않는 박쥐같은 인생들이 아닌가?
다음은,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점진적으로 일본과 가까워지기 운동의 일환으로써 역사 논리라는 이유이다. 우리는 이것을 중간 과도기로 볼 수 있다. 지금은 단순하고 지극히 순수한 역사논리이자 외교적 노력일 뿐이라는 말로써 우리 국민들을 속이지만 결국은 한국사회와 기반 자체를 일본으로 귀의시키는 중간 행보들이었다는 사실이 가까운 미래에 드러나게 될 것이다.
지금 이미 그 같은 현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우리사회가 더욱 혼란과 이상 기류로 몸살을 앓게 되는 것이다. 이를 우리는 한국사회에 대한 일본적 파괴 기능이라 할 수 있다.
이 같은 경향성이 점점 강해지기 때문에 반비례적으로 우리사회 혼란이 더욱 가속도가 붙고 갈수록 이상한 사건들이 동시다발적이고 연쇄적으로 연달아서 폭발하는 사회로 나아가고 비정상의 정치 행보들이 두드러지는 것이다.
일본이 우리를 다스리면서 고통을 준 시간들은 아픔과 동시에 기술과 발전, 그리고 부를 가져다주었고, 그래서 아픈 역사이고 그 역사는 ‘우리에게 교훈이 된다’라는 논리를 적극적으로 펼 수 있는 그 같은 사회가 주도하고 통하는 나라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서 일으키는 노력의 일환이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정당화 시키는 힘의 논리이다. 일본의 행위와 그 힘에 빌붙어서 어용짓으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했던 자들의 자기 정당화 역사 논리로써 다시 힘으로 안 맞고 틀린 것을 우리사회에 억지로 깔고자 하는 사악한 행보인 것이다.
이를 우리는 우리의 정신과 인식을 마비시키는 사회 파괴적 기능성의 문제로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일본이 원하는 이 같은 역사 왜곡을 우리의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억울함과 통곡의 역사를 모두 내려놓아야 한다. 그런 다음 일본이 원하는 방향대로 우리사회가 따라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우리중심의 역사관을 분명하게 펼 수 있어야 하고 그 같은 역사 기반 위에서 나라 현실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아픔은 우리가 원해서 받은 것이 아니다. 기술과 발전이 좀 더디게 오더라도 어차피 우리 계몽시대는 오게 되어 있었다.
그것은 우리의 주권과 영토, 국민과 행복을 추구할 사회적 환경이 우리의 문제로 다가오고 우리의 기본권은 물론 나라 공동체를 위한 진정한 사회구현, 그리고 한반도의 주인으로써 우뚝 세워지는 우리의 든든한 역사와 전통 중심의 나라가 구현 되는 현실이 오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이럴 때 과거의 가난했고, 불운했던 시절을 돌아보며 그로부터 깨달음이 있고, 이것이 힘으로 결합되고, 그 같은 교육이 현재의 교훈과 미래의 발전이란 진정한 의미로 연결되어 져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어 질 때 마음에 와 닿고 점진적으로 우리의 우리사회 공동체의 진정한 현실과 미래를 만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들처럼 일본과 함께 하기 위해서 과거 역사 문제를 논하고 그것을 현재에서 공통분모를 갖기 위한 일본지지의 역사논리전개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사회 현실은 전혀 자국 국민들을 보호하지 못하는 현실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가령 예를 들어보자! 건강 문제로 보건소나 의료 행위들이 자국 국민들을 실험 대상으로 삼아서 고통을 가할 때, 만에 하나 이것이 일본의 현대 침략적 배경과 연결 되는 우리사회 파괴적 현상이라면, 우리는 지금의 사회 현상을 좌시해야 할 시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사회를 지배하기 위해서 미리 준비해 놓은 인적 자원들을 통해서 먼저 자국민들을 유린하는 사회 구조가 형성되어 일어나는 우리사회 현대적 공간적 배경 문제가 아니겠는가? 혼란 공간으로 치달아 가는 문제 사회 말이다.
사드 문제로 더더욱 우리의 경제와 재정이 직접적으로 타격이 받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우리 경제를 전적으로 지원해 주는가? 더욱 결핍적인 현상이 주도할 것이다. 일본적인 기업으로 준비되어 있는 롯데라면 결국 사드 배치 부지로 내어주게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일본의 경제 침략은 본격적으로 단행을 하게 될 것이다.
우리사회 주요 공단마다 일본 기업구조가 얼마나 많은 공장들을 관리하고 있는 현실인가? 거기에다가 5년 전부터 자리를 잡아가면서 우리사회를 급속도로 현금 동원 구조를 확보해 가고 있는 일본 저축은행, 이미 우리사회 저축은행의 저축 율을 능가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우리 정치권과 은행, 언론들은 가만히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어느 책임 있는 공권력도, 사회 공동체도 말하지 않고 있다. 지금 우리의 마지막 보류라 할 수 있는 무역 루트가 이미 위협을 받고 제1 경제 기반이었던 조선소가 무너 진지가 오래 전의 일이다. 이 모든 현상들은 하루아침에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이전부터 서서히 준비되어 오다가 지금에 이르러서 가속도가 붙게 됨으로 해서 급속도로 진행되면서 우리사회를 점진적으로 목을 조이고 옭아매는 힘으로 형성되어 온 것이다.
이러한 현상들은, 대대로 한민족으로 혈연관계나 사회 탄탄한 인맥과 정신으로 단단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민족과 사회구조 기반 그 자체를 그대로 두고만 보았더라면, 어떻게 일본이 제3차 침략 같은 현대 침략 환경을 추진 할 수 있겠는가?
우리사회를 불신과 대립, 그리고 인간관계나 정부와 국민적 공감대와 같은 사회 근본 기반들이 금이 가고 무너지게 하려면 농민들, 기계공들, 이공계 전문가 집단들, 교사들 존경과 대우문제, 119 구급대원들이나 경찰들, 사건 사고 관계 억울하게 당하는 이들 속출,
여기에다 의료사고나 실험과 연구문제, 청년들 실험문제, 청소년들 게임과 화장, 저질 언어 사용 등, 사회 전반에 거쳐서 의문투성이나 이상기류 현상으로 인해서 국민적 불신과 나라로부터 국민적 마음들이 떠나고 갈리게 하는 그 같은 작용들은 지금과 같은 사회현실로 몰아 온 음성적 힘이었던 것이다.
우리사회 이 같은 전반적인 이상 현상이나 기류는 바로 “아픈 역사도 역사다”라는 지극히 합당한 논리나 정신세계, 사상 등의 좋은 이론이나 교훈을 이용하여 우리사회를 유린하는 자들로부터 기인되어 왔던 것이다. 이것은 사실이고 이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힘주어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 존재의 기원은 일본과 직결되는 인적 구조이다. 이들은 오래 동안 일제 강점기로부터 연결되고 파생되어 지금까지 이어지는 인적자원과 역사논리의 물줄기로써 도무지 이성이 통하지 않는 마비되고 죽은 양심의 사람들이다.
왜, 죽은 양심의 사람들이라고 단언해야 하는가? 이들은 우리사회 안에서 적극적으로 일본을 다시 모시고 섬기기 위해서 우리사회를 그러한 방향으로 몰아가는 행동가들로 준비해 왔고, 그를 위해서 기꺼이 숙주들이 된 것이고, 결국 이들에 의해서 우리의 미래가 고통으로 열릴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동해안 일대에서부터 그러한 기운이 강하게 퍼지고 있다. 이는 일본의 독도 찬탈과도 연계 될 수 있는 움직임들이다. 문화라는 관점에서 청소년들에게 일본 기모노를 입어보는 체험들이 성행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