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태복음7:24~27) 하심 같이, 예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지키고 실행하여야 할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신학자와 목사와 교회 신도들이 대부분 성경 해석자로만 세상을 살아가려 할 뿐, 예수님이나 초대 교회의 사도들이나 성도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지키고 순종하려는 자들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성경 해석은 글 쓴 이, 곧 말씀하신 분 하나님(성령)만이 참되게 해석할 수 있을 뿐, 그 이외의 사람들의 해석은 모두가 인간의 죄된 망상에서 떠벌리고 부르짖는 선전선동이요 웅변일 뿐, 하나님의 뜻과 은혜와 정감은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주는 자가 복이 있다. 용서하는 자가 용서함을 받는다"라는 말씀을 해석하는 설교자들의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이보다 더 아름다운 말씀은 어느 성자에게도 찾아볼 수 없고, 이보다 더 아름다운 시구절(詩句節)은 어느 시인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참으로 말씀 중의 말씀이요, 시(詩) 중의 시(詩)입니다"라는 세상 식자들의 감성적인 말로 한껏 높이고 찬양하고 부르짖지만, 그 말 속에서는 하나님의 뜻과 은혜와 정감이 없기 때문에 그 말씀을 지켜야겠다는 의지는 추호라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제가 젊었을 때 주일학교 부장 선생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친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날 초등학교 5학년쯤 된 아이가 저를 급히 찾아와
"부장 선생님! 부장 선생님! 있잖아요, 참 신기한 일이 생겼어요"
"신기한 일? 응, 그것이 뭔데?"
"있잖아요, 어저께 제가 동생하고 집에서 장난을 치다가 그만 커다란 유리 거울을 깨뜨렸거던요"
"유리 거울을...?"
"녜! 근데 아빠가 집에 돌아와서는 야단치지도 않고 때리지도 않고 도리어 다치지 않았느냐고 걱정하고 마셨어요"
당연히 아버지로서 해야 할 일을 한 것이건만 이 아이는 그 일이 천만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아이의 어머니는 가출 상태이고 그 아버지는 신경이 날카로운 데다 아이들의 실수가 있으면 화풀이하듯 매질하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 그런데 우리 아버지가 왜 저를 안때리셨는지 아세요?"
"글세, 술한잔 마시고 뭐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어서..."
"아녜요, 선생님! 사실은요, 제가 그 유리를 깨고 나서 아버지께 매맞을 일이 걱정이 되어서 골목길에 서 있는 데, 웬 쬐끄만 아이가 저한테 찾아와 이유도 없이 발길로 제 정강이를 계속 차잖아요, 그래서 절반쯤 죽여 놓으려고 하였는 데, 갑자기 예수님 말씀이 생각났어요"
"예수님의 말씀, 무슨 말씀이?"
"있잖아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용서함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
"그 그 말씀이..."
"그러니깐 제가 그 꼬마를 용서해 주면, 우리 아빠도 유리를 깬 제 잘못을 용서해 주실 것 같아 계속 그 애한테 차이기만 하고 때리지 않았거든요"
"야~ 너 같은 개구쟁이가... 그런 꼬마한테 발로 차이고 그냥 용서해 주었어?"
"그래요, 그런데 진짜 진짜 예수님 말씀대로 무서운 우리 아빠가 순한 양같이 변해서 저를 어루만져 주시고 위로해 주잖아요. 어때요? 신기한 일이잖아요?"
주일학교 부장 선생이었던 제가 "주는 자가 복이 있다. 용서하는 자는 용서함을 받는다."라는 말씀을 온갖 서적을 들쳐 가며 또 아름다운 예화로 단장하여 밤새 연구한 설교 원고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하더라도, 이 개구장이 아이보다 더 정확하게 예수님의 그 말씀을 해석해 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예수님의 그 말씀을 지키고 순종해 본 일도 없이 남들이 연구하고 해석해 놓은 말씀만 여기 저기서 꿰 맞추어 꾸며 만든 것에다 제 생각을 얼마쯤 보탠 죽은 성경 지식만 전하지만, 이 아이는 친히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고 실행하여 하나님의 뜻과 은혜와 정감과 능력이 친히 개입된 살아 있는 산 성경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이 아이 중, 어느 쪽이 진정 예수님의 말씀을 참되게 해석하여 풀이하고 가르쳤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교재에 적힌 내용대로, 임명받은 직분대로, 싫든 좋든 가르쳐야 하고, 이 아이는 자진하여 신이 나서 그냥 감추어 둘 수 없는, 참고 견딜수 없는, 말하지 않고서는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아 견딜 수 없어서 선생된 나에게조차 찾아와 전하는 그런 전도를 하니, 어느 누가 참되게 예수님의 말씀을 전한 전도자이며 또 참된 선생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지키고 순종하는 자에게만 참되게 해석되고, 또 성령은 이런 전도자를 통해 전도받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주십니다. 이런 전통적인 사도 시대의 전도 방식을 외면한 오늘날의 신학자들과 그 제자된 목사들을 보십시오. 마귀처럼 수십 년, 수백 년 동안 죄된 인간의 심성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 해석하며 온갖 학구적인 용어만 남발할 뿐, 예수님의 말씀을 한번도 제대로 따라 실행하지 않고 오직 책상머리에 앉아 사색하고 연구한 뜻만 전하고 가르칩니다. 이 때문에 오늘날과 같은 불순종(반역)의 자식들만 대량으로 양산해 두고 천여만 명의 신자 운운하며 교인수가 많은 교세만 자랑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깝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제2의 종교 개혁! 그것은 그 잘난 성경 해석의 신학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발 하나님(성령)의 말씀을 아는 대로 지키고 순종하십시오. 그리고 그 지키고 순종하고 난 후에 하나님이 역사해 주시는 그 사건이 바로 그 말씀의 참된 어원이 되고, 해석이 되고, 설교가 됩니다. 이런 참되고 유일무이한 성경 해석을 오늘날의 신학자들이 한낱 신앙 간증이라는 한 단계 낮은 차원의 전도(설교)로 일축해 버립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터득한 그 잘난 성경 해석(신학)을 중심 삼고 정금 같은 실천 신앙을 함부로 하대해 무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회개하고 성경 말씀을 옛 사도와 성도들처럼 믿음으로 지키고 실행하는 것 이외에는 그 어느 신신학으로도 교회 개혁과 신앙 계획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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