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루의 유언, 동서(東西)화합
성주목사의 일기, 성주성전투는 1592년 8월 19일과 20일 "난중잡록"을 인용한 김강식(한국해양대교수 논문에서 8월 19일과 20일) 일기에서 "주군(州軍)이 이미 북문에서 접전하고 있는데.....나도 제장이 있는 곳에 함께 있었다.
합천군은 서문밖에 있는데.....거창군은 뒤에 있고 대장 김면이 영솔하고 왔다"라고 적고 있는데 반해 성주군지에서는 "아군측에는 의병장으로 김면, 정인홍, 임계영이, 관변인물로 운봉현감... 구례현감... 도체찰사 정철(전라도를 말함), 경상우감사 김성일(이때 김성일은 초유사이며 9월 5일에 김수의 후임으로 경상감사가 되었다)로 기록,
일기는 19일에 "성주의 군사가 앞장서서 나가서 싸웠으므로 총탄에 맞은 자가 더욱 많았고, 업혀서 나오는 자가 줄을 이으니 그 참혹한 모습은 눈으로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중앙군대의 대규모 방어전 이랄 수 있는 상주전투(이일)와 충주 탄금대 전투(신립) 추풍령 전투(조경)에서 모든 조선군이 전멸하였다.
설(세루)의 부대만이 살아 남아서 도깨비 모양의 방패를 하고 기병을 부대로 만들어 죽지 않고 성주성 전투에 선봉을 맡았든 것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로보인다.
꿩이나 참새를 잡는 조총을 든 왜놈들을 무서워하는 설(세루)의 부대에 비해 조선의 모든 관병들의 용맹은 하늘을 찌를 기세지만 전장에서 모두 엎혀나왔고 이내 거의 모두 죽었다. 당시 선비들이 왜놈들이 쏘는 조총에 사람이 죽지 아니 함에도 배설은 우스꽝스러운 방패를 하고 기병을 위주로 하고 있음을 개탄하고 있지만, 실제 전투 기록들에 보면 대부분 조선군이 싸워 보지도 못하고 적들의 총알받이로 일방적인 죽었음을 알 수 있다.
지도자들의 거짓말에 속아서 용감히 사지로 총알 받이를 하려는 용맹한 조선인들의 충성심이 설(세루)과 비교 된다. 난중 잡록 징비록 등에서 임진왜란의 전투에서 패배함은 배설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여러 구절이 있다. 심지어 "고래 잡이를 위해 거북선을 숨겼는데, 이순신 장군이 찾아 내었다고 까지 기록 되어 있지만," 사실은 김억추 장군의 현무공 실기에 의하면 배설은 두꺼운 목재를 이용 배를 개조하였는데, 이것이 이순신 장군의 승전 원인이 주효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排泄将軍の幽門(遺文)セルの伝説
<夕日(夕陽)のドアの外に道は東西(東西)に分かれていた>
- 東西 -
夕陽 之 門
路 東西
兩家 之 好
萬福 之 源
<東西和合だけが国の復興の源である>
東西両家(兩家之好萬福之源)という句である。
現在もこの文句は、宗家の子孫価のアーカイブされた魂ことよく保存されている。同人とソが調和しなければなら国に満腹に来る意味に解釈する。激しい党争をなぞらえ書いた市区に子孫に家庭国和合の重要性を悟らせて与えようとしたものである。
세기의 전투 부상현 전투 개요(1592.7.7)
세루(배설)는 총무부장으로 임진왜란에 참전 상주(이일), 탄금대(신립), 추풍령(조경) 전투에서 패배한 후 추풍령 김천 일대에서 잔병들을 규합 유격전을 감행했다가 성주 부상현(扶桑峴)서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방한을 위해 전선을 시찰한 관병위(구로다 요시타카) 일행이 한양으로 가기 위해 개령(開寧)에서 북상하는 구로다 요시타카. 도쿠가와 히다테, 다테 마사무네.(이에야스참모) 하시바 히데카츠(일본측 조선왕)를 급습하였다.
이 전투가 매우 중요한 이유로 많은 일본군 지휘관들이 사망하고 부상을 입은 것으로 하시바 히데카츠는 큰 중상을 입은 채 성주군수륜면 매화원에서 부상자들이 살기위해 치료를 받다가 결국 남으로 도주 중에 칠천(거제)량서 10.14일 밤 하시바 히데카츠는 병사했고, 구로다 요시타카는 오른 쪽 무릅이 부러졌으며, 다테 마사무네는 눈깔 하나를 잃었다고 한다.
일본군은 전투에서 일본군이 무서워 도망친 비겁한 적장에 대해서는 자객을 보내서라도 가족들까지 무자비하게 살육했으나 용맹한 장수는 사후에 제사를 지내주고 그 가족들을 헤치지 않는 나름의 일본 전국시대의 통일을 뒷바침할 무사도를 지니고 있었다.
세루의 부상현 전투 1592년 7월 7일
조선측 성주 의병장 배덕문
부장 세루(배설) べせる 부장 배즙 성주 일대 향군과 의병군 약 2.000명
일본군 규모
제9군 대장 羽柴秀勝 하시바 히데카츠 (제6군 군장 겸) 13.000명
세루에게 7월 7일 전사한 지휘자들 명단
지휘관 黑甸句沈 구로다 분신 휘하 지휘관(구로다 요시타카의 동생)1, 加藤上月 2, 黒田 九 3, 福島 心附 4, 小早秀包 5, 宇喜多秀勝 6, 毛利上月 7, 佐竹心附 8, 小西上月 외 20명의 장수 약 20여 명의 일본군 지휘관들이 7.7 ~8월 25일 사이의 대결 투에서 추가로 전사 함
부상현결투 부상자들羽柴秀勝 하시바 히데카츠, 다테 마사무네 伊達 政宗, 黒田孝高, 외 약 200여 명은 성주군 수륜면 매화원으로 후퇴 부상 치료를 위해 매화원에서 약 1만5천여 병력 중에 약 2.000여 명 이상이 주둔하며 하시바 히데 카츠의 병을 치료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한 왜군들의 노력에도 불구 병세 가 깊어지고 세루를 잡을 가능성이 히박 해 지자 그해 9월 고바야 카와 다카게에게 군대를 넘기고 거제도로 급히 이송 되었다가 결국 거제도에서 사망하였다.
세루의 지휘를 받는 종전 추풍령 일대에 패잔병들로서 도깨비 문양의 직경 50센티 구모의 방패와 죽창으로 무장하고 부상현에서 매복 하고 있었다. 구로다 요시타카 제9군 대장 하시바 히데카츠 일행을 섬멸하게 된 전투이다. 이 전투의 패배로 임진왜란을 지휘하던 일본군 수뇌부가 실종되고 제9군은 고바야카와 다카케로 대장이 교체 되었다. 뿐만 아니라 경상도 일대의 일본군 지휘라인이 붕괴되어 임진왜란의 수행이 불가피 해졌다.
대구 - 구미 - 선산 - 상주 - 문경- 조령 또는 대구 - 구미 - 금산(김천) - 추풍령을 잇는 일본군 주보급로를 지키는 요충이었기 때문에 이 성주 성을 탈환하면 일본군의 보급에 막대한 차질을 줄 수 있었다. 의병들과 일전불사의 대군이 마주하고 있었고, 끝내 배설은 일개 의병으로써 적본진을 괴멸시켜 임진왜란 개전 초기에 육상 보급로를 완전 차단하고 군량미를 몰수하여 조선의 백성들을 살리므로 경상일대의 안전과 대구의 인구를 유지 할 수 있게 했었다. 물론 호남인의 시각에서는 개시키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성주성의 점령부대는 하시바 히데카쓰의 제 9군이었는데, 부상현 전투에서 べせる 에게 부상을 입은 하시바 히데카츠는 매화원에서 치료를 위해 주둔하다가 거제도로 이송되고 8월 11일자로 제 7군의 모리 테루모토 휘하 부장 가쓰라 모토쓰나 1만 병력과 교대하여 경상우도(右道)일대 일본군이 모두 집결하여 총 2만명이 넘었다.
김성일은 김면, 정인홍 등의 의병군이 성주를 공격하도록 하는 한편 도체찰사인 정철에게 병력 증원을 요청하여, 운봉과 구례의 관군 5천여 명을 지원받고 화순에서 기병한 최경회와 임계영 의병군이 합세하여 관군의 지원군과 기존 병력을 합하자 총병력이 2만여 명에 육박하는 조선 일본 주력 부대 단위의 전면전 이 있었다.
세루(배설)의 방패 기병부대는 부상현 전투의 승기를 잡고 계속 남진하여 임진왜란 최대의 병력을 이끌고 참전한 오대로의 모리 테루모도의 적 본진을 돌파하는데 성공한다. 모리 테루모도는 놀란 나머지 전의를 상실하고 전투를 기피하고 가토와 고니시에게 전선 최전방으로 보낼 식량을 방치하게 되는데 1592년 8월을 기점으로 최전방의 가토 부대의 식량 보급선이 끝어진 것이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난다는 명분으로 모리 테루모토는 조선에서 도망치고 세루와의 대결을 적극 회피했다.
왜란 당시 배설이 칠천량 부산포 해전에서 조정 간신들의 유인에 빠져 패배 한 이후 호남의 여러 도시들 (금구 김제 남원 등등)의 호남 백성들이 전원 학살 되고 단 한명의 사람도 살아 남지 못 한 것과 경상도 구미 선산 의성 공산(대구) 부산 인구가 보존 된 것은 의병들의 활약 때문이었음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었고, 전쟁 중에도 경상 북부지역 배틀산 천생산 구미 금오산 등지에 의병들의 보호 속에 양잠과 산물을 생산한 활동이 했던 것도 관군이 아니라 의병들의 보호로 가능했었다.
일본 종군 스님 케이넌의 일기에도 정유재란으로 일본군 14만 대군이 부산으로 들오 오는데. 조선의 수군들이 다대포에서 일본군 대장선 8척을 격침하고 엄청난 피해를 입혔고, 조선 수군들이 기세가 올라 밤에 기습할 것이라고 모두 경계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전투가 바로 웅천 해전에서 배설이 수많은 적선을 불태우고 적의 14만 대군을 부산 다대포로 쫒아낸 전투를 말한다. 이 전투에서 일본 나고야서 공수된 식량 200섬을 획득하였는데 일본의 대부분 식량 선박 약 600여 의 소형 선박들이 격침되었다.
일본 종군 케이넨 일기 해석
1597년 7월 8일 일본군 대부대가 상륙을 위해 김해군 가락면 부근에 접안하려고 할때 배설의 경상 우도 수군이 나타나서
지금 김해군 가락면 죽림리근처에서 조선수군이 나타나 가고시마 사츠마의 배 8척을 빼았고 (식량 선박 수백척을 )
불질러버려서 부산해로 후퇴하였다. (조선 수군들은 기세가 올라 소리를 지르고)
일본군 대장들은 긴급히 전세가 불리하여 부산포로 부대를 이동하고 밤에 조선 수군(베세루)가 기습할 것으로 판단 불안에 떨며 밤을 지새운 것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이 당시 배설 장군의 작전대로 한산으로 후퇴하거나 수심이 깊은 바다로 회귀해서 다음 작전을 펼쳤더라면 일본군은 아예 상륙을 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랬다면 지금 전라도의 인구가 경상도 보다 훨씬 만았을 것이다.
정유재란의 시작은 이미 임진왜란하고는 다른점이 배세루라는 특출한 조선 수군이 일본군 14만 대군을 위협한 것을 알 수 있고 이미 일본군은 전의가 꺽였었다. 왜군들이 전라도로 진격하면서 모든 주민을 완전히 살육할 수 밖에 없었을 이유는 바로 군량미가 없었기 때문에 호남에서 모든 민간인을 닦치는 대로 죽인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중국측 기록,
칠천량해전에서의 배설을 찬미하는 내용은 평양의 김일성종합대학 도서관에 소장된 《임진록》한자필사본을 중국의 한국어전문가 워이쒸썽(韦旭升)이 표점부호를 찍고 정리하여 출판한 《항왜연의(抗倭演义)》에만 나온다. 우리글 《임진록》들에는 배설찬미가 없다는 점이 특이하고, 여기서는 중국어로 인쇄된 그대로 인용한다.
“元均独坐船旁,抚臂长叹。俄而战退,了无影迹,或云投降,或云死贼。右水使李亿棋投水而死。左水使裴举与将士数百收其战船,且斗且战,为殊死战。却倭船而出逃走,呼居民急避乱卒。”(《워이쒸썽문집(韦旭升文集)》2卷,中央编译出版社중앙편역출판사 2000년 9월 초판1쇄, 544쪽)
우리 말로 옮기면 대체로 이러하다.
“원균은 홀로 배가에 앉아 팔을 치며 길게 탄식하더니 잠시 후 싸움에서 물러나 자취가 사라졌다. 혹자는 투항했다 하고 혹자는 적들에게 죽었다고고 했다. 우수사 이억기는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좌수사 배거는 수백 명 장사들과 함께 그 전선들들 거두어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 왜선을 물리치고 빠져나와 달아나, 주민들을 불러서 급히 어지러운 군졸들을 피하라고 일렀다.”
민간에서 생겨난 소설들이 민심을 일정하게 반영함을 고려할 때 경상우수사 배설의 행위에 기초해 생겨난 “좌수사 배거”에 대한 묘사 배설장군을 말해준다...중략..(출처:자주민보)
배설 장군의 도깨비 문양 방패는 추풍령 전투 이후 배설을 상징하는 경상우도 배설군대의 전투장면,
당시 조선수군들은 대부분 단순 판옥선임

배즙장군의 실제 전투장면 (일본 종군화 조선전역해전도)경상 우도수군이라는 깃발이 있다.

일본군 15만 대군이 부산항에서 고전하고 웅천전투에서 패전한 그림으로 보인다. 칠천량 기습 전투에는 이런 전투가 불가능하다는 점으로 일본군이 정유 재란에 패배한 웅천해전을 그린 것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웅천해전은 일본군 모든 장수들과 치른 전투의 승리로서 충분히 많은 장수들 휘하에 화가들이 있을을 수 있다. 개별 전투에서 장수들이 화가를 대동하기란 쉽지 않다.

배즙장군의 실제 전투장면 (일본 종군화 조선전역해전도)경상 우도수군이라는 깃발, 당시 조선군에서 방패를 보유한 군대가 없었으며, 배설의 군대만이 방패와 죽창으로 무장되었고, 진주성을 목책으로 쌓은 기록으로 보아서 배설 장군이 오다 노부나가의 통일과정의 목책 전투를 알고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추정이 있다.

한산대첩이나 부산해전 명량대첩 같은 지엽적인 소규모 부대와 소규모 전투에서 일개 장교들이 화가를 대동할 수 없다는 점이다. 최소한 일본군이 부산항에서 배설의 양동작전에 걸려 고립된 상태에서 조선 수군의 공격을 받은 웅천해전과 그 이후의 조선수군과 일본전체 대군의 전투 그림임이라고 추정된다.

아래는 배설 장군에 대한 기사ㅡ ---
| 성주의 역사인물 '배설' 그를 재조명하다 1회 |
임진왜란시 성주성 수복의 선봉 진주 백성들은 거사비까지 세워줘 어디에도 알려지지 않은 공적들 |
| 2016년 05월 03일(화) 09:56 [성주신문] |
|
게재순서 1회 : 임진왜란과 배설 2회 : 배설과 칠천량 전투 3회 : 배설과 이순신 4회 : 배설의 최후 5회 : 영화 '명량'과 배설
예로부터 성주군은 걸출한 인물들이 많은 고장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왜곡된 진실로 오명을 쓰고 있는 인물이 있다. 바로 배설 장군이다. 배설은 임진왜란 당시 수많은 공을 세웠고, 특히 경상우수사로서 많은 전투에서 선봉으로 활약한 장군이다. 그러나 그의 평가는 사실과 달리 크게 엇갈린다. 이순신 장군을 다룬 영화나 드라마에서 배설은 비겁자로 다뤄지기 일수다. 특히 영화 '명량'에서는 이순신 장군에게 사사건건 반기를 들고, 암살계획을 세우는 악인으로 묘사된다. 이에 이번 취재를 통해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고, 배설이란 인물을 재조명하고자 한다.
|
| | | ↑↑ 경북 성주군 대가면 명천리 수름재에 소재한 배설 장군 묘소 | | ⓒ 성주신문 | | 서강 배설에 대해서는 예상외로 알려진 것이 없다. 그래서 영화나 드라마에서 비춰진 배설 장군의 모습을 사실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그의 발자취를 쫓다보면 이런 평가에 의문이 생긴다. 배설은 1583년(선조 16년) 무과별시에 급제해 변방 방어활동에 주력했다. 그러던 중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방어사 조경을 따라 남쪽으로 출정하게 됐고 황간, 추풍령 등지에서 격전했으나, 왜군의 전투력에 밀려 패하게 된다. 이후 배설은 향병을 규합해 왜적과 대항했으며 초유사 김성일의 가장으로 활약했다. 그러던 배설이 두각을 나타낸 것은 의병장인 아버지 배덕문을 도와 성주를 수복하면서다. 배설의 가문은 3대가 왜란에 참전한 호국 가문이다. 배설의 아버지인 배덕문은 68세의 나이로 성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또한 동생 배즙은 배설을 따라 칠천량 전투에 참전했으며 노량해전에서 전사했고, 배설의 아들인 배상룡도 의병장으로 활동한 바 있다. 임진왜란 발발 이후 김해에 상륙한 흑전구침(黑田句沈)은 거창, 고령을 거쳐 음력 4월 27일 성주목사 제말을 죽이고 성주를 점령한다. 이에 배설의 아버지인 배덕문은 68세의 나이로 의병을 일으켜 성주성을 수복한다. 이때 배설은 의병을 일으킨 아버지를 도와 용맹을 떨쳤다.
|
| | | ↑↑ 흑전구침을 베었다는 부상진의 현재 모습 | | ⓒ 성주신문 | | 특히 부상진(현 초전~김천 방면)전투에서는 흑전구침의 목을 벴으며, 개산진(현 김천 개령)에서는 적장 평의지(平義智)를 격파하고, 무계진까지 출정해 적을 완전히 평정하는 공을 세웠다. 이 승리로 경상우도 낙동강 서쪽 지역이 수복되면서 왜군은 육상 보급로 하나가 차단되는 피해를 입게 된다. 배설 장군은 이러한 공을 인정받아 1593년 행재소(行在所: 임금이 임시로 머문 곳)로부터 합천군수를 제수 받았다.
이후 왜적이 부산포 일대에서 소란을 피우자 이를 진압하기 위해 부산첨사를 거쳐 동래부사로 발령받는다. 배설은 부산첨사로 활약하며 왜군의 국경 왕래를 차단했고, 동래부사 때는 관할 구역을 임진왜란 전과 같이 평온하게 유지하는 실적을 남긴다.
|
| | | ↑↑ 배설 장군의 공적을 기리는 거사비가 세워졌던 진주성 | | ⓒ 성주신문 | | 부산의 민심을 수습한 배설은 진주목사에 제수돼 진주로 향한다. 진주목사가 된 배설은 지역민들에게 덕을 베풀고 바른 정사로 고을을 평안하게 해 진주 백성들의 민심을 사며 덕망을 쌓는다. 조선실록의 기록을 보면 배설을 향한 진주백성들의 마음이 어떠했는지 살펴볼 수 있다. 남해안이 왜적의 발호로 소란해지자 우의정 류성룡은 배설을 경상도 수군절도사로 천거했으나, 진주 백성들이 배설의 전출을 막아 한 달이 지체되고 만다. 또한 진주 백성들은 배설이 떠난 뒤 배설을 기리기 위해 진주거사비를 세웠다. 성산 배씨 진사공파 29세손 배재관씨는 "진주 백성들이 세운 진주거사비는 1910년 한일합병 이후 일본인에 의해 훼손됐다"며 "일본이 임진왜란 당시 적장을 죽이고 왜군을 괴롭힌 배설 장군의 공적을 훼손하기 위해 벌인 일"이라고 전했다. 1595년 배설은 경상도수군절도사 겸 부원수로 발령받아 병사들과 숙식을 같이하며, 군을 정비하는 등 군의 사기를 높이고자 노력했다. 류성룡과 이원익은 이에 깊이 감명해 '나라의 간성'이라고 칭송했다. 하지만 이러한 배설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배설이 군 조직의 폐단과 시국을 논하는 건의문을 올렸고, 이를 권율 장군이 문제 삼으면서 밀양부사로 좌천된 것이다.
|
| | | ↑↑ 배설 장군이 선산부사 시절 중수한 금오산성 | | ⓒ 성주신문 | | 이어 선산부사로 전출된 배설은 이러한 수모 속에서도 나라를 위해 업적을 남긴다. 바로 금오산성을 중수한 것이다. 배설은 그동안 방치됐던 금오산성을 정비하고, 오랜 농성을 위해 9정7택(9개의 우물과 7개 못)을 팠으며, 백성과 군사를 위한 양식 저장창고 혜창을 건설했다. 배설이 중수한 금오산성은 왜군의 북진을 막고 왜란 7년을 종식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으며, 병자호란 이후에는 3천500명의 병력이 상주하는 군사적 요충지로 그 중요성을 더하게 된다. 배설 장군의 이러한 행적은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기록들이 많이 누락됐기 때문이다.
|
| | | ↑↑ 배설 장군이 축성한 금오산성 축성 표석 | | ⓒ 성주신문 | | 실제 금오산성 표지판 어디에도 배설에 대한 언급은 없다. 금오산성의 대혜폭포 아래 바위에는 '善山府使 裵楔 築 金烏山城 穿 九井七澤(선산부사 배설 축 금오산성 천 구정칠택)이라고 세긴 글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금오산성 어디에도 배설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없다. 단 칠곡문화대전에서만 이런 사실을 전하고 있다. 이런 평가는 미디어나 매체에서 노출된 배설 장군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서 발생한 현상들로 볼 수 있다.
KBS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이나 영화 '명량' 같은 이순신 장군을 중심으로 한 매체에서 배설 장군은 전쟁이 무서워 도망치는 비겁자로 그려진다. 임진왜란 당시 수많은 공을 세운 배설 장군이지만 그 공에 대한 언급은 없다.
|
| | | ↑↑ 경북 구미시 금오산 입구에 세워진 금오산성 사적비 | | ⓒ 성주신문 | | 배재관씨는 "역사기록으로 살펴봐도 배설 장군은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고 누구보다 열심히 나라를 위해 싸워 온 분"이라며 "하지만 왜곡된 시선을 가지고 공적을을 인정하지 않으며, 왜곡된 사실이 진실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아 가슴아프다"고 말했다.
이에 다음 편에서는 배설의 평가를 엇갈리게 한 정유재란과 칠천량 전투 당시의 배설 장군의 기록을 살펴보고 재조명해 보기로 한다. 취재1팀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
|
임호동 기자 sjnews1@naver.com
- Copyrights ⓒ성주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
2016.06.08 | 성주신문 세운 성주의 도천사에 배향됐다. 뛰어난 인재의 아쉬운 죽음이었다. 배상룡이 벼슬을 거부한데는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아버지인 배설...
2016.05.31 | 성주신문 배설이란 인물에 대해 자세히 고증되지 않은 일부 소설, 드라마, 영화 등의 매체에서 다뤄진 배설의... 배설 장군의 후손들에 대해 재조명해보고자 한다. ...
2016.05.03 | 성주신문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고, 배설이란 인물을 재조명하고자 한다. 서강 배설에 대해서는 예상외로 알려진 것이 없다. 그래서 영화나 드라마에서 비춰진 배설...
2016.05.24 | 성주신문 배설이라는 인물의 평가를 낮추는데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이다. 다음회에서는 배설의 최후를 살펴보고, 그가 사후 신원이 회복되는 과정을 재조명해보고자...
2016.05.17 | 성주신문 것을 주장한다. 하지만 배설 장군은 살아남은 배... 당시 성주를 비롯해 진주, 부산 등에서 공을 세우고, 금오산성을 중수하는 공을 세운 배설은 칠천량...
선조실록, 국가의 공식기록원인 사관(사관(史官))은 선조 32년,즉 1599년 권율이 죽자 그에 대해 『영의정 권철의 아들 권율은 성품이 본래 우둔하고 겁이 많아 위망이나 지략이 일컬을 만한 것이 없었다. 단지 행주에서 한차례 이겨 갑자기 큰 이름을 얻게 되어 도원수가 됐다. 적진과 대치하면서 한가지 계책이라도 내어 꺾지 못하고 오히려 적이 모습을 보이기도 전에 겁나서 늘 멀리 피하곤 했다』 사관은 원균이 전사한 칠천량해전의 패인도 원균의 반대를 무릎쓰고 무조건 싸움을 독촉했기 때문이라고 하고 있어도 위대한 조선은 당쟁에 승리하면 가장 먼저 역사를 왜곡하는 것이 승리자의 전리품이므로 선조 수정 실록에는 정 반대로 기술했다. 이것이 우리의 역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