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충만한 사람
우리 성도 된 이들은 ‘성령 충만한 사람’이라는 말을 하곤 합니다. 문자 그대로 ‘거룩한 영으로 가득 찬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어려운 말은 아니지만 더 쉽게 신앙생활의 일상에서 풀어 보자면 ‘믿음이 견고한 사람’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 무엇이라도 죄 된 것에 ‘미혹되지 않는 사람’ ‘담대하여 어디에서든지 복음의 진리를 전하는 사람’ 그리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자신의 믿음을 지키는 사람 등등의 이미지가 떠올려지는 사람을 칭찬으로 부러움으로 표현하는 말입니다.
그 모두가 정답입니다. 돌아보면 예수님이 그러하셨고 제자들도 그러하였으며 이후에 모든 믿음의 선현들이 그러하였기에 주님의 보혈의 모습으로 이어지는 제자들의 순교의 역사가 피로 씌어졌고 그렇게 이어지기를 계속하면서 지금 우리에게 까지 복음을 전해지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악한 영과 세상의 불의에 항거하며 자신의 믿음을 지키고 기꺼이 죽었습니다. 두려움 없이 담대하여 주님의 말씀처럼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나섰습니다. 참 감사한 일이고 이 분들이야 말로 ‘성령충만(聖靈充滿)’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러한 분들이 믿음의 행보를 동적(動的)인 것으로 볼 때에 우리가 돌이켜 보아야 할 것은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정적 (靜的)인 믿음의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작금의 성도들은 자칫 이를 간과합니다. 즉 다수의 성도들은 정적(靜的)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며 그들은 동적(動的)인 신앙생활로 나아가는 이들의 조용하고 든든한 받침대와 후원자의 역할을 역시 그렇듯 조용히 하고 있는 것이지요. 예를 들면, 선교사로 나가는 이들은 동적인 것이며 이를 지원하고 기도하는 이들은 정적인 모양입니다. 즉, 직접 가지는 못하지만 기꺼이 나아가는 이들을 돕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비롯하여- 베드로 야고보 등 거의 모든 제자들, 그리고 속(續)사도들 또 루터, 칼빈, 낙스 그리고 웨슬레 같은 이들은 파란만장한 기독교 역사 속에서 동적인 신앙과 믿음의 삶을 살면서 온갖 핍박과 고난을 당하며 기꺼이 죽음으로 순교도 하였습니다. 담대하고 믿음에 반(反)한 것들과 타협하지 아니하고 믿음과 진리를 지키고 수호하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어두운 세상’에 ‘빛의 기초’를 놓았으며 수많은 빛들의 점화를 이어가게 하였으며 그 결과 그야말로 ‘이 세상 끝까지’ 복음이 전파 되어서 지금은 아주 오지방의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세상 어디를 가든지 ‘예수’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습니다. 즉, 믿고 안 믿고의 문제에 당면은 하였을망정 그 이름만큼은 누구나 다 들어 알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복음은 그렇게 전파되었고 또 지금도 전파되고 있으며 그 앞줄에 ‘담대함으로 무장한 성령충만-’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공로가 크고 따라서 하늘나라의 상급도 클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앞줄’은 아니고 ‘뒷줄’ 곧 후방에 서있는 모양을 하고 있지만 ‘조용함으로 지원하는 성령충만-’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사람들이고 ‘골방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이며 있는 자리에서 은밀한 중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으로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이들 역시 ‘성령충만’한 사람들입니다.
즉, ‘사람들에게 칭찬 듣고 하나님께 사랑 받는-’ 사람들로서 ‘거룩한 영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며 어긋남이 없는 사람들인데 곧 순종함으로, 감사함으로, 찬송함으로 나아가는 이들이며 주어진 사명을 그렇게 감당하는 것으로 주어진 본분을 다하는 이들입니다. 입술의 말이 없고, 삶의 행보가 조용하지만 바라보는 이들에게 본이 되고 덕이 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말없는 믿음의 행보로 ‘성도’의 명찰을 더욱 빛나게 하는 이들이며 있는 자리에서 빛이 되어 복음의 진리로 사람들을 나아오게 하는 가교(架橋)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에게 사랑 받고 또 존경 받아야 하기 때문에 늘 자신의 ‘육정을 쳐서 다스리는-’ 것으로 하나님 손에 들려진 ‘은혜의 도구’로서의 부족함이 없도록 힘쓰고 애쓰며 열심히 노력하고 경주(傾注)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쓰임 받는 그릇으로서의 품성(品性)을 이루게 하는 것의 앞줄에 ‘순전과 정직’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칭찬하신 ‘욥’의 품성이지요.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욥01:08)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섬기는-’ 이들이 성도이지만 악에서 떠나고 미혹들을 이겨내려고 한다면 하늘로는 ‘하나님께 대하여-’ 또 세상으로는 ‘사람들에 대하여-’ 순전하고 정직하여야 함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즉 동적(動的)으로 쓰임 받든, 정적(靜的)으로 쓰임 받든 하나님의 사람들이 가져야 할 품성은 ‘순전과 정직’이며 거기에서 ‘덕(德)의 열매’가 풍성히 맺어지게 되면서 복음의 지경이 확장되는 결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지요.
성도된 이들의 대부분은 정적인 자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목회자나 선교사처럼 공인된 ‘주의 종’들이 아니기에 성도이기는 하지만 세상의 직업을 가지고 세상의 일들 속에서 세상 사람들과 섞여 살아갑니다. 다만 믿음을 지키며 예배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지요. 일주일 중에, 하루 중에 생업 곧 ‘먹고 사는 일’에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합니다. 물론, 이것은 잘 못된 것이 아닙니다. 열심히 일하여 얻은 소득으로 가족들과 함께 즐겁고 행복한 삶을 감사함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그렇게 정하여 놓으신 일이고 모든 인류가 자신의 날들 속에서 날마다 계속하여야 할 일입니다.
다만 그렇게 수고하고 땀을 흘리며 살아가는 중에도 하나님께 칭찬 들은 욥처럼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실 때에 또다시 자신들만 남겨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는 제자들에게 “또 다른 보혜사 성령께서-” 오셔서 너희들과 함께하시고 지켜주시고 인도하여 주실 것을 말씀하심으로 ‘성령의 시대’가 활짝 열렸습니다. 이에 열심을 더하며 믿음으로 더욱 순종하는 이들을 일컬어 ‘성령충만’한 사람이라는 구분이 생겨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충만’을 동적(動的)인 모양에 국한하여 말들 합니다. 그러나 정적(靜的)인 모양 가운데서도 자신의 믿음을 순전함과 정직함으로 지키는 사람이라면 바로 ‘성령충만’한 사람입니다. 조용하고 작은 모양이라도 거기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작은 성냥 불빛 모양처럼이라도 드러낸다면 성령충만한 사람인 것입니다. 오른 손으로 선을 행하되 왼손이 모르게 하는 사람, 열심히 기도를 하지만 골방에서 이기에 아무도 알지도 알아주지도 않는 사람, 온유함으로 양보하고 자꾸만 더 낮아지기에 사람들에게 주목 받지도 못하고 오히려 비웃음을 받는 사람 역시 ‘성령충만’한 사람입니다.
누구나 다 ‘사도’일 수 없고, 누구나 다 ‘스승’일 수 없고 누구나 다 베드로나 바울 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천 만 명이라는 큰 무리의 성도가 우리나라에 있지만 자신의 삶의 전부를 하나님의 사역에 드리는 이는 작고 적습니다. 하지만 성령은 앞에서의 동적(動的) 뒤에서의 정적(靜的)을 가리지 않고 견고한 믿음의 터 위에서 순전과 정직의 모양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문자 그대로 ‘충만’함으로 채워주십니다.
조용해도 괜찮습니다,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뛰어다니지 않아도 교회에서 직분이 없어도 상관이 없고 가진 것이 없어서 나누고 베풀지 못해도 하나님은 나무라지 않으십니다. 다만 어디에 섰든지 순전과 정직이 일으키는 덕성의 모양을 잃지 마십시오. 뿌리 깊은 나무는 항상 그 자리에 평생을 서있고 움직이지 않지만 힘들고 지친 이들이 찾아와 쉴 수 있는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지요.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를 조용한 안식의 ‘은혜의 쉼터’로 만드는 사람이 ‘성령충만’한 사람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입니다.
산골어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