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최고의 코메디언 고종황제,조선인 위안부
탈영병 배설처럼 나라를 구해달라며 대영제국 인 토마스에게 고종황제와 민비 대원군이 부탁하고 배설이란 탈영병 이름을 하사했다,
그리고 왕후는 일본 건달들에게 살해되고 조선인 소녀들은 일본군 성 노리개로 끌려가고 장정들을 탄광에 끌려가서 죽을 때까지 일하다가 죽었다는 것은 사실일까?
한편에 코메디 탈영병 배설처럼 나라를 구하라고 하니 나라가 망할 수밖에 .
이순신장군처럼 구하라고 했었더라면 ~~~
배씨 문중에서 부상진 전투일을 7월7일로 기록하고 있으나,
일제 시대 배설 왜곡이 1592년 9월 7일 부상진 전투에 집중된 점을 본다면, 조선은 음력을 사용했으므로 일본이 왜곡 하려는 9월 7일 부상진 전투에서 일본의 하시바 히데카츠와 다테마사무네, 구로다 요시타카 외 24기사가 전멸된 것으로 추정될 수도 있다. 문중에 기록을 신뢰하는 이유는 8월 12일 하시바 히데카츠가 9군 대장에서 모리테루 모토의 부장 고바야카와와 전격 교체된 사실이 종문에 기록과 일치한 부상진 전투, 무계진전투, 1차 진주성 외곽전투에서 최대규모의 일본군이 척살된 것을 어떻게던 감추고자 하는 것이다.
고종과 민왕후 대원군 배설장군 원한을 풀려고했다?
모든 사람들이 잊어버린 320년 이 지난 시점 고종과 민왕후는 1873년 종묘에서 “배설 병조판서 가중하는 “해원식”의 제사를 올렸다. 그리고 유림에게 반포했다. 배설 장군은 1873년(고종 10년)에 다시 자헌대부, 병조판서에 가중한다. 조선 왕조가 진 빛을 갚겠다는 생각이었을까? 그러나 끝내 명성왕후가 일본인들에게 살해되어 시신이 강제로 화장되고 말았었다.
민황후는 궁전의 곤녕전과 복도로 딸린 옥호루에서 자살됐다. "사바틴이 목격한 궁녀들의 봉변, 미국인 군사고문 다이가 목격한 민황후 봉변 장면, 고종이 거처하던 침소인 곤녕전으로 일본 낭인 오카모도 등이 황제의 침전 용상 우측에서 황제와 순종에게 황후의 거처를 심문하면서 민황후가 양녀로 삼았던 겁에 질린 일본인 소가의 딸을 끌고 와서 민황후 를 묻고 한 여인을 심문하자 고종이 용상쪽에서 신경을 곤두 세우고 완력으로 향하자 오카모토등이 황제의 용포를 잡아 제지하다 용포가 찢어지자 어께를 눌러앉혀 위협을 한다. 순종 태자가 호통치자 상투를 잡아 벽에 내동댕이치고 칼등으로 목을 후려처 기절시키는데 후일 순종이 승하할 정도의 부상을 입었다.낭인들은 궁녀들을 하나하나 폭행하며 옷을 모두 벗기고 애기를 낳은 왕후임을 국부 검사를 하고 황후냐고 일일이 심문한다. 의심가는 상궁 몇 명의 가슴을 칼로 베고 난간 밖으로 던져 버렸다. 이에 러시아 미국 청나라가 항의하자 일본은 민왕후시해사건의 주범인 미우라 공사 외 48명을 히로시마 감옥에 잠시 구치하고 검찰이 조사하여 살인죄의 범죄혐의가 '증거불충분'으로 모두 석방돼었다. 민왕후와 궁녀들이 일본법으로는 모두 자살로 처리 되었다."
배설 장군을 해원하고 추가 증직 시킨 후 고종황제는 영국인 토마스에게 조선을 구해 달라며 ‘배설 장군처럼 나라를 구해달라고 했고, 성과 이름도 영국인 토마스에게 ‘배설’로 하사했다.(19년 #)
3, 구국의 정신 배설 본받기(고종)대원군의 노력

(사진출처:배설기념재단 홈피)
E T (Eernest Thomas )토마스는 16살 때부터 일본에서 살다가 1904년 한국에 왔다. 런던 데일리 크로니클의 특별 통신원으로, 1904년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종군기자로서 입국했다. 일제에 침탈당하는 한국을 보면서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는 대한매일신보를 양기탁과 함께 창간했다.영일동맹의 이점을 최대한 살려 일제에게 치외법권을 내세우며 저항하였으나, 일본 정부가 직접 영국 정부에 압력을 가하면서 결국 벌금과 금고형을 선고받는다.

(사진출처:배설기념재단 홈피)한양에서 양화진까지 끝이 보이지 않는 장례행렬과 연해주 만주 미국에서 성금을 보내어 비문을 만들다.
* 배설 묘비문(장지연)
아! 여기 대한매일신보 사장 배설 공의 묘가 있도다. 그는 열혈을 뿜고 주머귀를 휘둘러서 2천만 민중의 의기를 고무하며 목숨과 운명을 걸어놓고 싸우기를 여섯 해 동안이나 하다가 마침내 한을 품고 돌아갔으니, 이것이 곧 공의 공다운 점이고 또한 뜻 있는 사람들이 공을 위하여 비를 세우는 까닭,...광무 8년 7월 이러라. 가재(家財)를 털어 사용(社用)에 충당하며 용왕매진(勇往邁進)하여 감히 기휘(忌諱)에 부딪치는 말을 직필(直筆)하매 이럼으로써 책책(嘖嘖)한 명성이 널리 세상에 떨치게 되었더라. 필경 남의 모략에 걸려 상해 감옥에 구금되었고 수십일 후에 석방되었으나 이로 인하여 통분한 나머지 병에 걸리게 되어 드디어 다음 해에 영서(永逝)하고 말았으니 때는 곧 1909년 5월 1일이요 나이 겨우 37세라 양화진에 장사지내니라. 임종 직전에 유언하기를 “나는 죽지만 신문은 영속시키어 한국동포를 구호하기 바란다”하였으니 애닯기 그지 없도다. ...가로되 드높도다 그 기개여 귀하도다 그 마음씨여. 아! 이 조각돌은 후세를 비추어 꺼지지 않을지로다. (일제만행으로 깍아버린 비문)
재판과정에서 건강을 해치는 바람에 향년 37세에 심장비대증으로 사망했다. 시신은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장되었다. 하지만 일제는 눈엣가시인 그의 묘비 뒷면 비문을 깎아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후에 언론인 성금으로 그 묘비 옆에 조그만 비석으로 비문을 복원하였다.
임진 왜란의 배설이 역적이거나 탈영병이라면 고종 황제가 영국인에게 모욕을 주었다는 이야기인데, 국난 앞에서 고종황제가 배설의 이름을 부활시킨 것만 보더라도 일제의 역사 왜곡 임을 알 수 있음에도 후손들이 자신들의 선조를 조롱하고 있으니, 조금 지식인이라고 하면 영남 의병장 배설을 비난하는 누워서 침뱉는 이 어리썩음을 어찌하겠는가?
배델(Eernest Thomas Bethell)은 1904년
《런던 데일리 뉴스》지 특파원으로 한국에 온 영국 언론인이다. 한국명은 배설(裵說)이다. 그는 같은해 7월 양기탁(梁起鐸) 등과 함께 서울에서 《대한매일신보》를 영문판 《코리아 데일리 뉴스》을 창간하여 사장이 되었다. 이 신문은 일본의 침략정책을 과감히 비판하여 국민의 의분을 북돋워 배일사상을고취시켰다.
일본의 침략행위를 지상(紙上)에 폭로했다. 일본은 영국인으로서의 치외 법을 이용하여 배일론(排日論)을 앞장서서 이끄는 이 신문을 억압하기 위해 영국정부에 외교공작을 펴 그의 국외추방을 꾀했다.
그 때문에 1907년 10월과 1908년 6월에 서울 주재 영국 총영사의 재판에 회부되어, 상하이에서 3주간 금고형을 받았고, 1909년 서울에서 죽었다.대한매일신문의 위력을, 안중근에게 저격되어 생을 마친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는이렇게 말했다. “이 이등(伊藤)의 백마디 말보다 신문의 일필이 한국인을 감통케 하는 힘이 크다.
그 중에도 일개 외국인의 대한매일신보는 일본 시책을 반대하고 한국인을 선동함이계속되고, 끊임이 없으니 통감으로서 가장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비운의 고종황제는 고심한 후 배설이란 이름을 내렸다. 비운의 장수 배설처럼 꺼져가는 대한 제국을 구해주길 간절히 바라는 뜻에서였다. 잊혀 진 배설 장군에게 고마움의 신원이 고종의 손으로 추가 이루어졌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조국의 풍전등화 앞에서 배설장군의 은혜에 감사의 제사를 올렸었다.
구국의 간절한 염원처럼 배델은 비운의 언론인으로 목숨 건 투쟁으로 비운 속에 운명했다. 한 영국인이 배설장군의 분신이 되어 부귀공명을 버리고 비운으로 명멸해갔다.
한 이방인에게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키고자 한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토요토미 각하는 "다 된밥에 재뿌린 베세루"자나 깨나 베세루 조심합시다. 일본 고등검찰 수뇌부와 테라우치 총독의 배설에 대한 컴플렉스는 광적이었다. 끝 내 파란 눈의 영국인은 비운으로 죽고 말았다.’
일제의 탄압과 억압속에 희망을 잃지 않고 항일 운동의 구심점이 되어준 배델..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한 한마디
"내 눈으로 조선의 독립과정을 보고싶다.. 날 한국에 묻어달라!" 그의 죽음에 애도의 물결이 양화진 묘소까지 인산인해로 애통해했었다. 결코 잊어서는 안될 이름이다.
배설의 돌 비석의 비문을 깍아버린 일제의 만행은 지구상에 그 유례를 찾기힘든 사례이다.
기병 약 1500명의 부대가 적치하(성주)에서 저항 수위를 높여 나가는 중에 7월 7일 하시바 히데카츠(구로다 요시타카)일행이 한양행차 중에 수차례의 접전을 벌여 부상진에서 구로다 요시타카의 하도1점을 빼았으며 구로다 구침을 척살하고 그 수급을 베고 하시바 히데카츠의 갈비뼈 하나를 취하여 중상을 입혔고, (약 20여명의 왜장을 척살했다는 주장으로 일본군 병사들도 200여명 이상 전사하였다)
하시바 히데카츠가 서울행을 포기하고 남으로 퇴각하자 이를 추격하는 전투가 계속되었다.

배씨 종문이 보관하고 있는 세루 장군이 하시바 히데카츠(표주막 문양의 황금부채)를 빼앗고 갈비뼈 하나를 획득 하고,
구로다 요시타카의 (下刀)와 동생 구로다 분신을 척살하고 획득한 구로다 가문의 칼 두 점,
2, 1차 진주성 외곽 전투(출처:명량 왜곡과 진실)
이에 구로다 요시타카는 서울로 쪽으로 가고 하시바 히데카츠는 남쪽으로 일본으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배설의부대가 계속 추격하자 구로다 요시타카는 서울에 도착하여 북상한 군대들을 '세루'를 추격하게 하는데 공식 기록에 9월 26일 북상한 일본군 선봉대를 남하시켜 의병을 소탕(배설을 추격)하게 하였다.
북진한 서울의 군대가 진주성까지 추격하고 김면(배설)의 군대가 부상한 하시바 히데카츠를 쫒는 과정에서 10월 3일경 창원부근에 이러른 가고시마 군대와 5일 경에는 서울에서 내려 온 군대와 나가오카 다다오키(長岡忠興)대장과 모리 테루모토 휘하의 왜군은 진주성 부근에 대치하게 되고 김시민(金時敏)이 지휘한 조선군과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진주성 1차 전투는 경상우병사 유숭인 사천현감 등등 경남 관군들까지 가세하여 진주성 동문 밖에서 전투를 하였으나 일본군이 분대규모의 병력이 대문짝같은 것들로 방패를 쌈아 접근 한 후 조총을 쏘앗기 때문에 성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경상 남도의 병력과 장수들이 손을 쓰지 못하고 10월 6일 모두 전멸하였다.
유숭인 장군은 경상우병사로 촉망받아서 곧 판서(장관)나 영의증에 승진을 앞두고 있는 유망한 장군으로 일본군 침략으로 휘하 병사들이 모두 전사하자 진주성에(조총이 새잡는 총이 아니라는 사실:군사적 지식제공) 합류하고자 했으나 김시민이 거부했다. 당시는 부하가 없는 장수는 지휘권이 없었는데 원균이 배가 몇척 없다고 설움 받았듯이 유숭인도 큰소리로 꾸짖었으나 김시민은 냉정하게 성아래서 유숭인이 죽는 것을 지켜보았을 뿐 식량에 대한 대책이 없었다.
진주성은 외롭게 적에 포위되어 농성에 들어 갔으나, 당시 진주성에 책임자가 없어 김성일이 김시민을 임시로 진주 목사로 임명했기에 김시민은 자신에 상관들인 경상 남도 수령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진주성 안에 식량이 넉넉하지 않아서 적에게 포위 된다면 위험해서 동문쪽에서 외곽 전투를 하게 되었다.
김면이 경상의병대장에 임명되어 설(배설)은 김면휘하의 의병으로 분류되었으나 독자적으로 도깨비방패를 갖춘 기병으로 하시바 히데카츠부대를 추격하는 과정에 진주성 전투가 벌어지는 가장 중심에 있었든 인물이다. 진주성 전투 당시는 임시 합천군수로 정인홍의 의병과 함께 했는데, 정인홍이 공을 세우기를 좋아해서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문중에서 알려져있다.
진주 외곽전투에 의병대장 곽재우(郭再祐 배설 장군의 아들 등암)의 응원 하였다. 이 싸움의 승리로 모든 경상우도 지역을 보존하였고, 일본 침략군이 호남지방을 넘보지 못하게 하였다. 부상진 전투와 지례전투 개산진 전투에 성주성을 탈환하므로 경상 우도를 적으로부터 탈환한 것이고, 허리가 잘린 일본군이 남하하기 시작했다.
배설의 군대는 적이 퇴각하면 추격하고 적이 진격하면 후퇴하는 고도의 기동력과 방패를 가지고 심리전을 펼쳤는데, 진주성 전투중에는 적군이 잠을 자지 못하도록 기병들이 횄불을 들고 소리를 지르며 진주성 외곽에서 외곽으로 부대들이 이동하고 적에 식량부대를 급습하였다.
진주성 전투가 수차례의 공성전으로 패색이 짙어진 이유로 식량이 고갈 된 상태에 거의 모든 지휘관들이 중상을 입은 상태에서 9일 아침에 왜군들은 개산아비(기름종이 사갓을 쓰고 수건으로 마스크를 한 염쟁이:김해 사람들)들을 각부대에 대기시키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일본군이 자신들의 승리하면 모두 코를 배어 염장하는 준비를 하는 것으로 보였고, 성안에 어린이와 노인들이 울음이 그치지 않았는데 공포가 성을 휩쓸었는 중에 이날 대공세로 김시민이 중상으로 스러졌다.
설(배설)은 사태가 위중함을 직감하고 전면적인 9일 낮부터 설(배설)의 부대와 곽재우(배설의 장남 등암 자장) 부대가 진주성 외곽에서 일본군 배후를 위협하고자 하자 일본군은 전군이 설의 부대를 먼저 제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설의 부대와 전면적 전투도중에 설(배설)에게 적의 지휘부의 식량을 탈취 당하고 많은 병력 손실만 입었을 뿐이었다.
배설의 기병 군대가 일본군 외곽에서 9일 밤 자정부터 적의 지휘부에 불을 놓아 적진이 불길에 휩싸이자 놀란 적들이 철군하기 시작해서 새벽녂까지 공세가 지속된 후에 이른 새벽에 대사지를 통해 배설이 진주성에 입성했을때 이미 주민들과 관군들은 식량이 고갈되어 굶주리고 낮빛이 변한 상태였었다고 한다.
그러나 배설의 부대는 기아 상태의 주민들을 독려하고 전투를 주도하였으며 진주성 안에 설(배설)의 깃발과 방패가 보이자 놀란 일본군은 앞다퉈 퇴각하기 시작했고, 일본군이 물러난 이후에 많은 의병들이 계속해서 진주성에 들어 왔다.
배설이 식량을 반입하고 진주성을 지원하였던 주통로 였던 대사지는 삼한 시대에 자연적으로 조성된 것임에도 일제 식민지배시기 1935년 매립을 시작하여 1936년 10월 9일 일본인 읍장인 (山下)야마시다에 의해 매립 준공한 후 진주경찰서와 진주 제1보통학교(지금의 진주초등학교)가 세워져 현재는 대사지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10월7일 (셋째 날)
왜군은 하루 종일 조총과 활로 성을 공격하고 모든 민가를 다 불태웠다. 밤에는 왜군은 붙잡은 아이들을 성 주위에 풀어 소리를 지르게 했다. “한양이 함락되고 8도가 무너졌다. 오늘 저녁에 우리 장수 개산(介山)아비가 오면 너희 장수의 목을 당장 깃대 위에 달 것이다.”
" 9일 사람도 피곤하고 말도 피곤하고... 전라우의병장 최경회가 군사 2천 명을 거느리고 바야흐로 단성에 머물러서 합천(배설)군사를 만나 진주로 전진하니, 피란하는 남녀들이 “ 합천 군사가 잇달아 올 것이니 잠깐이나마 죽음을 면하겠구나.” 하다.
9일 일본군은 설(배설)의 부대에 전면 공격을 가했고 한 편 진주성 포위망을 조이면서 개산 아비(介山父) 들이 9일 대거 등장 염을 준비하는 일본군 모습에 진주성 어린 아이들과 노인들이 극도의 공포로 병사들은 굶주려 있었다.
다음날 대공세를 막기위해 밤 자정무렵부터 설의 기병대가 적장에 막사와 건초 병참 진에 불를 놓아 여러 진영을 불태우고서는 혼란을 틈타 북문을 열고 진주성에 설(배설 합천군사)이 입성했다.
동문 쪽 전투가 한창일 때에 왜군 1만여 명이 어둠을 타고 북문을 공격했다. 긴 사다리와 방패를 이용한 일시의 공격에 성문을 지키던 군사들이 모두 놀라 한 순간 무너졌다. 최덕량과 군관 이눌 윤사복이 죽기를 무릅쓰고 흩어졌던 전세를 겨우 수습했다.
진주성 안에는 노약자, 어린아이, 아낙네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이 돌과 불을 던져 성안의 기와, 돌멩이, 지붕 덮은 짚까지 거의 다 없어졌고 조약돌 하나도 식량 한톨도 남은게 없었다.
마침내 다응날 일본군은 배설의 부대가 진주성위에 보이자 앞다투어 진열을 가다듬지도 못하고 김해 거제방향으로 자신들의 주군이 있는 거제로 퇴각했다.
일본군은 지휘부가 기습으로 식량이 털리고 장수들 막사가 불탓으며 일본군은 전쟁 총 잭임자인 하시바 히데카츠가 거제도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서로 살려고 10 일부터 모든 포위망을 풀고 도주하기 시작했다.
3, 진주성 대첩,
임진왜란을 총지휘하던 하시바 히게카츠가 조선을 영지로 받아 한양행 도중에 성주성에서 의병 세루 부대와 전투도중 중상을 입고 칠천도로 이동 중에 있었으며, 배설이 계속 추격하자 진주성에서 대규모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 전투는 조선을 영지로 받은 하시바 히데카츠가 사망하기 전에 이미 시작되었는데 진주성 대첩 중에 하시바 히데 카츠가 칠천도에서 끝내 사망하고 말았는데 배설이 일본으로 돌아가게 해준 갈비뼈 상실 상처부위가 덧나서라고 한다. 진주대첩은 임진왜란에서 침략군 지휘부가 괴멸된 상태에서 조선군이 최초로 수성(守成)에 성공한 전투로 세계사에 유래가 없는 전투이다.
1592년 10월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목사 김시민은 북장대(서장대라는 주장도 있음) 위에서 전투를 지휘하다가 가고시마 군대로부터 큰 부상을 당했고, 김시민이 사망하자 김시민 장군을 대신해서 진주성을 개수하고 병간호를 하고 있던 배설이 김시민 장군이 전사하기 직전에 진주 목사로 제수 되었다.
배설의 군대가 모리 테루모토의 7군 적본진을 방패 기병대로 통과하고 하시바 히데카츠의(10월5일 저녁 칠천도에서 사망) 부상병들을 추격하여 진주성 전투 중에는 진주 외곽에서 식량을 탈취하여 왜군을 압박하다가 진주성에 양식이 떨어져 패색이 짙진 6만 생명을 구출하기 위해 배설의 기병대가 입성하여 지원하여 진주성 대첩의 승리를 안겨주었는데, 기병 방패부대로 유명했던 '세루'에 놀란 일본 대군을 철 수 시켰다.
이에 실제 진주성을 장악한 배설에게 28일 선조는 다시 진주목사로 제수 하였다.
우연히 진주성에 입성한 것이 아니라 왜군들이 진주성을 함락시키는했지만 진주 외곽 전투에서 배설에게 패배한 왜군들은 배설이 진주성을 향해 진격하자 철 수 한 것이다. 배설이 진주성이 안정을 되찾을 무렵, 왜군들은 강화회담을 하면서 부산포에서 울산에 이르도록 자신들의 성을 쌓고 촌락 집을 개축해서생활 근거지를 만들고 있었다.
이에 선조는 다시 배설장군을 부산 첨절제사 겸 동래부사로 임명하여 왜적들의 활동을 와해하려고 차출 하였다.
진주성 대첩에서 일본군에 포위된채 식량이 떨어진 상태에 있을 긴박한 순간에 진주외곽전투를 벌여 승리하고 일본군 식량까지 탈취하여 진주성에 입성하여 김시민장군을 대신해서 진주성을 장악했었음에도 배설이 세도가나 만석지기가 아니였기에 의병 대장에 오르지 못하고 무주 공산이 된 진주목사에 제수되었었다. 이미 배설이 진주성을 실질적으로 장악한 상태에 있었다.
진주목사로 제수되자, 혜청이란 식량 창고를 만들과 군량을 비축하고 백성을 구휼하면서 몽진하는 조정에 부정부패를 일신해야 한다는 '시무상주'를 선조에게 올렸다. 이에 조정 대신들(권율)이 배설을 선산부사 금오산별장으로 전출 시키게 된다. 배설이 선산부사로 좌천 된 이후 일어난 제 2차 진주성 전투에서 6만여 병사들이 전원 전사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진주성 대첩에 민관의 협동을 위해 노력한 배설의 치적이 비문에 남았었다.
"선산부사로 좌천되어서도 배설은 사명대사를 비롯한 백성들을 모아 금오산성을 중수하고 무기를 만들과 길쌈과 농사를 짖게하였다. 배설이 선산부사 금오산별장이 되어 사명대사를 참모로 등요하여 부관으로 산성(山城)을 수축하고 개축하는데 성심을 다하게하니, 팔공산성(八公山城), 금오산성(金烏山城)과 용기산성(龍起山城), 악견산성(岳堅山城), 미숭산성(美崇山城), 부산산성(釜山山城), 남한산성(南漢山城)을 천생산 배틀산성 을 수축하게하고 촌락을 만들어 길삼과 농업을 하게하고 보호하였으며,"
금오산성에 혜창을 만들어 식량을 백성들에게 배풀었는데 배설이 역모로 몰려 희생된 이후에도 사명대사는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동포들을 구해왔다.(주장인 배설에게 큰 영향을 준 인물로 알려져있다.)
근데요? 진주성 대첩 "의병들이 진주성을 구했다?"의병이 누구 누구냐고요? 왜? 이름을 기록하면 포상 달라고 할까봐, 관료들 지들끼리 해먹자고 그래 기록하고 죽으면, 무명용사라며 이름도 남기지 못 했습니다. 당시에 배설이 이름만 남긴 것만 봐도 대단한 장수였습니다.
역사의 기록을 봅시다.
김시민은 전투가 있기 1주 전까지만 해도 감사 김수의 지시로 진주성을 버리고 거창의 김면 군 진영에서 설과 합류하였는데, 김성일의 지시로 진주성에 들어왔다. 전 군수 김대명(金大鳴)을 소모관(召募官)으로, 손승선(孫承善)을 수성유사(守城有司)로, 허국주(許國柱)와 정유경(鄭惟敬)을 복병장(伏兵將)으로, 하천서(河天瑞)를 군량 책임자로, 강기룡(姜起龍)을 병기 책임자로 하였다. (←난중잡록 임진 5월 20일) 관병은 3800명이고 주민 수만명이 모두 전투에 참여했다.
참전의병 곽재우, 심대승을, 김면,김선을, 정인홍( 김준민)배설, 최강,이달,조응도, 정유경 3,000여 명,기타 의병들 약 10000 명
결국 경상우도병사 유숭인은 진주성에 들어가지 못하고 성 밖에서 사천 현감 정득열 등과 전사했다. 의병 대장이란 요즘의 민방위 반장 또는 시민단체 장과 비슷한 조직으로 명예직으로 정식 관리가 아니므로 월급이나 봉토를 을 수 없는 봉사 조직이어서 낮은 직책의 관리(철밥통)라도 서로 가고자 했는데 진주 목사를 당시 의병 대장들이 차지하지 못했음을 볼 수 있다.
4, 진주성 대첩 대승으로 배설이 진주목사에 임명.
네, 이름도 없는 설(합천군수)이 진주 목사로 제수 됩니다. 약 6만여 주민과 의병들이 모두 함께 싸운 전투에서 이름도 없는 배설이 진주 목사라는 어마어마한 직책에 등용됩니다. 우리나라 역사가 관리 위주로 정리되는 폐해때문에 실제 전투 상보가 자세한게 없습니다. 지금 관청에서 만드는 보고서처럼 당시에도 전혀 전쟁 기록이 없습니다.
일본은 장군들의 종군기가 곧 역사입니다. 아주 사실적이고 지형과 시간까지 기록이 남았는데, 우리나라는 참여한 의병 모두는 무명용사로 처리 됩니다. 그리고 기록은 관청에서 엉터리로 기록 됩니다. 위에 등장 인물들 순서로 보시면 배설의 전투가 어떠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그러니 모든 진주주민이 길을 막고 함께하자고 그랬습니다.
임진왜란 중에 가장 많은 적군을 죽인 장수는 단연 이순신 장군이다. 기록 대로라면 약 158.000명의 적군을 사살 한 것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명량 노량 해전에서 약 6만 명을 죽였다는 주장이 있다. 전세계에 전무 후무한 전공을 올린 이순신 장군의 위대성이 난중일기에 기록 되어 있다.
이순신과 같은 시대에 전란 속에서 장군들이 공을 세우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든 시기에 배설은 관료들이 치부와 승진을 위한 수탈을 막아보고자 '부정부패 척결'을 상주하여(선산부사로 좌천된 사이 진주주민 6만명이 학살되었다.)왕조의 장수가 아니라 의병으로 백성의 장수로 일생을 마쳤었다.
이순신 장군처럼 일본군을 대량 사살하지는 못한 것은 사실이나, 임진왜란에서 백성들을 적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한 숫자로 말하면 단연 1등에 비교불가 할 정도로 두각을 나타냈다,
모함으로 누명을 쓰고 운명하고 6년 만에 선조 1등 공신에 책봉되고 묘지장산은 조선 왕조 전무후무한 6.000만 평을 하사받았다.(주회20리) 일본의 기록으로 보면, 임진왜란 전쟁의 승패를 가른 전투는 명량 노량 한산도대첩이 아니다, 양차 진주성 전투로 1차 진주성 전투에 설에게 패배한 일본은 전력을 다해 2차 침공을 했고 결국 조선 측이 패배했지만, 그 규모는 세계 군사적으로 큰 규모의 희생이 있었다.
하시바 히데카츠의 사망으로 격분한 일본군이 이성을 읽고 진주성의 백성 수만 명을 몰살시켰다. 그때까지 일본군에게 호의적이던 조선의 민초들이 설에게 몰려갔다. 이로 인해 일본군이 어쩌지 못하고 물러난 것이었다. 부상진전투에 부상당한 하시바 히데카츠가 퇴각하면서 마지막 안간힘을 다한 진주성 전투가 임진왜란의 승패를 가른 전투였다.
○ 12월 28일 갑인(甲寅)
군기시(軍器寺) 주부(主簿) 황윤(黃潤)이 행재소(行在所)에서 돌아와서 말하기를, “평양(平壤)ㆍ경성(京城)의 적들은 여전히 온통 가득 차서 득실거리고 있으며, 죽산(竹山) 등지의 적들과 서로 연락하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 ★【배설】★(裵楔)을 진주 목사(晉州牧使)로 삼고, 김시민(金時敏)을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하여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로 삼고, 김 대장(金大將) 면(沔)을 경상도 도대장(都大將)으로 삼고, 서예원(徐禮元)을 김해(金海)에 유임시키며, 성천지(成天祉)를 합천 군수(陜川郡守)로 삼는다는 전교(傳敎)가 있었다. ○ 호서(湖西)의 의병(義兵)이 와서 개령(開寧)을 공격했지만, 역시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 김수(金睟)가 체직(遞職)되었다.(1592 고대일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