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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배설은 곧 건강과 생존의 문제다.★◀ 2018-02-27 01:5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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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103     추천:13

 

 

성주에는 배설 장군의 묘지가 있다고 합니다.

배설 장군은 국내에서는 당파싸움에 희생되신분으로 경상도 백성들을 보전한 장수로 유명합니다.

 

 

어릴때 그시기 뚱을 많이 쌌다는 말입니다. 먹으면 그시기를  너무 잘 질러 대서 배설이 되었다는 것인데요, 

너무 잘 먹고 잘 질러대면 힘이 남 달랐다고도 합니다.  아주 어릴때 이율곡 선생이 상당 서원 훈장으로 계실때 상당서원에 공부하러 깄다가 뚱을 잘도 싸고 림도 세어서 영남인재가 등용되지 못할때니 칼을 잡고 무과를 하라고 해서 그때부터 무인에 글로 들어 썻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째튼 배설을 잘해야 한다고 아네요,

어쩼튼 먹는 것도 중요하지만 배설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아무거나 쳐드실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사드문제 분명히 먹을 건지 배설해야 할 것인지, 국민들의 판단이 있어야 합니다.

 

 


 

 

세계최고의 코메디언 고종황제,조선인 위안부

탈영병 배설처럼 나라를 구해달라며 대영제국 인 토마스에게 고종황제와 대원군이 부탁하고 배설이란 탈영병 이름을 하사했다,

그리고 왕후는 일본 건달들에게 강간 살해되고 조선인 소녀들은 일본군 성 노리개로 끌려가고 장정들을 탄광에 끌려가서 죽을 때까지 일하다가 죽었다. 

 

 

 

 




"수령으로써 어찌 일개 서생의 명에 따를것인가"(징비록 난중잡록의 새빨간 거짖말) 

참고로 당시 조선의 품계에서 군수는 정4품이고 첨지는 정3품이다. 배설은 이후에도 김면의 명령을 어긴다. 1593년 2월, 김면은 개령의 적을 추격할 때 군령에 따르지 않았던 합천군수 배설은 곤장 20대, 성주 판관에게 40대를 각각 쳤다. 이 때 김면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종2품)로 승진한 뒤였다.(출처:백과사전)


백과 사전이 이래 엉터리 일수가 있나?



식민지시대 일본의 백과 사전인가부네?



1592년에 배설이 제1차 진주성 대첩에서 진주성 외곽전투를 승리해서 진주성을 구출해 냈으며, 그 공로로 1592년 11월 28일 진주목사로 선조임금에게 임명(제수)되었는데 1593년 2월 김면의 명령을 합천군수로 불복했다? 진주목사가 다시 합천군수가 되었나?

 아니면 의병도대장이 정부의 진주목사를 곤장 칠 수 있는 시대였냐?

시민 단체장이(민방위대장) 육군준장이나 광역시 시장을 곤장쳤댄다?


조선이 개판인것은 나도 인정하지만, 일제식민지 시대가 아니지 않은가?

백과 사전 만드는 분들 기록 교차 검증해서 바로 잡으세요!


일본 식민지 순사들 물러 간지 오래 됐어요! 


배설은 김면과 매우 좋은 사이였고, 김면은 기병위주의 배설 부대를 후원한 가장 큰 후원자관계로 조선시대 신분제 국가에서 양반 4세 아기에게도 '예예 도련님' 하던 시절에 과거에 급제한 중앙 정부의 장교에게 김면이 그런 터무니 없는 명령을 내릴 수도 없는 상태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나 백과 사전 만들어야죠!뱃배설이 의병으로 공을 세워 김면대장이 승승장구하고 거의 배설과 김면대장은 분신처럼 그런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배설의 전투 모두가 김면의 공적이 되었는데 그런 고급부하하고 사이가 나쁠 수 있나?

나 같으면 그런 부하라면 귀여워서 쌈 밥싸주겠다. 부하가 잘되면 얼마나 기쁜일인가?
   


따라서 백과사전 자체가 엉터리 이고, 배설은 부상현 의병장 김면과 같은 지역 사람이다.


 


배씨 문중에서 부상진 전투일을 7월7일로 기록하고 있으나,

일제 시대 배설 왜곡이 1592년 9월 7일 부상진 전투에 집중된 점을 본다면, 조선은 음력을 사용했으므로 일본이 왜곡 하려는 9월 7일 부상진 전투에서 일본의 하시바 히데카츠와 다테마사무네, 구로다 요시타카 외 24기사가 전멸된 것으로 추정될 수도 있다. 문중에 기록을 신뢰하는 이유는 8월 12일 하시바 히데카츠가  9군 대장에서 모리테루 모토의 부장 고바야카와와 전격 교체된  사실 때문이다. 부상진 전투, 무계진전투,  1차 진주성 외곽전투에서 최대규모의 일본군이 척살된 것을 어떻게던 감추고자 하는 것이다.

 

 

1599년(기해) 4월 17일 병인(丙寅)(정경운: 孤臺日錄)배설(裵楔)이 복주(伏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설은 경상 우수사(慶尙右水使)가 되어 배를 팔아먹고 도망갔다가, 산골짜기에서 출몰하곤 했다. 그의 아버지를 가두어 두었는데도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사람들에게 잡혀 몸과 머리가 서로 다른 곳에 있게 되었으니, 또한 마땅한 일이 아니겠는가

(멸치잡이 배로 팔아 먹으려 했다는 주장이나,  사실은 이 당시 배설은 7일간의 기적적인 430킬로를 청야 작전을 실행 했다. 배를 팔아 먹으려면 울산 서생포나 포항 고래잡이 하는 곳으로 가야 하는데 명량해협으로 갈 이유가 없는 것이죠?
군함 가지고 멸치잡이 고래잡이를 하려고 했다는 주장이 놀랍죠?





배설 장군과 도깨비 방패, 

수백년 된 성주의 버드나무와 매화나무 옹이로 만든 방패는 기병들이 사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일본군은 부상진 전투에서 하시바 히데카츠가 부상당하고 마사무네의 눈 하나를 잃게 되자 앙심을 품고 성주군 수륜면 매화원 일대의 와룡매화나무를 모두 베어버리고 아기 매화나무의 씨앗을 훔쳐갔다. 지금은 성주에는 수백년된 버드나무는 천연기념물로 보존 되고 있으나, 매화나무는 종자자체가 씨를 말려버렸다.


 

배설의 실제 어록


"군법에 저촉되어

나 혼자 죽을망정,

어찌 병졸들을

모두 죽을 땅에 몰아넣을 수 있겠는가” ㅡ배설 ㅡ(출처:선조실록)

 

'용맹을 낼 때는 내고,

겁낼 때는 겁낼 줄 아는 것은 병가의 긴요한 계책입니다

 

우리가 부산바다에서 기선을 잡지 못하여

군사들이 의기 소침하게 되었고

 영등포에서 패하여 왜적의 기세를 돋구어 주어 적의 칼날이 박두 하였는데,

 

우리의 세력은 외롭고 약하며 용맹을 쓸 수 없으니

오늘은 겁내어 싸움을 회피 하는 전략이 지당합니다.'배설 597.7.15 일 (선조실록)

 

 

 

 

 

 

 

 

임란당시 성주목사 이덕렬의 일기에 부상진에서 설(세루)이 적 20의 수겁을 베었다는 기사는 8월 12일로 나오고 있는데,(하시바 히데카츠와 고바야가와 다카게와 대장이 교체된 날)  참고로 7월 일기는 25일부터 나오기 때문에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그 전 칠석날 기사는 이덕렬의 일기에는 없다.

이 당시 성주 목사 이덕렬이 세루(배설)이 공을 세울 거라 생각하지 못했었다.

성주목사의 일기대로 보더라도 하시바 히데카츠가 8월 12일 배설에게 갈비뼈하나를 잃었다는 추정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1592년 7월 7일 부상현에서 일본군 하시바 히데카츠 일행이 세루의 기습 공격으로  일본군은 약 수백여 명의 부상과 사망자를 내고 성주군 수륜면 매화원쪽으로 도망가서 치료를 받고 8월 내내 주둔하고 있었다.(배씨종문)


8월 12일 하시바 히데카츠의 부대 대장들과 세루(배설)의 대결에서 일본군 지휘관 약 20여 명의 수급을 취한 것으로 기록이 나타나고 있다.

 

임진왜란 전후로 일본은 대규모 전투에 앞서 상방간의 군사들의 희생을 최소화하기위해 다이묘들끼리 직접   대결투를 통해 승자가 양쪽의 군대를 통합하고 패배자는 항복하는 문화가 있었기에 일본 통일이 가능했다.

 일본의 문화로 하시바 히데카츠가 배설과의 마상 대결에서 패배하자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긴급히 전선의 모든 장수에게 세루와의 결투를 금지하게 된다(국조보감)

 


 


배세루는 성주 부상현(扶桑峴)서 개령(開寧)에서 북상하는 구로다 요시타카. 다테 마사무네.(이에야스참모) 하시바 히데카츠(일본측 조선왕)를 급습 구로다 분신을 척살 중상을 입은 채 남으로 도주하다가 칠천(거제)량서 10.14일 밤 하시바 히데카츠는 병사했다. 



일본군은 전투에서 일본군이 무서워 도망친 비겁한 적장에 대해서는 자객을 보내서라도 가족들까지 무자비하게 살육했으나   용맹한 장수는 사후에 제사를 지내주고 그 가족들을 헤치지 않는 나름의 일본 전국시대의 통일을 뒷바침할 무사도를 지니고  있었다.


세루의 부상현 전투 1592년 7월 7일

조선측 성주 의병장 배덕문

           부장 세루(배설) べせる

 부장 배즙

성주 일대 향군과 의병군 약 2.000명




일본군 규모 

제9군 대장 羽柴秀勝  하시바 히데카츠 (제6군 군장 겸) 13.000명

세루에게 7월 7일 전사한 지휘자들 명단

지휘관 黑甸句沈 구로다 분신 휘하 지휘관(구로다 요시타카의 동생)


             1, 上月
             2, 黒田 九
            3, 福島 心附  4, 小早秀包  5, 秀勝  6, 毛利上月 7, 佐竹心附  8, 西上月   외 20명의 장수  

             약 20여 명의 일본군 지휘관들이 7.7 ~8월 25일 사이의 대결 투에서 추가로 전사 함          

세루결투 중상자들   羽柴秀勝  하시바 히데카츠,  다테 마사무네 伊達 政宗,   외 약 200여 명은 성주군 수륜면 매화원으로 후퇴 부상 치료를 위해 매화원에서 약 1만5천여 병력 중에 약 2.000여 명 이상이 주둔하며 하시바 히데 카츠의 병을 치료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한 왜군들의 노력에도 불구 병세 가 깊어지고 세루를 잡을 가능성이 히박 해 지자  그해 9월 고바야 카와 다카게에게 군대를 넘기고 거제도로 급히 이송 되었다가 결국 거제도에서 사망하였다.


세루의 지휘를 받는 종전 추풍령 일대에 흩어진 조경의 방어사 군대의 패잔병들로서 도깨비 문양의 직경 50센티 구모의 방패와 죽창으로 무장하고 부상현에서 매복 하고 있다가 제9군 대장 하시바 히데카츠 일행을 섬멸하게 된 전투이다. 이 전투의 패배로 임진왜란을 지휘하던 일본군 수뇌부가 실종되고 제9군은 고바야카와 다카케로 대장이 교체 되었다. 뿐만 아니라 경상도 일대의 일본군 지휘라인이 붕괴되어 임진왜란의 수행이 불가피 해졌다.


부상을 입은 하시바 히데카츠는 남하하여 거제도(칠천도)에서 일본으로 돌아가려다가 부상이 심해져서 결국 조선 땅 칠천도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일본군은 간첩들을 동원 하시바 히데카츠의 원한을 갚기위해 다각도로 공작한다. 조선 조정과 군대 내애서는 전쟁을 기피하고 도망만 다니든 장수들이 왜군과 내통하면서 왜군의 오더를 수용하고 평화를 찾으려고 했다. 


지리한 전쟁을 끝내는 조건이 엄청난 것이 아니라 하시바 히데카츠의 원한 해결이라는 비교적 부담없는 주문이었기 때문에 왜군과 조선군 지휘부는 왜군의 주문을 들어주어도 될 것이라는 판단을 할 수 있었다. 

엄청난 침략의 해결책은 비교적 간단하게 첩보전으로 왜군의 철군조건도 간단해지고 있었다.


성주성은 대구 - 구미 - 선산 - 상주 - 문경- 조령 또는 대구 - 구미 - 금산(김천) - 추풍령을 잇는 일본군 주보급로를 지키는 요충이었기 때문에 이 성을 탈환하면 일본군의 보급에 막대한 차질을 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의병들이나 일본군들은 일전불사의 대군이 마주하고 있었다. 

 원래 성주성의 점령부대는 하시바 히데카쓰의 제 9군이었는데, 부상현 전투에서 べせる 에게 부상을 입은 하시바 히데카츠는 매화원에서 치료를 위해 주둔하다가 거제도로 이송되고  8월 11일자로 제 7군의 모리 테루모토 휘하 부장 가쓰라 모토쓰나 1만 병력과 교대하여 경상우도(右道)일대 일본군이 모두 집결하여 총 2만명이 넘었다.

 

김성일은 김면, 정인홍 등의 의병군이 성주를 공격하도록 하는 한편 도체찰사인 정철에게 병력 증원을 요청하여, 운봉과 구례의 관군 5천여 명을 지원받고  화순에서 기병한 최경회와 임계영 의병군이 합세하여 관군의 지원군과 기존 병력을 합하자 총병력이 2만여 명에 육박했다.


정인홍과 김면은 주둔지를 출발하여 합천에서 고령을 거쳐 성주성 남쪽으로 진출한 다음, 8월 22일부터 운제(雲梯), 비루(飛樓), 충차(衝車) 등 공성기구를 마련하여 대대적으로 성주성을 공격할 준비에 들어갔다. 개령에 있든 일본 모리의 증원군은  의병군의 측후방으로부터 공격을 시작하였고, 포위망을 미처 완성하기도 전에 기습을 받은 의병군은 곧 대열이 무너지고 대항도 제대로 하지 못찬 채 후퇴했다. 


세루의 방패 기병부대는 부상현 전투의 승기를 잡고 계속 남진하여 모리 테루모도의 적 본진을 돌파하는데 성공한다. 모리 테루모도는 놀란 나머지 전의를 상실하고 전투를 기피하고 가토와 고니시에게 전선 최전방으로 보낼 식량을 방치하면서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난다는 명분으로 조선에서 도망치고 세루와의 대결을 회피했다.



마사무네의 사당이기도 한 즈이호덴(瑞鳳殿)이 소재한 센다이 시 "쓰네가호우(經ヶ峰) 역사 공원"는 지금도 조선에서 가지고 돌아왔다는 매화나무 '와룡매(臥龍梅)'가 지금도 남아 있다. 성주군 수륜면 매화원에 있던 와룡매를 다테 마사무네가 훔쳐 가서 심은  것이다.

 


성주군 수륜면의 매화원에서 하시바 히데카츠에게 약탈 당한 와룡매가 한이 져서 500년 세월의 인고를 견디고 살아 있다.  배설의 후손들은 이 매화나무의 반환에 힘을 모았으면 한다. 일본에서 500년간 길러 준 것을 그냥 달라고는 할 수 없고, 그 종자만이라도 받아서 고향 매화원으로 돟려 놓아서 종을 보존해야 할 것이다.


성주전투 배세루 방패 기병 부대의 부상현 기습 전투에서 구로다 요시타카의 동생 구로다 분신을 척살하고 구로다 요시타카 가문의 칼 두개와 하시바 히데카츠에게 획득한 황금 부채의 징표가 표주박 문양이 가문에 보관 되고 있다고 한다.



하시바 히데카츠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누나 요도 도모의 아들(조카) 9번대의 대이다. 

13.000 명의 병사를 이끌고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북진 도중에  성주성에서 배세루와 전투 도중 부상당해 귀국길에 칠천도에서 병사하여 임자왜란이 소강하게 된다. 


하시바 히데카츠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누나 도모(とも, 닛슈, 日秀)의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시 조카인데 뛰어난 지략덕분에 도요토미가 양자로 삼았다. 하시바(羽柴) 성을 하사받아 집정하였다.



일본과 조선의 영토 상속문제,

오다 노부나가가 일본 전국시대를 끝내고 통일 을 이루고 사망하여 그의 딸들이 상속권을 가지게 되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부인이 오다 노부나가의 딸 공주이고,  하시바 히데카츠의 부인이 오다 노부나가의 딸로서 일본의 상속권을 가지고 있었으나, 히데카츠가 사망하고 고우 공주는 도쿠가와 히데타의 부인이 된다.  


도요토미 측실 요도 도노의 막내 여동생 고우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부인으로 요도 도노의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이에야스의 손녀 센히메와 결혼시켜 권력을 유지하다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죽자 아들 도쿠가와  히데타의 정실 부인이 된다.

 

 

 

 

 

 

 


 

 

배설이 장작귀선 거함 돌격선 두척을 투입했다는 조선측 기록인 제조번 방지의 기록과 일본이 세척의 거함 맹선이 투입되어 일본군의 피해가 막심하다는 기록, 나는 일본측 기록이 사실에 가깝다고 보여진다.

 

당시 호남을 대표하든 동인정권에서 배설의 전투규모를 아예 기록하지 않았고, 일체의 포상도 없었을뿐 아니라 배설을 도망자로 몰았다는 것만봐도 지도층이 얼마나 영리한지 알수 있다.

 

 

배설이 지휘한 함선의 규모가 분명하고 병령도 약 1만여 병력 추정이 가능하다. 전투시간이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공격을 퍼부어 일본군들이 전부 후퇴하고 있는 모습도 특이하다.

 

 

김완의 해소실기에는 배설 장군과 김완장군이 마지막까지 적들의 등선육박전에 맞서 사투를 벌이는 기록이 생생하고, 칠천량 해전에서 적에 기습공격을 당한 배설 장군이 일본 요시아키 장군과 직접 배위에서 배세루를 잡으려는 요시아키 장군과 결투가 벌어졌다.

 

일본군에 목표는 이순신이나 원균이 아니라 "배세루부대" 였다는 사실과 요시아키가 포위망에 갖힌 배설의 지휘선에 몸소 올라 칼을 휘두러다 배설장군의 칼에 오른쪽 팔이 베이고 칼을 놓친 상태에서 일본 장군에 체면도 버리고 바다로 뛰어 내려 구사일생으로 살아돌아 갔다는 요시아키 장군기

 

일본군이 주도권을 잡고 김완 장군을 포로로 잡은 요시아키 군대가 부대장군이 퇴각하는 함선위에 올라 공을 세우려다 팔을 잃어버린 칠천량 해전의 치열함이 생생하다.



난중일기 을미년 스무날(계사)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식후에 우수사에게로 가다가 길에서 배수사(설)을 만나 배 위에서 잠깐 이야기했다. 밀포 둔전 만든 곳을 살펴볼 일로 간다고 했다. 그길로 우수사에게로 가서 몹시 취하고 저물녘에 돌아왔다."

해석, 충무공은 전라우수사를 만나서 술을 취했는데 경상우수사 배설장군은 배를 타고 밀포 둔전 만드는 곳으로 가고 있는 모습이 난중일기에서도 배설장군의 식량을 만들어 백성을 구휼하려는 성실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소설가 김경진의 의견에 따르면 그가 경상우수사로 부임하던 시절 판옥선이 25척까지 증가하였고 경상우수군의 굶주림도 어느정도 해결시켰다고 말한다. 이중 판옥선이 25척까지 증가했다는 부분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소설가 김경진이 연구를 충분히 하고난 다음의 의견이다. 백과 사전은 왜곡된 역사를 기록하고 교육하고 있다. 일제가 물러가면서 3대가 가도 왜곡을 밝히지 못하리라고 한 말을 의심도 없이 무지로 희망과 미래를 보지 않고 자기 선조들을 비아냥하고 있으니 않타깝다.


 

 

 

 

 

 

 

 


1, 임진왜란의 첩보전 실상


일본 교토의 코무덤은 수십만명의 코가 묻혀 있고, 오까야마현(岡山縣) 비젠시 야산에 묻힌 2만여명의 코무덤이 400여년만에 발견되었듯이 일본 전국에 코무덤이 산재하고 있는데 대부분이 정유재란 호남인의 희생이있었다. 




 


한민족의 위대한 인물 이순신 장군의 업적을 전혀 믿지 않는 풍토는 현실과 너무도 괴리된 전쟁 신화를 주장하는 미화때문에 이순신장군의 본래 모습을 잃어가고 있음은 않타깝다. 명량과 같은 영화로 인해 전세계인의 조롱거리로 만든 것은 너무 않타깝지만, 지금부터라도 정신론에서 벗어나 진실을 밝혀 우리나라의 미래를 생각해야하고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낸다'는 세대교체 관점에서 '국사학계의 무서운 아이들(앙팡 테리블·enfant terrible)'의 등시켜 국가 미래동력을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조선 초기 일본측 남해 거제 현령을 이문욱이 임명된 것은 조선의 건국 당시 이성계의 왜적 토벌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일로 왕위에 오르면서 왜구들에게 거제 남해 대마도 등지의 섬을 자유롭게 이용하게 하고 조선인을 공도 사업으로 무인도로 만드는 과정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확장되었다.


이문욱은 양반에 자손이 아니어서 개똥이라고 불리는 노비총각이었다가 남해 거제현령이 되면서 비로소 당시 흔한 이씨로 이문욱으로 활동하다가 고니시 밑으로 들어가면서 남도에 손씨가 양반이므로 손문욱이 되었는데 소싯적에는 개산이라 불렸다는 일설도 있고, 김해에 손문욱의 아들 개산이 있었다고 하기도 하는데, 이는 순전히 개똥이가 부산 바다를 건너가서 토요토미가 이름을 물으니 개똥이라고 하지 않고 개똥이가 부산으로 왔다고 개산이라고 둘러대었다는 일설도 있다.


손문욱은 왜군의 밀정노릇을 하다가 노량해전에서 처음으로 절충장군이 되었으므로 일본측으로 부터 장수에 임명된 적이 없는 손문욱은 소싯적 양반 자제가 서당에 갈때 책보를 들고 따라다닌 노비로 추정되는 이유로   글을 알고 있었다는 점때문에 토요토미에게 발탁된 인물이다.

 개산아비라는 것은 소서행장 즉 고니시라는 것이 가장 합당한 것으로 그는 많은 조선인을 첩자로 활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손문욱. "소싯적에" 일본군에 잡혀서 일본으로 들어갔다가 글을 잘하고 용맹이 있는 덕분에 도요토미 가까이서 지내며 "양아들" 소리를 듣다가 도요토미 암살 자객들 500명이 난입할 때 큰 공을 세웠지만, 일본인들의 시기와 질투 속에 부산으로 다시 넘어왔고, 경상도 관찰사 이용순한테 귀순의사를 밝혔으니 이때가 정유재란이 터졌던 1597년 4월 25일, 미리 활약하던 요시라와 권율의 막하에서 백의 종군하던 이순신과 같은 시기에 있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명나라와의 전쟁으로 인구가 부족함을 한탄하며,일본인 여자들은 남자들이 요구하면 지휘고하를 불문하고 그씨를 받아 소중하게 키워라는 칙령을 발포한 인물인데, 후궁을 범했다고 질투할 인물이 아니었다.



조선 조정에서는 의문투텅이인 이런 인물을 1598년 9월 23일에 이 손문욱을 받아들인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사실은 이미 그 전에 칠천량해전 당시 뿐만 아니라 노량 해전을 실지 지휘했고 당시 조정으로부터 절충 장군으로 제수 되었다. 조선군 배세루 부대의 대패에는 요시라와 손문욱 같은 첩자들이 조선군 수뇌부와 내통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선조실록』 초반에는 손문욱이라는 이름은 없고 이문욱(李文彧)으로 나온다. 『선조실록』에 따르면 이문욱은 임진년에 포로로 잡혀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양아들이 되었다. 전쟁에서 공을 세워 총애를 받았으나 도요토미 희데요시의 첩과 간통을 하여 쫓겨났다. 그 후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부장이 되어 남해 현감이 되었다고 한다.



1597년(선조 30) 6월 조선에 귀순하여 이순신(李舜臣)의 부하가 되었다. 이듬해 11월 2일 이순신의 명령으로 명나라 제독인 진린(陳璘)의 진영에 들어가 순천왜성을 공략할 계책을 논의했다고 하는데, 『선조실록』에는 이때부터 비로소 손문욱이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손문욱은 1598년 11월 19일 노량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전사할 때 옆을 지켰고, 뒤이어 조선군을 지휘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공로를 인정받아 첨사에 임명되었다고 한다.


1604년(선조 37) 6월, 사명 대사(四溟大師)와 함께 탐적사(耽謫使)에 임명되어 일본에 다녀오는 등 전쟁 후 두 나라가 강화 회담을 맺고 국교를 재개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1610년(광해군 2) 11월에는 쓰시마[對馬島] 사신 다치바나 도모마사[橘智正]을 영접하기 위해 박대근과 함께 부산에 파견되었다. 그 후의 행적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1617년(광해군 9) 11월 광해군(光海君)의 폐비 문제를 거론하기도 하였다. 이후의 행적은 알려진 것이 없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선조 실록 선조 30년 4월 25일조에는 이문욱이 일본군이 쳐들어오자,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갔는데 글을 잘하고 용맹이 있어 관백(關伯) 수길이 재주를 시험해보고는 양자로 삼았다고 한다. 수길(豊信秀吉)을 시해하려는 무리을 막아낸 공으로, 더욱 수길의 총애을 받으니 시기하는 무리가 생겨 났으며, 수길은 이문욱을 행장(小西行長)의 부장으로 삼고 공을 세우고 돌아 오라고 하며 부산으로 보냈다. 이후 그는 왜군 진영에서 나와 이순신 휘하에 들어 갔다고 되어 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 영정

                                                            이순신 장군은 고니시가 보낸 밀정들을 권율을 통해 적극 활용한 것으로 나와있다.




선조 30년 6월 2일조에는 선조가 “이문욱은 누구의 아들인가?”라 물었더니 신하들은 “알 수 없습니다.”라 말했다. 선조 30년 6월 18일조에 신하가 임금에게 말하길 “이문욱이 우리 나라 사람이라면 불러오면 왜군과 상대하기 매우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대체로 조선 조정은 왜군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이문욱을 필요로 하여 그를 끌어들였다는 내용이다.


일부 다큐에서는 이문욱(손문욱)이 일본 조정으로부터 거제도을 다스리는 호장으로 봉분되었다는 내용도 있어, 선조 31년 9월 23일조에 전라도 방어사 원신(元愼)이 보고에 따르면“남해의 적에 빌붙었던 유학(幼學) 이문욱이 적의 진중으로부터 나와 적정을 알려 왔습니다.”고 하였다. 즉 이문욱을 이순신 수하에 있던 남해 왜적 출신이라는 손문욱과 동일한 인물로 묘사된다.











선조 31년 11월 27일조에 좌의정 이덕형(李德馨)의 보고에 관한 사관의 논(論)에 “이순신이 가슴에 적 탄을 맞아 운명할 때 그의 아들이 곡을 하려 하는데, 이문욱이 곡을 그치게 하고 옷으로 시신을 덮었다고 되어 있는데, 이 내용도 손문욱과 동일하다는 정황 판단이 가능한 부분이다.


경상도 관찰사 이용순(李用淳)의 서장(書狀)에, 경북 청도에서 사로잡혀 갔다는 이문욱(李文彧)이 같이 사로잡혀 간 박계생(朴啓生), 또는 김계생(朴啓生)이라는 사람을 시켜 비밀 편지를 보내왔는데, 사로잡힌 연유와 왜군의 형세를 물었더니, 김계생이 답하기를 ‘소싯적에 어느 중을 따라 경산(慶山)의 마암산(馬巖山)에 있었고, 변란이 발생하여 이문욱과 부산포(釜山浦) 왜진(倭陣)에서 서로 만나 함께 일본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이문욱은 글을 잘하고 용맹이 있어서 관백(關白) 수길이 재주를 시험해 보고 양아들로 삼고 국성(國姓)을 주었다. 여기서 국성이라는 것이 말 그대로 국(國)씨인지, 손(孫)씨을 주었는지 명확하지 않다. 이 무렵 김계생은 고니시 유키나카 휘하에서 활동하였고 성을 박씨로 바꾼다. 왜 바뀌었는지 전하지 않는다. 일본에서도 우시수길(羽柴秀吉)이 풍신수길로 바뀌는 사례가 있었는데, 비슷한 경우인지는 알수 없다. 이문욱은 관두왜(館頭倭)가 반역을 저질러 풍신수길(豊臣秀吉秀吉)이 거처하는 곳으로 난입하자, 몸을 날려 왜적 백여명을 죽이고 수길을 구해냈다. 이 공으로 이문욱은 수길의 총애을 받게 되고, 관두왜(館頭倭)의 잔당에게 시달리게 되는데, 국성을 받았다고도 한다.



이문욱은 손문욱이 된 것에 대해서 여러 설이 있다. 당시 항왜들의 귀환자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출신이 드러나지 않는 김, 이, 박 같은 성씨로 창성하거나 그들이 사는 지역 호족 성씨로 창성하는 경우가 있었다. 부산과 인접한 밀양에는 고대 부터 경주계 손씨와 일직(안동) 손씨들의 살고 있었다. 따라서 경상남도에서 손씨는 흔한 성씨였으므로 이문욱이 손씨로 창성하였다는 비정이 가능하다. 또는 이문욱이 관백(關白)에게 국성을 받았다고 하므로 그때 손씨가 되었을 가능성도 있고, 반대로 본래 손씨 였는데 일본에서 이씨가 되어 한국에 들어왔을 가능성도 있다.



고대 거제도, 대마도는 본래 삼한 시대 가야 지역으로 가야 사람들이 많이 살았고, 백제인들도 드나들었으며, 7세기 이후에는 신라인들도 살았다. 대마도가 일본 영토로 귀속된 시점은 고려 중엽으로 이 시기에 왜인들이 많아져서 언어도 일본화 되었지만, 그 이전에는 한국 영토였다. 공민왕 때 왜인들이 김해, 안동에 침입하여 노략질 하였는데, 이들 대부분이 대마도에서 거제도, 김해를 통해 들어왔다. 일부 다큐에서는 이문욱(손문욱)이 일본 조정으로부터 거제도을 다스리는 호장으로 봉분되었다는 내용도 있어, 일본 조정이 대마도는 물론 거제도까지 지배력을 행사하여 그 곳에 주민들이 일본 조정의 통치 아래 놓였던 상황을 말해 주고 있다.


왜인들이 경상도을 노략질한 역사가 1700년 정도 되기 때문에 경상도에는 고대 부터 왜인들이 많이 있었고, 이문욱, 김계생이 왜인의 부장이 되어 별다른 저항이 없었던 점을 본다면 본래 한국인 이었다는 그들의 주장은 모호한 부분이 있다. 정유재란 이후에 일부 왜인들이 선조에게 김씨 성을 사성 받았고, 만여명은 북방 경비에 나아가서 북한에도 김해 김씨가 생겨 난다. 따라서 이문욱(손문욱)도 본래 성이 없다가 차후에 창성, 또는 사성 했다는 정황 판단도 가능하다.


선조실록, 광해군 일기에는 이순신을 대신하여 전투를 마무리한 사람이 이문욱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인조반정 이식(李植, 1584∼1647)이 편찬한 선조수정실록, 선조 31년 1 월 1일조에 “순신이 말하기를 ‘싸움이 지금 한창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하고 절명하였고, 조카 이완이 순신의 죽음을 숨기고 급하게 싸움을 독려하니, 군중에서 알지 못하였다.”고 하여 이문욱(손문욱)의 자리는 이완(李莞)으로 바뀌었다.




이식(李植)이 작성한 충무공 시장(諡狀)에도 충무공이 죽자 조카 완(莞)이 그 사실을 숨기고 기를 들고 독전하였다 하였으나 손문욱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다. 이순신의 신도비문에도 손문욱이 등장하지 않고 있으며, 선무원종공신록권에 주부(종6품) 이완은 3등 공신으로 책록 되었는데, 이문욱의 관한 기록은 누락되었다. 충무공의 최후를 지켜보고 계속 독전을 한 장군을 선조실록(광해군 때 편찬)에서는 이문욱(손문욱)이라 하는데 선조수정실록(인조대왕 때 편찬)과 충무공의 시장, 신도비문 그리고 국사사전 등에는 이완이라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광해군일기(인조대왕 때 편찬) 광해군 9년(1617) 11월 25일조 인목대비 폐비 문제에 관하여 손문욱이 동조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인목대비 폐비는 인조반정의 중요한 명분으로 그에 연루된 인사들은 숙청되고, 동조한 멸문되었다. 손문욱은 항왜 출신이라는 모호한 의심을 갖게 하는 인물이므로 더욱 가혹하게 역사에서 공적이 삭제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그의 공적은 이완으로 교체하여 정설로 삼아 현대에 전하였으나, 선조실록, 등 몇몇 사서는 그 내용을 수정하지 못하여, 광해군 일기, 조선왕조실록의 기록과 일치 하지 않게 되었다.



선조실록 선조 31년 12월 18일조 도원수 권율(權慄)의 보고에 “통제사 이순신이 전사한 뒤에 손문욱 등이 임기응변으로 잘 처리한 덕택에 죽음을 무릅쓰고 혈전하였다, 선무원종공신록권에 절충장군(折衝將軍) 손문욱은 2등 공신으로 책록 되었다, 라고 되어 있다. 선조실록과 광해군일기에 의하면 왜의 사정을 잘 아는 이문욱(손문욱)은 왕명에 의해 대마도를 다녀오고 유정(惟政)과 함께 일본에 다녀와 대왜(對倭)교섭에 큰 역할을 하였다, 라고 되어 있다.


일부 수정되기는 하였으나, 거의 모든 기록에서 이문욱(손문욱)이 이순신을 대신하여 전투를 마무리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분명히 공이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어찌 되었던 왜인을 무찌르는데 공을 세웠다. 반면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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