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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양 백성 대학살 임진왜란, 피란하지 못한 죄▶▦ 2018-02-27 01:0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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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8     추천:4

한양 백성 대학살극 임진왜란 발자취 피란하지 못한죄

분명하고 확실한게 부산항에 들어 오기전에 이미 가토 기요마사가 조선에 도착하면

20일 내에 "선조 왕을 잡아 토요토미에게 바치겠다고 약조하고 한양을 20일 내에 점령하지 못하면 자신에 가족 모두를 죽여도 좋다"고 인질로 해놓고 출병해서 부산항에 1월에 들어 와서 7월 까지 해수욕까지 하고 있었다고 하잖아요?

배설 때문에 ~부산항, 해운대 해수욕장이란걸 임진왜란 때 알게 되었다고 하죠?



배설이 탈영누명 쓰고 해남 우수영에 내리지 않았음,

일본군 장수들이 차례로 토요토미에게 불려가 목이 달아 났을 거예요.

배설이 일본군 다 살려 준겨고, 이순신 장군 사지에서 구해 냈지요




선조에게 죽을 고초를 겪고 충무공께서 죽을 고비에 배설이 12척 이나마 남겨 한양이 무사했지요. 만일 그것이라도 없었으면 호남 대학살 처럼 한양이 그래됬겠죠?

 

아무리 이순신 장군님 이라도 배가 없으면 말타고 14만 대군을 혼자서 막을 수 있었겠소? 아님 대장검으로 적군을 쓸어버렸겠소?

 

 

가토나 고니시나 시마즈나 모두 이순신보다 뛰어난 무공을 가진 장수였고, 호남 대학살이 왜 읽어 났는데요? 그들을 못 이겨서 였어어요!



원균이야 전멸 당했지만,

나마 배설이 거대한 장작으로 만든 배 12척을 가지고 였바꿔 먹으려고 고물상에 들락 거리는 것을 추적 미행해서 찾아냈기에 명량 대첩과 조선이 존재합니다.


이순신 장군의 전함 12척을 찾아낸게 바로 한민족이 존재하는 원인이 됩니다.

 

배설이 조선배를 대마도에 숨겼다고 다들 그래 생각할 때

이순신 장군님이 천리안으로 전라도 진도에서 찾아 낸 것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경상수사 배설 이 놈은 분명 우리 호남으로 튀었을거여라고 생각한 것이죠,

세계 인류가 생긴이래 전함을 고물상에 팔려는 시도자체가 세계사에 없는 엄청난 것이지요?


 백의종군 사형수였든 이순신 장군을 보고 배설 장군은
"그대는 감옥에 있어야 하는데 왜 여기 있는가?"라고 했다죠?

 

 

아무리 조선시대가 신분제라지만, 백의 종군 사형수 신세인 이순신 장군을 보고 그래 공손한 경어라면 당시로는 너무 경어를 쓴것에 해당됩니다.

 

요즘과는 다른 시대를 마치 지금처럼 머리 쳐밖고 "예예" 안했다고 명량 영화에서 간적으로 나오죠?



선조 임금이 이순신장군에게 육지의 권율장군에게 합류하라는 어명이 내리니,

이순신 장군이 어명을 어길 수는 없고해서, 배설 장군에게 육지로 대신 해남으로 보냇다고 제조번 방지라는 고서에는 분명하게 나오고 있죠,


이 부분 수군은 배설 장군 동생 배즙장군이 지휘하고 있었으니 흔쾌히 자신이 탈영병이 될 줄 모르고 해남에서 싸웠겠죠, 육군의 지원이 없이 수군 단독으로 작전을 할 수 있던 시기가 아닙니다.

 

그래서 해남 우수영에 배설 장군은 내려서 조선 수군을 위해 육지 해남에서 전쟁이 끝날때까지 전투를 했습니다.

 

만일 당시 탈영했다면 당장 잡아 죽입니다.

일본군에겐 상대가 안되었어도 자신에 백성들을 껄떡하면 죄를

쒸워 죽이든 할짖없든 시절이었다니까요, 한양백성들 무지 무지 죽였다니까요,


배설 장군이 육지에서 기동했으니 가토나 고니시 시마즈가 있어도

조선 수군이 명량 대첩과 노량해전을 할 수 있었다고 봐야합니다. 




배설 장군이 없었다면 조선 수군은 바로 전멸 당할 수도 있어요,

육지에 배를 댈 수 없는데 아무리 배즙장군이라고해도 어렵죠, 전함이 뭐 티코자동차입니까? 아무나 올라타고 최무선의 화포를 쏴서 맞출 확율이 얼마나 되겠어요,

명량해전 배설 장군이 해남으로 명공육전 명령에 따라 하선한 이후 배즙장군이 지휘했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배는 육지와 연계해서 물을 수시로 구해먹어야했어요,

육지에서 조선 수군을 위해 싸워 준것이 배설 장군입니다.

전쟁이 끝나고 배설 장군은 수군에서 전사한 동생 배즙 장군의 갑옷을 가지고 고향으로 귀향했습니다.


분명한 것은 난중일기를 보심 이순신 장군이 등장하면서 이미 배설이 도망갔다고 적고 있음에도 배설이 계속 수군을 운용하고 있었잖아요,

 

이에 명공육전 즉, 이순신 장군에게 육지의 병력과 합류하라는 명령을 배설 장군이 대신 하게 했기에 전쟁 끝나고 귀향했고 조선 수군을 위해 해남에서 전투를 계속했습니다.


당시는 전쟁 중이라 명령으로 군대가 움직이는게 아니고 장수가 군대를 움직이든 때여서 배설 장군을 수군들과 따로 떼 놓기 위해 육지로 보낸 것 같습니다. 그게 사실 탄핵이죠,


해남 문내면 일대에서 배설 장군은 동생 배즙 장군이 조선 수군을 운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 수군이 기동하기 전에 교두보를 확보하는 일들을 계속했으며, 노량 해전에서 배즙 장군이 전사하자 배즙 장군의 갑옷을 받아서 성주로 귀향했으며, 이때는 이미 전쟁이 끝난 다음이였습니다.


그 전에 귀향했다는 것은 당시 당파싸움으로 정적 제거를 위해 만들어진 기록이고 그럴 이유가 있었겠지요, 면사첩이 조금 일찍 왔더라도 그런 구절이 없었을 덴데,,,

일제시대에 다시 조작되어 사실화 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선조들을 욕하는 재미로 살아가는게 우리 후손들 아닙니까?

전쟁 내내 배즙 장군이 조선 수군을 이순신 장군의 명령을 받아 운용했는데요, 당시는 아무리 이순신장군이라해도 명령 하나로 움지기든 군대가 아니었습니다. 이미 왕도 조정도 권위를 상실 했기때문에 이순신 장군도 광해군이 왕을 대신 나라를 운용해서 불러도 안가든 시대였습니다. 왕이 불러도 안가던 시대라 이 말입니다.

나라가 망할 지경인데 무슨 나라의 명이 있겠어요,

조선 수군 이순신장군의 병력은 모두 전사하고 남은게 없었지요?


더구나 이순신 장군을 따르든 군대 자체가 칠천량서 기습을 당해 완전 전멸했는데요, 무얼로 지휘를 누가 하냐구요, 배즙 장군이 전쟁 끝나는날 전사했어요, 사실 이것도 좀 의심가는 부분이 많아요,

배설을 죽이려는 세력들에 의해 전사했다고 보이는 부분이있어요,


전쟁 중에 배설 장군이 탈영했더라면, 경상감사 한준겸과 성주 경상 일대의 군대가 그냥 뒀겠어요, 역적이라는데 장례를 경상도장으로 한 것만봐도 계획된 정적 제거였어요, 원숭이들의 특징이 도구를 사용하는것이고 일본 원숭이들은 조총을 들고 왔죠, 조선인은 도구를 이용하는걸 비겁하게 생각했어요,

그 당시 배설이 만든 장작귀선이 전쟁을 좌우했습니다.









일본과 한국의 차이점 중에 교육제도가 가장 많이 다릅니다.

일본은 토요토미 히데요시 이후로 전통적으로 교육열이 높았고,

문맹율이 매우 낮았습니다. 당시 조선과 일본은 정반대의 길을 갑니다.

특히 에도 시대에는 일본의 문학이 이미 국제 사회에 눈을 뜨고 연구하고 전국에 약 2만개 이상의 번교가 설치되어 지위 고하와 관계없이 교육을 받았습니다.


당시 조선은 학문을 양반 사회만이 독점하고 서민들에게는 교육을 하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욱을 독점하고 정보를 독점한 양반사회가 나라를 피폐시켜습니다.




에도막부(江戸幕府)의 교육기관

① 학문소(学問所-昌平坂学問所) : 고급무사를 위한 막부 직할학교. 막부 말에는 유학 이외에도 국학·양학까지 광범위하게 공부했다.
② 번교(藩校) : 각 번(藩)의 인재육성을 목적으로 했던 소위 공립학교. 무사를 대상으로 하였으나 후에는 서민교육도 하였다.
③ 서당(寺子屋) : 농민·일반인 등을 대상으로 했던 민간의 서민 교육기관. 읽고 쓰는 것과 계산교육정도의 초등 보통교육을 중심으로 하였다.
④ 사숙(私塾) : 막부나 번(藩)의 지배를 받지 않는 민간의 교육시설. 무사·서민 등의 출신 계급을 따지지 않고 교사와 학생의 맨투맨적 관계를 핵심으로 한 개성 존중의 교육을 함. 막부말기에는 이데올로기 형성을 위한 정치 결사적인 학교도 늘어났었다.(출처:네이버 지식)


사숙(사립학교)

일반서민의 상급 전문교육에 대한 요구 증대로 관립의 교육시설이 부족을 보충하는 형태로 에도 말기에 사숙이 많이 설립되었다. 개설자의 의도와 사상을 자유롭게 반영할 수 있는 다양한 특색을 발휘 법률, 경제, 어학, 문학, 종교 문과계 학문의 충실은 이들 사숙에 의한 것이 많았다. 각 방면의 다양한 교육이 사립대학의 전신이 되었다.

가장 오래된 사립학교로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가 설립한 게이오의숙(慶応義塾), 니이지마 조(新島襄)의 도시샤영학교(同志社英学校, 후에 도시샤(同志社)대학),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의 도쿄전문학교(東京専門学校, 후에 와세다(早稲田)대학) 외에 다수가 있었다.

일본의 현대화 과정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교육제도는 서민 교육기관인 번교라고 볼 수 있다. 에도 시대 전세계적으로 문맹율이 높았던 시기에 국민교육을 가능하게 하고 문맹율이 획기적으로 낮게 하여 국력이 된 것은 번교였다.

 

 

 

 

명량 노량해전 기여도

조선시대 1등 2등 공신 하는 것은 신분제국가에서 신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벼슬의 직책은 바로 녹봉(월급)이 나오는 실질적인 공의 규모를 말합니다.  배즙 장군이 이순신 장군보다 공이 더 커다는 것을 확실하게 왕조실록이 보여주고 있음에도 탈영병이라고 선조들을 놀리고 있는 우리 내부의 자기 선조비하의식이 문제입니다.


1,명량, 노량해전의 이순신 장군,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이 조정에 전해지자 선조는 이순신 장군을

1,우의정에 추증, 1604년 선무공武功臣 1등에 녹훈되고(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

2,좌의정에 추증, 후에 1793년(정조 17) 다시 영의정이 더해졌다.


2, 명량, 노량해전의 최고 공신 배즙 장군,


1610년(광해2) 선무원종 2등 공신에 녹훈되고

1,가선대부

2,병조참판에 증직되었으며

3, 의금부 지사

4,훈련원의 지사에 추증되었다.

이같은 공의 사실이 경산지와 영지에 등재되어 있으며 경북 성주군 대가면 도남1리 후포(뒷개) 숭조대에 배즙 장군의 갑옷을 묻고 유허비를 세웠다.(묘소는 경북 고령군 노2리 명곡 서우재에 있다.)


3, 노량 해전의 2등 공신 손문욱 장군,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자 노량해전을 대신 지휘 2등공신

1,절충장군에 승품되었다.

절충장군 손문욱은 권율의 궁중에서 인목대비를 축출하는 조정의 혼란을 부채질하여 세력을 누렸으나, 얼마지나지 않아서 배설과 금란지교를 맺은 한준겸이 인조반정을 읽으켜 손문욱과 간신들은 모두 비참하게 죽고 말았었다.



손묵욱은 일본에 자진해서 대마도주의 가신 야나가와 시게노부를 통해 대마도주의 장인인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장으로 부역하였으며,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이며 고니시 소서행장의 부장이다. 원균과 배설은 손문욱과 요시라의 부하들과 수군을 사정없이 죽였기에 악연을 가지고 있었다.

 

 

 


 

배즙(裵 楫)명종 19년 탄생(1564~1599.7.16)

꽃다운 35세로 노량해전에서 경상우수사 조방장으로 장렬히 전사했다.

(배설장군의 동생)

경상 우도병력 전함 12척을 칠천량해전에서 구해내어 명량 해전을 실제 지휘한 후 성공 시켰으며,

노량해전에서 장렬히 전사했다.

배 즙(裵 楫) 자는 통중(通衆), 호는 명암(明庵)으로 배덕문의 3남이다.

공은 기국이 넓고 뛰어났으며 용력이 출중하였다. 일찍이 가풍을 몸에 익혔으며 학문에 전념하여 경서와 사기에 통달 하였다.

1590년(선조23) 무과 별시에 급제하여 훈련원 습독에 올랐는데 조정에서 말하기를 "지방 고을에서 이와 같이 빼어난 인걸이 배출되리라고는 미쳐 생각지도 못했다".라고 했으며 다시 사직(司直)에 제수 되었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부친 배덕문이 의병을 일으켜 왜장 黑甸句의 목을 벨 때에 공도 참여하였고, 개산진의 싸움에서도 크게 전공을 세우고 돌아오자 행재소(임금이 임시로 거쳐하는 곳)로 부터 선무사(宣撫使)에 제수되었다.


1597년(선조30) 정유재란 때는 조방장으로써 백씨 설(경상우도 수군절도사)과 함께 한산도에서 대승하고 노량에 이르러 갑자기 불어난 적에게 포위되었다. 이 때 공은 비분강개하여 호령하기를 "바다의 기운을 맑게 할 수만 있다면,이 한목숨 미련없이 바치리라".하고 적진을 종횡무진 유린타가 유탄을 맞아 순절 하였으니 향년 35세였다.



ㄴ,한민족의 영웅 이순신 장군님의 난중일기를

가슴은 뜨겁게 머리는 차갑고 냉정하게 평가하겠습니다.



"정유년 난중일기 8월19일자에 이순신은 배설장군의 숙배거부를 적고 있는데 일반인들은 이를 비평합니다.

그러나 저는 다르게 봅니다
이날 이순신이 숙배를 요구한 교유서는 8월3일에 받은 통제사임명장입니다

그렇지만 이순신은 8월15일에
수군을 폐하라는 교유서를 받았습니다 그러면 앞의 교유서는 무효가 된 것이지요

여기에 숙배하면 이순신과 함께 항명을 하는 형국이 되지요

그래서 다음부터 이순신과 갈등이 시작됩니다

항명하는 이순신과 명을 따르는 배설장군 과 말입니다

선조실록 승정원일기 난중일기 등 모두 20여 종류라 작업 기간도 좀 걸릴 것입니다(배윤호)"


네, 명공은 육전에 합류하라는 어명을 배설에게 떠 맡겨 육지로 보내고 배에 집착하는 이순신 장군에 모습도 난중일기에 보여주고 있습니다,

베설 장군 입장에서 집요하게 배와 부대를 넘겨 받길 희망하는 이순신 장군의 의견에 다라도 경상 우도 수군의 조방장인 배즙 장군이 수군을 실질 지휘하고 있으니 배설이 흔쾌히 요양차 육지로 올랐을 가능성은 매우 높습니다.





요즘 조그만한 티코 승용차도 운전면허증 있어야 운전합니다.

더욱이 종북아시아에서 가장 크다란 전함이 그냥 운영되겠습니까?

이러한 큰 배는 기라졸과 포수 기타 전함을 룬용하는 병력이 하루 아침에 만들어 져서 전투를 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임진왜란 당시의 군사들은 지금과 달리 주장이 다로 있어 다른 장군의 지휘를 받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이순신 장군은 1597년 8월 19일 숙배식을 거행하고 배설 장군이 9월 2일 육지로 하선한 이후 2주후에 명량 대첩이나 노량해전 까지 배즙 장군이 군대를 운용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육지에서 응원한 민초들이나 갑판위에서 백병전을 한 병사들이 보충되어 이순신 장군의 휘하에 있었다는 추정이 가능한 부분이 있습니다.




배즙 장군이 배설 장군을 따라 전투에 임하게 된 것은 충주 탄금대 전투와 상주전투 조경의 추풍령전투에서 조선군이 대패하고 전멸 당한 현장에서 배설은 살아 남아 김천의 향병을 모아서 수십명의 잔병들과 항거하고 있었다.


배설이 일본군과 조선군의 무기와 전투 전술의 무지에서 대패함을 아버지인 배덕문에게 알리고, 14세에 과거에 장원한 아들 등암 자장을 곽재우 장군에게 보내 의병을 거병할 것을 요구하 과정에 배건 부부가 먼저 배설의 요구로 긴 죽창을 수백개 준비해서 배설부대에 전해주려다가 일본군에 포위되어 부부와 200여 명의 성주 의병들이 전멸하자, 배즙 장군이 죽창과 와룡매와 버들 나무로 도깨비 방패를 만들어 배설과 함께 전장을 누비게 된 것이다.



일본군은 아시가루 장창으로 상주 탄금대 추풍령 전투 에서 약 20만 대군의 목을 댕강댕강 잘라 충주 탄금대를 끼고 강물이 흐르지 못할 정도로 고니시가 9만명의 수급을 잘랐던 잘 나가던 일본군들이었다.



그런 일본군이 배설과 배즙 장군의 죽창부대에 크게 당황해 했었다. 체구가 외소한 일본군들에 비해 조선군은 늙은 큰호박 하나정도의 더 큰 키와 잘 발달된 체격을 이용 10자(3m) 크기의 죽장을 말 위에서 배즙 장군과 그 부하들이 내려 꽃는 공격력은 가히 모든 일본군의 두려움의 대상이었었다.



일본 전국시대를 통일한 쟁쟁한 무사 24기사가 배즙 장군의 부상진 전투에서 전멸하고 그 수장인 하시바 히데카츠의 갈비뼈 하나를 배설 장군이 취할 수 있었든 것도 바로 무기와 전투전술의 우위 때문에 가능했었다. 하시바 히데카츠가 토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받은 조선정벌 승인 표주박문양의 황금부채 마저 빼앗기고 겨우 목슴이 붙어 도망쳤으나 끝내 칠천량에서 죽어 시체가 되어 돌아가게 할 수 있었든 것도 배즙 장군의 뛰어난 무공이 배설 장군을 바쳐주었었다.





5, 배설 장군의 묘소 바위에 각자로 기록된 봉토는 “周回 二十 里”이다.

장군의 묘소를 기준으로 지름 16Km, 이것을 면적으로 계산하면 200제곱킬로미터로 성주 전체면적의 약 3분의 1에 해당되고, 약 6.000만 평의 땅을 하사받은 것이다. 이는 조선 왕조 역대 어느 왕족도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묘지도 배설의 장산에 규모에 못미칠뿐 아니라 임진왜란 참전 모즌 장수에게 내려진 봉토 전체보다도 더 큰 규모의 장지로 선조의 스승 퇴계 이황선생에게 내련진 사원의 규모보다도 약 만배가 넘는 규모이다.


실제로 이정도 거리 안쪽으로 배설장군의 후손이며

지금 살고있는 후손들의 선대 묘소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고 이렇게 묘소가 있는 산들은 모두 배씨의 종산으로 되어 있다.

이것을 면적으로 계산하면 200제곱킬로미터가 조금 넘는 면적이다.

이러한 면적은 지금의 성주군 전체면적의 약 3분의 1에 해당되는 넓이이다.

지금 배설장군의 묘소는 경북 성주군 금수면 명천리에 있다.

그 부친의 묘는 경북 성주군 대가면 옥화리에 있다.

그 큰 아들의 묘는 경북 성주군 대가면 도남리에 있다.

그 둘째아들 상호의 묘는 성주군 벽진면 외기리에 있다.

막내아들 상보의 묘는 성주군 가천면 중산리에 있다.

이 분들의 후손들의 산소도 주변 금수면, 벽진면, 대가면, 가천면, 성주읍등지 곳곳에 흩어져 있으며

이 산들은 모두 배씨의 종산으로 되어 있으며 일부는 대종중에서 관리하고 일부는 소종중에서 관리하고

일부는 12촌이내의 대소가에서 관리하고 있다.

"수군의 선임 장수인 배설장군에게 작전계획을 물었습니다.

배설장군은 나라의 명을 쫒아 수군을 육군으로 편입하여 전쟁을 수행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순신장군은 "불청하여 배설장군은 육군으로" 갔습니다.


통제사가 된 이순신장군이 과거 자신의 휘하 장수가 아닌 배설장군을 자신에게 내려진 '명공육전 명령'(육지 잔병을 규합하라는 명령)을 배설 장군에게 대신하게 하고 자신은 전함을 동생 배즙장군과 수군을 지휘하게 됨을 '재조번방지'라는 고서에서 '배설을 속이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배윤호)"

주회 20리, 역모로 몰린 배설 장군에게 내려진 장지의 규모는 임진왜란 참전 모든 장수들이 받은 땅보다 많고

임진왜란을 패배하게 원인을 제공한 장수에 대한 포상치고는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그것도 역모로 참수 되고 6년 만에 선조 대왕 스스로 복권 시킨 후 내린 것이다.


의병장 김덕령이 참수 후 70년 만에 겨우 억울한 점이 서류상 신원된 것과는 비교되어 억울함을 입증하고 있다.

(난중일기♡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를 중심으로 배즙 장군의 활동을 살펴보고자 한다.


8월17일

장흥땅 백사정에 이르러 점심을 먹은 뒤 군영구미(장흥군 안양면 해창리)에 이르니 일대가 모두 무인지경이 되었다.

수사 배설은 내가 탈 배를 보내지 않았다.

(군령과 군권이 배설에게 있어 상관인 자신에게 배를 보내지 않음을 말함)

8월18일

회령포에 갔더니, 경상수사 배설이 멀미를 핑계 대므로 보지 않았다.

8월19일

여러 장수들이 교서에 숙배하는데 경상수사 배설은 숙배하지 않았다.

그 업신여기고 잘난 체하는 꼴을 말로 다 나타 낼 수 없다. 너무 놀랍다. 이방과 그 영리에게 곤장을 쳤다.

(전쟁 공포증 걸린 장수가 잘난채 하겠는가, 배설은 이순신이 올린 전쟁공포증 환자라는 장계를 모르고 있었다)

8월27일

경상우수사 배설이 왔는데 많이 두려워하는 눈치이다. 나는 불쑥

“수사는 어디로 피해 갔던 것이 아니오 ”라고 하였다.

8월28일

새벽 여섯시 즘에 적선 8척이 뜻하지도 않았는데 들어 왔다.

여러 배들이 두려워 겁을 먹고 경상수사는 피하여 물러나려 하였다.

8월30일

저녁 나절에 배설은 적이 많이 올 것을 염려하여 달아나려고 했으나, 그 속 뜻을 알고는 있지만,

딱 드러나지 않은 것을 먼저 발설하는 것은 장수의 도리가 아니므로 참고 있을 즈음에,

배설이 제 종을 시켜 솟장을 냈는데, 병세가 몹시 중하여 몸조리를 하겠다고 하였다.

나는 몸조리(귀향)를 하고 오라고 공문을 써 보냈더니 배설은 우수영에서 뭍으로 내렸다.




9월 2일 오늘 새벽에 경상수사 배설이 도망 갔다.(탈영보고)

육지에 육군에 자신이 합류하라는 어명을 배설에게 대신 시키면서 병치료를 겸하라고 계책을 논하고는

다시 순군에 돌아오지 못하게 도망쳣다.


9월 15일 '꿈에 신선이 이래하면 이기고 저래하면진다고 현몽을 해줬다'

기록은 명량대첩을 앞두고 승리를 예감하고 있다.

조선 수군이 칠천포 포위망을 뚫고 나오고 명량해협에 진주한 이유를 알게 됐다는 암시이다.

9월 16일 명량대첩 이순신 '나는 장병들에게 조용히 타일러. 적이 1000척이라도 우리 배를 당하지 못할 것이니 동심하지 말고 진격해 적을 쏘라 하고,'

오예!~멋진군함이네요^^

12척이니 12.000명 쯤 왜군들 막는것은 어렵지 않아요^^



11월3일

배설은 벌써 성주 본집으로 갔는데 그 곳으로 가지 않고 곧장 본가로 왔다.

그 사정을 보아주는 죄가 더 크다.

배설을 처단하지 않는 조정에 불만을 나타냄



난중일기 해석의 문제

정유년 난중일기 8월19일자에 이순신은 배설장군의 숙배거부를 적고 있는데.

배설의 잘난채 하는 꼴이 맘에 들지 않는 다고 적고있다.

유교 국가인 조선 백성에 입장에서 한번 살펴보자. (유성룡 권율 이순신의 친구 입장배제)

이날 이순신이 숙배를 요구한 교유서는 8월3일에 받은 통제사 임명장이다.

(선조가 거부했음에도 대신들이 밀어붙여 승지에게 선조가 사죄... 것)

그렇지만 선조 임금은 아무래도 8.3 임명장이 자의가 아니었으므로

이순신에게 8월15일에 수군을 폐하라는 교유서를 보냈다.

당연히 앞의 교유서는 무효가 된 것이다.

배설이 당시 수군 책임자로서 그러한 사실을 몰랐겠는가?

(군법에의해 사형수와 같은 죄인을 방면 왕을 기만?)

여기에 무효가 된 교류서에 숙배하면

조선 왕의 어명에 함께 항명을 하는 형국이 되는 것이다.

왕명을 따르든 배설과 이순신(조정을 장악한 동인의 군부)장군과 갈등이 시작되었다.

조선군 최고통수권자인 선조 임금이 5년간 한산도에서 은거한 이순신을 영웅은 크녕 동인들이 전쟁중에도 전권을 놓치 않으려는 발악으로 보고 “칠천량 해전의 대패를 본즉, 우리 수군은 워낙 부실하니 차라리 권율 장군의 육군과 통합하라.” 명령한다.

적국을 탐지하라니까 김성일은 거짓말을 하고 전쟁이 나자 또 죄인이 중책을 맡아 인사를 좌지우지하고,

한 2년 이면 전쟁이 끝나고 전공을 염두에 두고 인사를 하는 듯하기도 하다.

(호남의 국가 주도권을 상실시킴)

항명하고 쿠데타를 할 수 있었던 이순신 장군,

왕 명을 따르는 배설장군이 역모로 몰린 것은 동인군부에 탄핵되었음을 뜻한다.

을미년 4월 난중일기

초이틀(갑진) 맑음

종일 공무를 보았다.

초나흘(병오) 맑음

아침에 경상 수사(배설)가 활쏘기를 청하므로 권, 박

두 조방장과 함께 같은 배를 타고 수사에게 갔더니

전라수사(이억기)가 벌써 먼저 와 있었다.

같이 활을 쏘고 종일 이야기하다가 돌아왔다.

배설이 활쏘기를 청하니, 배를 타고 조방장 둘을 데리고 가서 활쏘기를 시켰다고 추측되는 대목입니다. 배설이 이순신 장군에 무공을 익히 알고 있는지라 활을 가지고 오라고 하니 조방장들에게 활을 들려 술취한 것이죠^^



배설 장군의 웅천 해전. 안골포 다대포 해전 승리를 당시 일본측의 기록(케이넌일기. 루이프로스일기, 가토, 요시아키 기타)10여곳의 여러 문헌에 규모가 나와있고 10여 회에 이른 부산해전의 시간 까지 나와있다.



당시 3도 수군편제이나 원균은 배설에게만 적을 치라고 허락했기 때문에 전라 충청수군의 전투가 아님은 분명하다고 할수 있고, 10여회의 일본군 14만 대군을 상대로한 전투에서 일본기록 거의 모두가 자신들이 패배했다고 판단 한점이 특이하다.





"이순신의 정유년 8월 30일자 일기는 훗날 다시 적은 것이기는 하지만,

(일기를 당시가 아닌 훗날 적었다는 것 자체로 이건 믿을 수 없는 것이고,

또 훗날 공적 다툼 사건에 대처하려는 것이라는 느낌이다. )

당시에 자신이 배설의 휘하 장수들을 차지하는 모습을 잘 설명하고 있다.

“배설이 도망치려고 하여서 관하 여러장수들을 불러 거느렸다”라고 기록한 내용은 앞에서 권율이 원균을 배제하고 직접 수사들에게 지휘하던 모습과 너무도 흡사하다. “그 속뜻을 알고 있지만”“휴가를 허락했다”고 적고 있는데 앞뒤가 맞지 않는 내용이다.


이순신은 평소에도 전쟁을 앞두고 도망치는 자를 꼭 잡아서 처벌을 하였다. 그런데 도망치려고 하는 줄 알면서 휴가를 허락했다고 적고 있는 것이 자기 모순이며 또 이틀후 도망쳤다고 적는 것 역시 모순이며, 11월 3일 선전관 이길원이 배설을 잡으러 왔을 때 “이미 배설은 성주 본가로 갔다”고 말하는 것 역시 모순이다.



배설은 조정의 명령에 따라 전라도군영으로 갔다. 그러나 이순신은 조정의 명을 무시하고 해전을 감행 하여 명량해전에서 승리후 조정에 배설에 대해서 도망쳤다고 보고 하였지만 일기에는 그보다 앞선 9월 2일에 기록으로 남겼다.

1,명량해전이 대승이라고는 하지만


현무공실기에서는 “그 공은 절반은 장작구선에 있다”고 적고 있어서 배설의 칠천량해전에서 살아나온 전함 8척과 그후 수습한 4척의 공이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나 선조실록에는 명량해전 승전 기록이 나오지 않고 있는 것은 이순신이 선조의 육군으로 편입하라는 명을 어겼기 때문일 수 있고 배설의 탄핵을 위해서 보고를 하지 않았을 수 있다.

또 권율도 과거 원균 때와는 달리 이순신의 조정의 명령을 어기는 것에 대해서는 어떠한 문책을 한 내용은 찾아 볼 수 없다.



2, 이순신이 배설에 대해서 도망 쳤다는 이야기는?


난중일기에 배설이 ‘도망갔다’는 이야기는 이순신이 곤양에 처음 도착하여서 자신의 눈앞에 보이지 않는 것을 두고 그렇게 시작한다. 그러나 다음날 배설이 나타남으로써 전날의 ‘도망갔다’는 기록은 틀린 기록이다. 이순신은 매일매일 일기를 쓰지 않았음에도 다시 8월 25일 군대인심이 이제 안정되었다고 하면서 “배설은 이미 도망갔다”고 적었다.


이날 군대내 인심이 안정되었다 함은 배설이 갖고 있던 군권이 자신에게로 넘어 왔음과 군대내 보급품의 원할한 공급을 말한다. 배설이 지휘하고 있을 때는 보급품의 공급이 원활하지 않았다고 김억추장군은 증언하고 있다.(현무공실기)


그러니 자신이 배설을 완전히 축출하였다고 생각하고 이렇게 기록하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이틀 뒤 배설이 이순신의 눈앞에 다시 나타나면서 이 내용도 허위이다.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줄로 알고 도망간 것으로 일기에 기록을 했지만 다시 나타났으니 불편하다. 그래서 ‘어디로 피해갔던 것 아니냐’라고 했다고 기록 했다.



그리고 30일에는 아예 ‘근심하고 도망가려고 하여’라고 적으며 빨리 떠나기를 바라는 자신의 속마음을 표현하고 있는 듯 하다.

그리고 ‘그 관하의 여러 장수들을 불러 거느렸다’고 적고 종이 소지를 보내서 ‘휴가를 허락’했다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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