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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임진왜란 명, 일 조선의 승패분석〓 2018-02-26 08:3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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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8     추천:4

임란왜란 고니시선봉 15만 대군 침략 20일만에(원균 이순신방어)에 한양점령당하고 왕자 공주 포로가 되고 선조 이하대신들 발빠르게 도망행차 1년가까이 줄행랑 36계 뿐이었음 그들이 백성들 도망죄를 다스린다?

정유재란 가토선봉(토요토미 히데요시 앞에서 20일내 한양점령하고 조선왕 사로잡겠다 약속하고 자신에 가족 모두를 토요토미에게 인질로 잡고 출병) 1월부터 7월 14일까지 부산포14만 봉쇄당하고 조선땅 어디도 내주지 않음(배설방어 성공)기존 임진왜란에 울산 부산 남해안 일본군 주둔지 제외하고 추가로 내준 곳 없음, 20일은 크녕 200일이  지나도 내륙 어느 지역도 점령하지 못했음,

권율의 칠천량 패전(원균) 이후 호남 대학살 코무덤 발생 조선인구 급감(권율 방어실패)

토요토미 사망으로 일본 내 권력다툼으로 종전
일본 ㅡ일본의 조선정벌은 실패, 조선파괴는 성공
조선ㅡ침략방어는 성공, 내정 민생은 파괴당함
명나라ㅡ일본 명나라 전쟁을 조선에 전비로 치루어 명나라보호에 성공 과도한 전비와 병졸들 전사로 국가붕괴초래

 

건주여진의 중원대륙 점령,

 만주의 1백만 소수 민족인 건주 여진이 중원대륙을 정복하고 청나라를 세우게 됨(신립 장군의 휘하에 있던 소수 부족이 성장하였음)

일본 명나라 조선이 다투는 사이에 일본의 무력이 명나라 근간을 흔들고 조선이 파탄 되는 사이에 어부지리를 만주족이 취하게 되므로 금오산 황지전설이 이;루어지지 못했음,

 

 

 

 

 

 

 

 

2,금오산황지전설의 유래

그러나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영남의 세력이 크게 성장하여 수많은 인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이 금오산의 황지 때문이라고 한다. 앞으로도 세계를 다스릴 인재들이 많이 나와야 할 것이다. 즉 중국의 숭산과 금오산이 황지의 터임에도 물이 없어 활원이 안된다는 뜻에서 9정 7택을 조성하여 만 백성들에게 큰 덕이 미치게 했다.

 

황금빛 까마귀가 나는 모습을 보고 금오산이라 이름 짓고 태양의 정기를 받은 명산이라고 한데서 금오산으로 불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금오산은 풍수설도 많은 산이어서 특히 왕이 태어날 운세라는 금오산 중국과 일본을 먹여 살릴 대혜를 베풀 세계를 이끌 황제가 조선 땅에서 태어나게 해달라는 큰 덕을 외치는 소리는 지금 이시간에도 쉬지 않고 있고 지난 420년 간 흘러 내렸었다. 정상부에는 용샘(龍泉) 이무기가 용이되어 승천하지못한 애절한 건설이 깃든 용샘이다.

 

 

금오산 황지 전설, 여대로의 '반공에 성을 쌓았으니 진(진시황제)백이도 따라할 수 없을 신기'라는 배설의 인물됨을 흠모하는 시구를 남겼다고 한다.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제를 거론한 전설은 배설이 임진왜란에서 일본을 막아내고 중국과 일본까지 아우를 큰 인물이 될 것으로 예언 한 것으로 추정된다.


세계적인 거부가 정암진을 중심으로 날 것이라는 전설자체가 중국 일본을 아우를 큰 황제가 나와야 가능했던 시절에 전설이라는데 주목, 남해안 일대에 문중이나 종문에 설 명절에 배장군에 대한 제사를 올리는 곳이 아직도 있으며 상차례에 상어고기를 올리는 것도 다른 지역과 상차림과 크게 다른 풍속이다. 상어 고기를 제사상에 올리는 것이 임진왜란에 일본군에게 탈취해서 대학살 전쟁의 시체더미 속에서 살아남은 자들 안도의 설 명절 제사가 충분히 상상이된다.



4, 금오산 皇地의 역사

<칠곡문화대전>은 <조선왕조실록>에 근거하여, 임진왜란이 한창 진행 중인 1595년(선조 28)에 이르러 비변사가 '금오산성과 인동의 천생산성을 수축하여 대진(大鎭)을 만들 것과, 이 중책을 선산부사 배설로 하여금 전담하도록 도체찰사 이원익의 의견을 물어서 처리함이 옳다고 임금에게 진언했다'고 기록한다. 왜란이 발발한 지 4년이 지나서야 금오산성은 배설(裵楔)에 의해 중수되었다는 말이다.

 

배설은 선산부사 겸 금오산성 별장이었다. 당시 금오산성의 관할 구역은 지금의 선산(구미 포함), 개령, 김천, 지례 네 개 군에 이르렀다. 배설이 중수를 마치자 금오산성은 1597년(선조 30)부터 경상도 체찰사의 본영으로 사용된다. 이는 금오산성이 '왜군의 북진을 막고 임란 7년을 종식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금오산성 사적비>



현재 금오산성에서 가장 규모가 크게, 아니 유일하게 복원되어 있는 유적은 북문인 대혜문(大惠門)이다. 대혜문에 닿는 길은 크게 두 갈래이다. 하나는 사적비에서 천천히 걷는 길이다. 크게 가파르지 않고 시간도 대략 20분 가량 소요되어 누구나 부담없이 첫발을 내디딜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케이블카를 이용하는 방법이다. 케이블카에서 내리면 2분 만에 대혜문에 당도한다.

 

 

5, 금오산 성 북문 '큰 은혜'를 뜻하는 까닭

성문 이름이 어째서 '큰 은혜'인지 궁금하다. 민간의 전언에 따르면, 대혜문 이름은 이 북문에서 약 20분 걸으면 닿는 대혜폭포에서 유래했다. 이 폭포는 "물 떨어지는 소리가 금오산을 울린다"고 하여 명금(鳴金)폭포라는 이름도 얻었지만, 그보다는 "폭포에서 흘러내린 물이 선산 일원의 농민들에게 큰 혜택을 준다"는 뜻에서 대혜폭포로 일반화되었다.

 

금오산성을 중수한 배설도 대혜폭포의 의미에 근거하여 성 안에 혜창(惠倉)을 설치했다. 백성들과 군사들을 먹일 양식 저장 창고를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또 배설은 대혜문에서 한 시간 정도 올라가면 닿는 내성(內城) 안 곳곳에 사람들을 위한 일곱 우물과 말들을 위한 아홉 연못을 팠다. 물이 계곡을 타고 그냥 흘러가도록 두어서는 외적에게 장기간 포위되었을 때 농성(籠城)을 할 수가 없는 까닭이다. 사람들은 배설이 판 우물과 못을 "구정칠택(九井七澤)"이라 불렀다. 구정칠택의 물은 넘쳐흘러 대혜폭포의 줄기를 우렁차게 가꾸었다.



'승병대장 유정이 금오산성 수축에 조력하여 국난에 크게 공헌했다'는 표현에 주목할 때, 금오산성 중수를 완성하고 구정칠택을 만들어 선산 일대 백성과 군사들에게 임진왜란 극복의 토대를 제공한 배설의 공로는 그 이상으로 대단하게 여겨진다. <삼국지>의 촉장 마속이 마실 물 없는 곳에 진지를 구축했다가 제 군사들을 위장 사마의에게 몰살시키고, 자신은 '읍참마속'이라는 고사성어를 탄생시킨 옛일을 감안하면, 금오산성 중수는 물론이려니와 배설이 구정칠택을 만든 것은 뛰어난 지혜의 발휘라 하겠다.(출처: 오마이뉴스 정만진)





6, 대혜폭포(명금폭포)

경북 구미의 대혜폭포는 금오산 중턱인 400m지점에 있는 높이 28m의 큰 폭포이다.대해폭포는 명금폭포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명금이라는 이름은 금오산을 울린다는 뜻이다. 그만큼 폭포소리가 우창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대혜라는 이름도 이 폭포수가 구미로 글러들어 구미 사람들에게 풍부한 수량을 제공하는 큰 은혜를 베푼다는 뜻이라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 배설이 일본군 제 4 6 7군의 군량을 탈취하여 비축한 곳이다. 그로 인해 조선 의병 2만 명과 관군 3만 명을 먹여 살린 ‘혜창’이 있어 피란민들도 합세하여 살아 난데서 유례한다. 이 대혜폭포는 폭포 자체도 웅장하지만 폭포 주변의 절벽이 에워싸고 있어 주변 경치 또한 아름답다.



일제시대 총독 ‘우가키 가즈시게’와 오카기키 테츠로(일본어: 岡崎哲郎おかざきてつろう) 경북도지사 가 대혜폭포를 방문하여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서 그 즉시 석공들과 일본스님들을 불러 바위에 “명금폭” 이라고 새기게 했다. 그 이후로 이폭포를 “명금폭포”라고 부르게 되었다. ​명금이란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울음 소리가 들린다는 뜻임에도 일부 관광객들은 명금폭포라고 부르고 있다. 사진처럼 "명금폭" 금오산에 토요토미의 눈물이 떨어진다는 뜻임에도 일제시대에 애써 명금폭포라고 불렀다.


아래 사진에 어디에도 폭포란 말이 없다.  

 

 

 

 

 

“...선산 부사(善山府使) 김윤국(金潤國)은 오졸한 서생(書生)이어서 일을 초창하여 경영하는 것을 감당하지 못할 듯하니, 어쩔 수 없다면 배설(裵楔)에게 전적으로 맡겨 조치하게 하여야 거의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먼 곳의 일을 미리 헤아리기가 어려우니, 도체찰사에게 물어서 그 회보를 기다린 뒤에 처리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어쩔 수 없다면 배설(裵楔)에게 전적으로 맡겨 조치하게 하여야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皇地 금지오산성 大惠問(북문) “배달민족에 큰 은혜”

민간의 전언에 따르면, 대혜문이란 임진왜란 당시 많은 사람들을 살린데서 유례한다. 대혜문에서 20분 폭포의 "물 떨어지는 소리가 皇地 금오산의 울음소리" 皇地를 울린다. 이 땅에 백성을 바라보고 운다는 뜻이다. "폭포에서 흘러내린 물이 선산 일원의 농민들에게 큰 혜택을 주었고, 이는 다시 낙동강으로 흘러간다." 온 천하를 다스릴 “皇地”로 ‘대혜폭포’로 불린다.


금오산성을 중수한 배설도 대혜문과 성 안에 혜창(惠倉)을 설치 백성들과 영남의병 2만과 관병 3만을 먹여 살린 양식 저장 창고를 그렇게 불렸던 것이다.

 

“배설은 내성(內城) 안 곳곳에 왜적과 장기 항전 할 수 있는 백성들을 위한 아홉 우물과 말들을 위한 일곱 연못을 팠다. 물이 계곡을 타고 그냥 흘러가도록 두어서는 외적에게 장기간 포위되었을 때 농성(籠城)을 할 수가 없는 까닭이다. 사람들은 배설이 판 우물과 못을 "구정칠택(九井七澤)"이라 불렀다. 구정칠택의 물은 넘쳐흘러 대혜폭포를 타고 부산까지 흘러간다.

낙동강 본류와 남강이 만나는 지점에 정암'솟바위(鼎巖)라는 독특하게 생긴 바위가 있는데, 오래 전부터 이 바위와 관련하여, 금오산의 물이 들어 온다면 ' 이 바위 십리 내외에서 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릴 큰 부자가 나온다는 전설'이 있었다는데, 전설대로 금오산성을 배설이 중수한 이후에 이 곳 부근에서 나라의 여러 재벌들과 수많은 중소 기업들 의령의 삼성의 이병철, 진양 지수의 엘지, 함안의 효성, 벽산, 동양 나일론 등등 그 수를 셀 수 없을 만큼의 크고 작은 기업들이 생겼났습니다.

조선시대 전라도를 축으로 하든 시대에 상상도 꿈도 못꿀 전설이 오늘날 현실이 된 것은 수많은 고난과 피흘린 대가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지금도 경남의 사람들이 금오산 대혜폭포의 물을 병에 받아 가는 것을 흔하게 볼 수 있는 광경입니다.

 

 

명나라군 대장 이여송이 직접 구미 금오산 지맥을 칼로자른 용우뜸에 칼바위가 지금도 남아 있다. 또한 여대로가 배설이 축성한 #금오산성을 본후 놀라면서 사람이 아닌 신기라면서 "반공을 가로질러 성을쌓았으니 진백이와 시황제가 흉내낼 수 없으리라"란 구절 이로인해 조선의 금오산 황제출현 전설이 시작되었다고도 한다.

 


7, 영남시대의 전설의 주인공 여대로

 여대로(呂大老)[1552~1619]는 김천시 구성면에서 태어남, 남명(南溟) 조식(曺植)의 문하생으로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업을 이루려는 뜻이 남달랐다. 1582년(선조 15)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이듬해에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정구(鄭逑)·장여헌(張旅軒)·정경세(鄭經世) 등과 교의(交誼)를 맺었다. 이이첨(李爾瞻)이 여대로의 명망을 보고 은근히 친교를 원하였지만 만나지 않고 어쩌다 만나게 되면 피해 버렸다고 한다.

 

정암진 전설을 전해준 사람은 바로 여대로란 도인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어째튼 기업인들은 이러한 전설에 감사함을 느끼는 것이다.


옛날부터 인물은 지령을 따른다는 말이 있다. 연려실기술에도 “거의 나라가 없어진 지 달(月)이 넘었다”사실 조선은 망해 없어져 버린 것이었음에도 금오산을 기축으로 영남의병의 봉기와 장기 항전이 나라를 구했습니다.

 

 

 

 

 

 

 

 

 

8, 금오산성 국방 전략요충지는 임진왜란 때부터

선조 28년(1595) 8월 비변사(備邊司)에서 상계(上啓)하기를 금오산성과 인동의 천생산성을 수축하여 대진(大鎭)을 만들 것과 이 중책을 배설(裵楔)로 하여금 전담토록 도체찰사 이원익(都體察使 李元翼)의 의견을 물어서 처리함이 옳다고 진언(進言)하였다.

 

이 무렵의 기록으로 보아 금오산성의 수축은 당시 선산부사 배설에 의하여 완성된 듯하며, 승병대장 유정(泗溟大師)도 금오산성 수축에 조력(助力)하여 국난에 크게 공헌한 것을 알 수 있다.(朝鮮佛敎通史 上篇)

 

배설은 산성을 수축하고 성내 진중에 구정칠택(九井七澤) 즉 아홉의 샘과 일곱의 못을 팠다고 대혜폭포

아래 도선굴로 가는 길목 바위에 "善山府使 裵楔 築 金烏山城 穿 九井七澤(선산부사 배설 축 금오산성 천 구정칠택)" 이라고 각자한 흔적이 있다.

 

 

금오산성은 전란중 영남 보장의 요충지로서 중요한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했으며 선조 29년(1596) 11월초 우의정 이원익이 강원 . 충청 . 경상도 체찰사로 부임할 즈음에 성주 영중(營中)으로 내려가 금오산성을 수비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그러다가 동년 11월 16일 도원수 권율의 왜적 방어책에 관한 상계(狀啓)에 따라 비변사는 왕에게 진언하게 되었으니 금오. 천생 두산성은 동서로 낙동강의 험(險)을 끼고 있어 중로(中

 

路)의요충이므로 반드시 수호할 요지임을 강조하고, 경주의 부산, 삼가의 악견산성과 함께 장수를 골라 굳이 지킬 것과 이미 축성된 대구의 공산, 성주의 용기산성에는 인근 백성을 입보(入保)시키고, 창령의 화왕산성과 같은 요지는 급히 수축하여 긴급사태에 대비토록 해야 한다고 주청하여 재가를 받았다. (宣祖實錄 卷 82)


그리하여 그 다음날 11월 17일 도체찰사 이원익이 출발할 때 왕이 영남의 산성에 대하여 하문한 바 이원익은 성주산성은 수축한다 하더라도 형세와 계곡이 좋지 못하여 군사가 주둔하기에 불편하므로 선산 금오산성을 선산부사 배설로 하여금 수비케 할 것을 상주하였다. 왕은 다시 금오산성에 물이 없음을 걱정하니 이원익은 물은 우물을 파면 얻을 수 있으며 성안에는 육지와 평야가 상망(相望)하고, 민호(民戶)도 조밀하여 왜적 방비에 극히 좋은 조건임을 역설하였다.

 

연후에 임지로 떠난 이원익은 영남, 호남 여러곳을 전전하면서 견벽청야(堅壁淸野)와 거험적축(據險積蓄)의 방어책을 점검 지휘하였다. 그리하여 병신년(1596) 겨울부터 금오산성의 수축(修築)이 시작되었다.(宣祖實錄 卷 82 )

 

선조 30년(1597) 1월, 이른바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청야대변(淸野待變)의 산성 고수작전을 중시하고, 삼남의 모든 산성을 굳게 지키게 하였다. 이때에 이원익도 금오산성으로 들어가 이곳을 전략본영으로 삼았다.

 

상주목사 정기룡이 감사대장군을 겸하여 상주진영하 9개군의 군사를 거느리고 성주목사 이수일과 함께 이 성을 지키고 있을 때였다.

 

이곳 본영을 중심으로 하여 그 후 여러 곳에서 왜적을 무찔렀으니 그중에서도 정기용이 인근 28개군의 군병을 이끌고 고령까지 내려가서 1만2천명의 적을 전멸케 한 고령전투는 금오산성이 전략본영으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감당한 큰 예라 하겠다.

 

 

그러나 정유년 9월 왜적이 금오산성에 침공하여 성 내부가 상당히 파괴된 것을 삼송유고(三松遺稿 卷之一)에서 짐작할 수 있고, 그 이래로 10년간 방치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선조39년(1606) 3월에 또다시 대대적인 수축이 단행되었다.

 

축성금오시일기(築城金烏時日記) 三松遺稿卷之二에 의하면 4월부터 공가를 다 없애고, 불탄 흔적을 치우고, 흩어진 기와를 모아서 객사, 무기고, 사창, 심지어 승군들이 묵을 승실까지도 5, 6개월간 공사하여 갖추었다고 한다. 묻힌 연못도 수리하고, 샘물도 다시 찾았으며 동원된 일꾼 연인원이 3,400명, 성터는 2,361보(步)였다고 한다.

 

그 밖의 문루(門樓.西門), 포루(砲樓.南峯), 무기를 제조하는 대장간까지 갖추어졌으며 성벽까지 보수를 끝내는데 약 1년 가까이 소요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성안 가장 높은 곳에 보봉사(普峰寺)가 있었고, 진남사(鎭南寺)는 52칸인데 선조39년 병오년 4월 29일에 화주(化主) 태순(泰淳)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축성에는 승군과 8개현의 군인 2,731명이 동원되었고, 총 길이1,730보(步)나 되었다. 그후 30년간 금오산성에 대한 상황은 잠잠하였다. (출처:사이버금오산)


한국인들이 일본 관광중에 꼭 한번 정도 가보는 일본의 가토 기요마사가 쌓은 구마모토산성이 바로 임진왜란에 울산에서 배설의 금오산성과 대치하면서 연구하여 금오산성을 모방한 것으로 일본에서도 인정하고 있다. 일본에서 성안에 우물을 24개나 만든 유일한 산성이기도 하다. (구마모토산성의 母성)  

 


 

 

 

*명량, 노량해전 배즙 이순신 손문욱의 역할과 공적분석

배즙(裵 楫)명종 19년 탄생(1564~1599.7.16)

꽃다운 35세로 노량해전에서 경상우수사 조방장으로 장렬히 전사했다.(배설장군의 동생) 

경상 우도병력 전함 12척을 칠천량해전에서 구해내어 명량 해전을 실제 지휘한 후 성공 시켰으며,

노량해전에서 장렬히 전사했다.   

 

 

배 즙(裵 楫)  자는 통중(通衆), 호는 명암(明庵)으로 배덕문의 3남이다.

공은 기국이 넓고 뛰어났으며 용력이 출중하였다. 일찍이 가풍을 몸에 익혔으며 학문에 전념하여 경서와 사기에 통달 하였다.

1590년(선조23) 무과 별시에 급제하여 훈련원 습독에 올랐는데 조정에서 말하기를 "지방 고을에서 이와 같이 빼어난 인걸이 배출되리라고는 미쳐 생각지도 못했다".라고 했으며 다시 사직(司直)에 제수 되었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부친 배덕문이 의병을 일으켜 왜장 黑甸句의 목을 벨 때에 공도 참여하였고, 개산진의 싸움에서도 크게 전공을 세우고 돌아오자 행재소(임금이 임시로 거쳐하는 곳)로 부터 선무사(宣撫使)에 제수되었다.


1597년(선조30) 정유재란 때는 조방장으로써 백씨 설(경상우도 수군절도사)과 함께 한산도에서 대승하고 노량에 이르러 갑자기 불어난 적에게 포위되었다. 이 때 공은 비분강개하여 호령하기를 "바다의 기운을 맑게 할 수만 있다면,이 한목숨 미련없이 바치리라".하고 적진을 종횡무진 유린타가 유탄을 맞아 순절 하였으니 향년 35세였다.


ㄱ, 명량 노량해전 기여도


1,명량, 노량해전의 1등 공신 이순신 장군,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이 조정에 전해지자 선조는 이순신 장군을 우의정에 추증, 1604년 선무공武功臣) 1등에 녹훈되고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 좌의정에 추증, 1793년(정조 17) 다시 영의정이 더해졌다.


2, 명량, 노량해전의 2등 공신 배즙 장군,


1610년(광해2) 선무원종 2등공신에 녹훈되고 가선대부 병조참판에 증직되었으며 의금부와 훈련원의 지사에 추증되었다. 이같은 공의 사실이 경산지와 영지에 등재되어 있으며 경북 성주군 대가면 도남1리 후포(뒷개) 숭조대에 배즙 장군의 갑옷을 묻고 유허비를 세웠다.(묘소는 경북 고령군 노2리 명곡 서우재에 있다.)


3, 노량 해전의 2등 공신 손문욱 장군,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자 노량해전을 대신 지휘 2등공신 절충장군에 승품되었다. 절충장군 손문욱은 권율의 궁중에서 인목대비를 축출하는 조정의 혼란을 부채질하여 세력을 누렸으나, 얼마되지 않아서 배설과 금란지교를 맺은 한준겸이 인조반정을 읽으켜 손문욱과 간신들은 비참하게 죽고 말았었다.



손묵욱은 일본에 자진해서 대마도주의 가신 야나가와 시게노부를 통해 대마도주의 장인인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장으로 부역하였으며,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이며 고니시 소서행장의 부장이다. 원균과 배설은 손문욱과 요시라의 부하들과 수군을 사정없이 죽였기에 악연을 가지고 있었다.




ㄴ,한민족의 영웅 이순신 장군님의 난중일기를

가슴은 뜨겁게 머리는 차갑고 냉정하게 평가하겠습니다. 



"정유년 난중일기 8월19일자에 이순신은 배설장군의 숙배거부를 적고 있는데 일반인들은 이를 비평합니다.

그러나 저는 다르게 봅니다
이날 이순신이 숙배를 요구한 교유서는 8월3일에 받은 통제사임명장입니다

그렇지만 이순신은 8월15일에
수군을 폐하라는 교유서를 받았습니다   그러면 앞의 교유서는 무효가 된 것이지요

여기에 숙배하면 이순신과 함께 항명을 하는 형국이 되지요

그래서 다음부터 이순신과 갈등이 시작됩니다

항명하는 이순신과 명을 따르는 배설장군 과 말입니다

선조실록 승정원일기 난중일기 등 모두 20여 종류라 작업 기간도 좀 걸릴 것입니다(배윤호)"


네, 명공은 육전에 합류하라는 어명을 배설에게 떠 맡겨 육지로 보내고 배에 집착하는 이순신 장군에 모습도 난중일기에 보여주고 있습니다,

베설 장군 입장에서 집요하게 배와 부대를 넘겨 받길 희망하는 이순신 장군의 의견에 다라도 경상 우도 수군의 조방장인 배즙 장군이 수군을 실질 지휘하고 있으니 배설이 흔쾌히 요양차 육지로 올랐을 가능성은 매우 높습니다.





요즘 조그만한 티코 승용차도 운전면허증 있어야 운전합니다.

더욱이 종북아시아에서 가장 크다란 전함이 그냥 운영되겠습니까?

이러한 큰 배는 기라졸과 포수 기타 전함을 룬용하는 병력이 하루 아침에 만들어 져서 전투를 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임진왜란 당시의 군사들은 지금과 달리 주장이 다로 있어 다른 장군의 지휘를 받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이순신 장군은 1597년 8월 19일 숙배식을 거행하고 배설 장군이 9월 2일 육지로 하선한 이후 2주후에 명량 대첩이나 노량해전 까지 배즙 장군이 군대를 운용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육지에서 응원한 민초들이나 갑판위에서 백병전을 한 병사들이 보충되어 이순신 장군의 휘하에 있었다는 추정이 가능한 부분이 있습니다.




배즙 장군이 배설 장군을 따라 전투에 임하게 된 것은 충주 탄금대 전투와 상주전투 조경의 추풍령전투에서 조선군이 대패하고 전멸 당한 현장에서 배설은 살아 남아 김천의 향병을 모아서 수십명의 잔병들과 항거하고 있었다.


배설이 일본군과 조선군의 무기와 전투 전술의 무지에서 대패함을 아버지인 배덕문에게 알리고, 14세에 과거에 장원한 아들 등암 자장을 곽재우 장군에게 보내 의병을 거병할 것을 요구하 과정에 배건 부부가 먼저 배설의 요구로 긴 죽창을 수백개 준비해서 배설부대에 전해주려다가 일본군에 포위되어 부부와 200여 명의 성주 의병들이 전멸하자, 배즙 장군이 죽창과 와룡매와 버들 나무로 도깨비 방패를 만들어 배설과 함께 전장을 누비게 된 것이다. 



일본군은 아시가루 장창으로 상주 탄금대 추풍령 전투 에서 약 20만 대군의 목을 댕강댕강 잘라 충주 탄금대를 끼고 강물이 흐르지 못할 정도로 고니시가 9만명의 수급을 잘랐던 잘 나가던  일본군들이었다.



그런 일본군이 배설과 배즙 장군의 죽창부대에  크게 당황해 했었다. 체구가 외소한 일본군들에 비해 조선군은 늙은 큰호박 하나정도의 더 큰 키와 잘 발달된 체격을 이용 10자(3m) 크기의 죽장을 말 위에서 배즙 장군과 그 부하들이 내려 꽃는 공격력은 가히 모든 일본군의 두려움의 대상이었었다.



일본 전국시대를 통일한 쟁쟁한 무사 24기사가 배즙 장군의  부상진 전투에서 전멸하고 그 수장인 하시바 히데카츠의 갈비뼈 하나를 배설 장군이 취할 수 있었든 것도 바로 무기와 전투전술의 우위 때문에 가능했었다. 하시바 히데카츠가 토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받은 조선정벌 승인 표주박문양의 황금부채 마저 빼앗기고 겨우 목슴이 붙어 도망쳤으나 끝내 칠천량에서 죽어 시체가 되어 돌아가게 할 수 있었든 것도 배즙 장군의 뛰어난 무공이 배설 장군을 바쳐주었었다.





5, 배설 장군의 묘소 바위에 각자로 기록된 봉토는 “周回 二十 里”이다.

장군의 묘소를 기준으로 지름 16Km, 이것을 면적으로 계산하면 200제곱킬로미터로 성주 전체면적의 약 3분의 1에 해당되고, 약 6.000만 평의 땅을 하사받은 것이다. 이는 조선 왕조 역대 어느 왕족도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묘지도 배설의 장산에 규모에 못미칠뿐 아니라 임진왜란 참전 모즌 장수에게 내려진 봉토 전체보다도 더 큰 규모의 장지로 선조의 스승 퇴계  이황선생에게 내련진 사원의 규모보다도 약 만배가 넘는 규모이다.


 

실제로 이정도 거리 안쪽으로 배설장군의 후손이며

지금 살고있는 후손들의 선대 묘소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고 이렇게 묘소가 있는 산들은 모두 배씨의 종산으로 되어 있다.

이것을 면적으로 계산하면 200제곱킬로미터가 조금 넘는 면적이다.

이러한 면적은 지금의 성주군 전체면적의 약 3분의 1에 해당되는 넓이이다.

 

지금 배설장군의 묘소는 경북 성주군 금수면 명천리에 있다.

그 부친의 묘는 경북 성주군 대가면 옥화리에 있다.

그 큰 아들의 묘는 경북 성주군 대가면 도남리에 있다.

그 둘째아들 상호의 묘는 성주군 벽진면 외기리에 있다.

막내아들 상보의 묘는 성주군 가천면 중산리에 있다.

이 분들의 후손들의 산소도 주변 금수면, 벽진면, 대가면, 가천면, 성주읍등지 곳곳에 흩어져 있으며

이 산들은 모두 배씨의 종산으로 되어 있으며 일부는 대종중에서 관리하고 일부는 소종중에서 관리하고

일부는 12촌이내의 대소가에서 관리하고 있다.

 

 

 "수군의 선임 장수인 배설장군에게 작전계획을 물었습니다.

배설장군은 나라의 명을 쫒아 수군을 육군으로 편입하여 전쟁을 수행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순신장군은 "불청하여 배설장군은 육군으로" 갔습니다. 


통제사가 된 이순신장군이 과거 자신의 휘하 장수가 아닌 배설장군을 자신에게 내려진 '명공육전 명령'(육지 잔병을 규합하라는 명령)을 배설 장군에게 대신하게 하고 자신은 전함을 동생 배즙장군과 수군을 지휘하게 됨을  '재조번방지'라는 고서에서 '배설을 속이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배윤호)"

 

 

 

주회 20리, 역모로 몰린 배설 장군에게 내려진 장지의 규모는 임진왜란 참전 모든 장수들이 받은 땅보다 많고  

임진왜란을 패배하게 원인을 제공한 장수에 대한 포상치고는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그것도 역모로 참수 되고 6년 만에 선조 대왕 스스로 복권 시킨 후 내린 것이다.


의병장 김덕령이 참수 후 70년 만에 겨우 억울한 점이 서류상 신원된 것과는 비교되어 억울함을 입증하고 있다. 

(난중일기♡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를 중심으로 배즙 장군의 활동을 살펴보고자 한다. 

 


 

 8월17일

장흥땅 백사정에 이르러 점심을 먹은 뒤 군영구미(장흥군 안양면 해창리)에 이르니 일대가 모두 무인지경이 되었다.

수사 배설은 내가 탈 배를 보내지 않았다.

(군령과 군권이 배설에게 있어 상관인 자신에게 배를 보내지 않음을 말함)

 

 

 8월18일

회령포에 갔더니, 경상수사 배설이 멀미를 핑계 대므로 보지 않았다.

 

8월19일

여러 장수들이 교서에 숙배하는데 경상수사 배설은 숙배하지 않았다.

그 업신여기고 잘난 체하는 꼴을 말로 다 나타 낼 수 없다. 너무 놀랍다. 이방과 그 영리에게 곤장을 쳤다.

(전쟁 공포증 걸린 장수가 잘난채 하겠는가, 배설은 이순신이 올린 전쟁공포증 환자라는 장계를 모르고 있었다)

 

 

 8월27일

경상우수사 배설이 왔는데 많이 두려워하는 눈치이다. 나는 불쑥

 “수사는 어디로 피해 갔던 것이 아니오 ”라고 하였다.

 

 8월28일

새벽 여섯시 즘에 적선 8척이 뜻하지도 않았는데 들어 왔다.

여러 배들이 두려워 겁을 먹고 경상수사는 피하여 물러나려 하였다.

 

 

 8월30일

저녁 나절에 배설은 적이 많이 올 것을 염려하여 달아나려고 했으나, 그 속 뜻을 알고는 있지만,

딱 드러나지 않은 것을 먼저 발설하는 것은 장수의 도리가 아니므로 참고 있을 즈음에,

 배설이 제 종을 시켜 솟장을 냈는데, 병세가 몹시 중하여 몸조리를 하겠다고 하였다.

나는 몸조리(귀향)를 하고 오라고 공문을 써 보냈더니 배설은 우수영에서 뭍으로 내렸다.

 




9월 2일 오늘 새벽에 경상수사 배설이 도망 갔다.(탈영보고)

육지에 육군에 자신이 합류하라는 어명을 배설에게 대신 시키면서 병치료를 겸하라고 계책을 논하고는

다시 순군에 돌아오지 못하게  도망쳣다.


 

9월 15일 '꿈에 신선이 이래하면 이기고 저래하면진다고 현몽을 해줬다'

 기록은 명량대첩을 앞두고 승리를 예감하고 있다.

조선 수군이 칠천포 포위망을 뚫고 나오고 명량해협에 진주한 이유를 알게 됐다는 암시이다.

 

 

9월 16일 명량대첩 이순신  '나는 장병들에게 조용히 타일러. 적이 1000척이라도 우리 배를 당하지 못할 것이니 동심하지 말고 진격해 적을 쏘라 하고,'

오예!~멋진군함이네요^^

12척이니 12.000명 쯤 왜군들 막는것은 어렵지 않아요^^


 

11월3일

 배설은 벌써 성주 본집으로 갔는데 그 곳으로 가지 않고 곧장 본가로 왔다.

그 사정을 보아주는 죄가 더 크다.

배설을 처단하지 않는 조정에 불만을 나타냄



난중일기 해석의 문제

정유년 난중일기 8월19일자에 이순신은 배설장군의 숙배거부를 적고 있는데.

배설의 잘난채 하는 꼴이 맘에 들지 않는 다고 적고있다.

 

유교 국가인 조선 백성에 입장에서 한번 살펴보자. (유성룡 권율 이순신의 친구 입장배제)

 

이날 이순신이 숙배를 요구한 교유서는 8월3일에 받은 통제사 임명장이다.

(선조가 거부했음에도 대신들이 밀어붙여 승지에게 선조가 사죄... 것)

 

그렇지만 선조 임금은 아무래도 8.3 임명장이 자의가 아니었으므로

이순신에게 8월15일에 수군을 폐하라는 교유서를 보냈다.

당연히 앞의 교유서는 무효가 된 것이다.

 

배설이 당시 수군 책임자로서 그러한 사실을 몰랐겠는가?

(군법에의해 사형수와 같은 죄인을 방면 왕을 기만?)

 

여기에 무효가 된 교류서에 숙배하면

조선 왕의 어명에 함께 항명을 하는 형국이 되는 것이다.

왕명을 따르든 배설과 이순신(조정을 장악한 동인의 군부)장군과 갈등이 시작되었다.

 

조선군 최고통수권자인 선조 임금이 5년간 한산도에서 은거한 이순신을 영웅은 크녕 동인들이 전쟁중에도 전권을 놓치 않으려는 발악으로 보고 “칠천량 해전의 대패를 본즉, 우리 수군은 워낙 부실하니 차라리 권율 장군의 육군과 통합하라.” 명령한다.

 

적국을 탐지하라니까 김성일은 거짓말을 하고 전쟁이 나자 또 죄인이 중책을 맡아 인사를 좌지우지하고,

한 2년 이면 전쟁이 끝나고 전공을 염두에 두고 인사를 하는 듯하기도 하다.

(호남의 국가 주도권을 상실시킴)

 

 

항명하고 쿠데타를 할 수 있었던 이순신 장군,

왕 명을 따르는 배설장군이 역모로 몰린 것은 동인군부에 탄핵되었음을 뜻한다.

 

 

 

을미년 4월 난중일기

 

 

초이틀(갑진) 맑음

종일 공무를 보았다.

냠냠냠 센스! 힝~ 누구? ... 좋아 애도 주식 대한민국 릴랙스 갈래말래 더워 해피cgi 추워요 훗 샤방 해피 화남 훌쩍 >_< 깜빡 소주 반대 찬성 완소 흑흑 헐 ^^ ye~ 굿 복받으세요 미스터 미세스 미스 헉! 후덜덜 덜덜덜 뷁 캬캬캬 아자 뭐죠? 사랑 필요없다 지구를떠라 필승 캬캬캬 지름신 고맙습니다 완전조아 자기야 빠팅 니들이알어 므흣 뭐라카노 추워 하이 ㅋ 사랑해 화이팅 아자아자 쌩큐 힘내 열폭 오늘 하하하 하앙 킹왕짱 뭐니 듣보잡 ok so hot 신상품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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