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 노량해전 배즙 이순신 손문욱의 역할과 공적분석
배즙(裵 楫)명종 19년 탄생(1564~1599.7.16)
꽃다운 35세로 노량해전에서 경상우수사 조방장으로 장렬히 전사했다.(배설장군의 동생)
경상 우도병력 전함 12척을 칠천량해전에서 구해내어 명량 해전을 실제 지휘한 후 성공 시켰으며,
노량해전에서 장렬히 전사했다.

배 즙(裵 楫) 자는 통중(通衆), 호는 명암(明庵)으로 배덕문의 3남이다.
공은 기국이 넓고 뛰어났으며 용력이 출중하였다. 일찍이 가풍을 몸에 익혔으며 학문에 전념하여 경서와 사기에 통달 하였다.
1590년(선조23) 무과 별시에 급제하여 훈련원 습독에 올랐는데 조정에서 말하기를 "지방 고을에서 이와 같이 빼어난 인걸이 배출되리라고는 미쳐 생각지도 못했다".라고 했으며 다시 사직(司直)에 제수 되었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부친 배덕문이 의병을 일으켜 왜장 黑甸句의 목을 벨 때에 공도 참여하였고, 개산진의 싸움에서도 크게 전공을 세우고 돌아오자 행재소(임금이 임시로 거쳐하는 곳)로 부터 선무사(宣撫使)에 제수되었다.
1597년(선조30) 정유재란 때는 조방장으로써 백씨 설(경상우도 수군절도사)과 함께 한산도에서 대승하고 노량에 이르러 갑자기 불어난 적에게 포위되었다. 이 때 공은 비분강개하여 호령하기를 "바다의 기운을 맑게 할 수만 있다면,이 한목숨 미련없이 바치리라".하고 적진을 종횡무진 유린타가 유탄을 맞아 순절 하였으니 향년 35세였다.
ㄱ, 명량 노량해전 기여도
1,명량, 노량해전의 1등 공신 이순신 장군,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이 조정에 전해지자 선조는 이순신 장군을 우의정에 추증, 1604년 선무공武功臣) 1등에 녹훈되고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 좌의정에 추증, 1793년(정조 17) 다시 영의정이 더해졌다.
2, 명량, 노량해전의 2등 공신 배즙 장군,
1610년(광해2) 선무원종 2등공신에 녹훈되고 가선대부 병조참판에 증직되었으며 의금부와 훈련원의 지사에 추증되었다. 이같은 공의 사실이 경산지와 영지에 등재되어 있으며 경북 성주군 대가면 도남1리 후포(뒷개) 숭조대에 배즙 장군의 갑옷을 묻고 유허비를 세웠다.(묘소는 경북 고령군 노2리 명곡 서우재에 있다.)
3, 노량 해전의 2등 공신 손문욱 장군,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자 노량해전을 대신 지휘 2등공신 절충장군에 승품되었다. 절충장군 손문욱은 권율의 궁중에서 인목대비를 축출하는 조정의 혼란을 부채질하여 세력을 누렸으나, 얼마되지 않아서 배설과 금란지교를 맺은 한준겸이 인조반정을 읽으켜 손문욱과 간신들은 비참하게 죽고 말았었다.
손묵욱은 일본에 자진해서 대마도주의 가신 야나가와 시게노부를 통해 대마도주의 장인인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장으로 부역하였으며,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이며 고니시 소서행장의 부장이다. 원균과 배설은 손문욱과 요시라의 부하들과 수군을 사정없이 죽였기에 악연을 가지고 있었다.
ㄴ,한민족의 영웅 이순신 장군님의 난중일기를
가슴은 뜨겁게 머리는 차갑고 냉정하게 평가하겠습니다.
"정유년 난중일기 8월19일자에 이순신은 배설장군의 숙배거부를 적고 있는데 일반인들은 이를 비평합니다.
그러나 저는 다르게 봅니다
이날 이순신이 숙배를 요구한 교유서는 8월3일에 받은 통제사임명장입니다
그렇지만 이순신은 8월15일에
수군을 폐하라는 교유서를 받았습니다 그러면 앞의 교유서는 무효가 된 것이지요
여기에 숙배하면 이순신과 함께 항명을 하는 형국이 되지요
그래서 다음부터 이순신과 갈등이 시작됩니다
항명하는 이순신과 명을 따르는 배설장군 과 말입니다
선조실록 승정원일기 난중일기 등 모두 20여 종류라 작업 기간도 좀 걸릴 것입니다(배윤호)"
네, 명공은 육전에 합류하라는 어명을 배설에게 떠 맡겨 육지로 보내고 배에 집착하는 이순신 장군에 모습도 난중일기에 보여주고 있습니다,
베설 장군 입장에서 집요하게 배와 부대를 넘겨 받길 희망하는 이순신 장군의 의견에 다라도 경상 우도 수군의 조방장인 배즙 장군이 수군을 실질 지휘하고 있으니 배설이 흔쾌히 요양차 육지로 올랐을 가능성은 매우 높습니다.
요즘 조그만한 티코 승용차도 운전면허증 있어야 운전합니다.
더욱이 종북아시아에서 가장 크다란 전함이 그냥 운영되겠습니까?
이러한 큰 배는 기라졸과 포수 기타 전함을 룬용하는 병력이 하루 아침에 만들어 져서 전투를 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임진왜란 당시의 군사들은 지금과 달리 주장이 다로 있어 다른 장군의 지휘를 받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이순신 장군은 1597년 8월 19일 숙배식을 거행하고 배설 장군이 9월 2일 육지로 하선한 이후 2주후에 명량 대첩이나 노량해전 까지 배즙 장군이 군대를 운용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육지에서 응원한 민초들이나 갑판위에서 백병전을 한 병사들이 보충되어 이순신 장군의 휘하에 있었다는 추정이 가능한 부분이 있습니다.
배즙 장군이 배설 장군을 따라 전투에 임하게 된 것은 충주 탄금대 전투와 상주전투 조경의 추풍령전투에서 조선군이 대패하고 전멸 당한 현장에서 배설은 살아 남아 김천의 향병을 모아서 수십명의 잔병들과 항거하고 있었다.
배설이 일본군과 조선군의 무기와 전투 전술의 무지에서 대패함을 아버지인 배덕문에게 알리고, 14세에 과거에 장원한 아들 등암 자장을 곽재우 장군에게 보내 의병을 거병할 것을 요구하 과정에 배건 부부가 먼저 배설의 요구로 긴 죽창을 수백개 준비해서 배설부대에 전해주려다가 일본군에 포위되어 부부와 200여 명의 성주 의병들이 전멸하자, 배즙 장군이 죽창과 와룡매와 버들 나무로 도깨비 방패를 만들어 배설과 함께 전장을 누비게 된 것이다.
일본군은 아시가루 장창으로 상주 탄금대 추풍령 전투 에서 약 20만 대군의 목을 댕강댕강 잘라 충주 탄금대를 끼고 강물이 흐르지 못할 정도로 고니시가 9만명의 수급을 잘랐던 잘 나가던 일본군들이었다.
그런 일본군이 배설과 배즙 장군의 죽창부대에 크게 당황해 했었다. 체구가 외소한 일본군들에 비해 조선군은 늙은 큰호박 하나정도의 더 큰 키와 잘 발달된 체격을 이용 10자(3m) 크기의 죽장을 말 위에서 배즙 장군과 그 부하들이 내려 꽃는 공격력은 가히 모든 일본군의 두려움의 대상이었었다.
일본 전국시대를 통일한 쟁쟁한 무사 24기사가 배즙 장군의 부상진 전투에서 전멸하고 그 수장인 하시바 히데카츠의 갈비뼈 하나를 배설 장군이 취할 수 있었든 것도 바로 무기와 전투전술의 우위 때문에 가능했었다. 하시바 히데카츠가 토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받은 조선정벌 승인 표주박문양의 황금부채 마저 빼앗기고 겨우 목슴이 붙어 도망쳤으나 끝내 칠천량에서 죽어 시체가 되어 돌아가게 할 수 있었든 것도 배즙 장군의 뛰어난 무공이 배설 장군을 바쳐주었었다.
5, 배설 장군의 묘소 바위에 각자로 기록된 봉토는 “周回 二十 里”이다.
장군의 묘소를 기준으로 지름 16Km, 이것을 면적으로 계산하면 200제곱킬로미터로 성주 전체면적의 약 3분의 1에 해당되고, 약 6.000만 평의 땅을 하사받은 것이다. 이는 조선 왕조 역대 어느 왕족도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묘지도 배설의 장산에 규모에 못미칠뿐 아니라 임진왜란 참전 모즌 장수에게 내려진 봉토 전체보다도 더 큰 규모의 장지로 선조의 스승 퇴계 이황선생에게 내련진 사원의 규모보다도 약 만배가 넘는 규모이다.
실제로 이정도 거리 안쪽으로 배설장군의 후손이며
지금 살고있는 후손들의 선대 묘소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고 이렇게 묘소가 있는 산들은 모두 배씨의 종산으로 되어 있다.
이것을 면적으로 계산하면 200제곱킬로미터가 조금 넘는 면적이다.
이러한 면적은 지금의 성주군 전체면적의 약 3분의 1에 해당되는 넓이이다.
지금 배설장군의 묘소는 경북 성주군 금수면 명천리에 있다.
그 부친의 묘는 경북 성주군 대가면 옥화리에 있다.
그 큰 아들의 묘는 경북 성주군 대가면 도남리에 있다.
그 둘째아들 상호의 묘는 성주군 벽진면 외기리에 있다.
막내아들 상보의 묘는 성주군 가천면 중산리에 있다.
이 분들의 후손들의 산소도 주변 금수면, 벽진면, 대가면, 가천면, 성주읍등지 곳곳에 흩어져 있으며
이 산들은 모두 배씨의 종산으로 되어 있으며 일부는 대종중에서 관리하고 일부는 소종중에서 관리하고
일부는 12촌이내의 대소가에서 관리하고 있다.
"수군의 선임 장수인 배설장군에게 작전계획을 물었습니다.
배설장군은 나라의 명을 쫒아 수군을 육군으로 편입하여 전쟁을 수행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순신장군은 "불청하여 배설장군은 육군으로" 갔습니다.
통제사가 된 이순신장군이 과거 자신의 휘하 장수가 아닌 배설장군을 자신에게 내려진 '명공육전 명령'(육지 잔병을 규합하라는 명령)을 배설 장군에게 대신하게 하고 자신은 전함을 동생 배즙장군과 수군을 지휘하게 됨을 '재조번방지'라는 고서에서 '배설을 속이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배윤호)"

주회 20리, 역모로 몰린 배설 장군에게 내려진 장지의 규모는 임진왜란 참전 모든 장수들이 받은 땅보다 많고
임진왜란을 패배하게 원인을 제공한 장수에 대한 포상치고는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그것도 역모로 참수 되고 6년 만에 선조 대왕 스스로 복권 시킨 후 내린 것이다.
의병장 김덕령이 참수 후 70년 만에 겨우 억울한 점이 서류상 신원된 것과는 비교되어 억울함을 입증하고 있다.

(난중일기♡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를 중심으로 배즙 장군의 활동을 살펴보고자 한다.
8월17일
장흥땅 백사정에 이르러 점심을 먹은 뒤 군영구미(장흥군 안양면 해창리)에 이르니 일대가 모두 무인지경이 되었다.
수사 배설은 내가 탈 배를 보내지 않았다.
(군령과 군권이 배설에게 있어 상관인 자신에게 배를 보내지 않음을 말함)
8월18일
회령포에 갔더니, 경상수사 배설이 멀미를 핑계 대므로 보지 않았다.
8월19일
여러 장수들이 교서에 숙배하는데 경상수사 배설은 숙배하지 않았다.
그 업신여기고 잘난 체하는 꼴을 말로 다 나타 낼 수 없다. 너무 놀랍다. 이방과 그 영리에게 곤장을 쳤다.
(전쟁 공포증 걸린 장수가 잘난채 하겠는가, 배설은 이순신이 올린 전쟁공포증 환자라는 장계를 모르고 있었다)
8월27일
경상우수사 배설이 왔는데 많이 두려워하는 눈치이다. 나는 불쑥
“수사는 어디로 피해 갔던 것이 아니오 ”라고 하였다.
8월28일
새벽 여섯시 즘에 적선 8척이 뜻하지도 않았는데 들어 왔다.
여러 배들이 두려워 겁을 먹고 경상수사는 피하여 물러나려 하였다.
8월30일
저녁 나절에 배설은 적이 많이 올 것을 염려하여 달아나려고 했으나, 그 속 뜻을 알고는 있지만,
딱 드러나지 않은 것을 먼저 발설하는 것은 장수의 도리가 아니므로 참고 있을 즈음에,
배설이 제 종을 시켜 솟장을 냈는데, 병세가 몹시 중하여 몸조리를 하겠다고 하였다.
나는 몸조리(귀향)를 하고 오라고 공문을 써 보냈더니 배설은 우수영에서 뭍으로 내렸다.
9월 2일 오늘 새벽에 경상수사 배설이 도망 갔다.(탈영보고)
육지에 육군에 자신이 합류하라는 어명을 배설에게 대신 시키면서 병치료를 겸하라고 계책을 논하고는
다시 순군에 돌아오지 못하게 도망쳣다.
9월 15일 '꿈에 신선이 이래하면 이기고 저래하면진다고 현몽을 해줬다'
기록은 명량대첩을 앞두고 승리를 예감하고 있다.
조선 수군이 칠천포 포위망을 뚫고 나오고 명량해협에 진주한 이유를 알게 됐다는 암시이다.
9월 16일 명량대첩 이순신 '나는 장병들에게 조용히 타일러. 적이 1000척이라도 우리 배를 당하지 못할 것이니 동심하지 말고 진격해 적을 쏘라 하고,'
오예!~멋진군함이네요^^
12척이니 12.000명 쯤 왜군들 막는것은 어렵지 않아요^^
11월3일
배설은 벌써 성주 본집으로 갔는데 그 곳으로 가지 않고 곧장 본가로 왔다.
그 사정을 보아주는 죄가 더 크다.
배설을 처단하지 않는 조정에 불만을 나타냄
난중일기 해석의 문제
정유년 난중일기 8월19일자에 이순신은 배설장군의 숙배거부를 적고 있는데.
배설의 잘난채 하는 꼴이 맘에 들지 않는 다고 적고있다.
유교 국가인 조선 백성에 입장에서 한번 살펴보자. (유성룡 권율 이순신의 친구 입장배제)
이날 이순신이 숙배를 요구한 교유서는 8월3일에 받은 통제사 임명장이다.
(선조가 거부했음에도 대신들이 밀어붙여 승지에게 선조가 사죄... 것)
그렇지만 선조 임금은 아무래도 8.3 임명장이 자의가 아니었으므로
이순신에게 8월15일에 수군을 폐하라는 교유서를 보냈다.
당연히 앞의 교유서는 무효가 된 것이다.
배설이 당시 수군 책임자로서 그러한 사실을 몰랐겠는가?
(군법에의해 사형수와 같은 죄인을 방면 왕을 기만?)
여기에 무효가 된 교류서에 숙배하면
조선 왕의 어명에 함께 항명을 하는 형국이 되는 것이다.
왕명을 따르든 배설과 이순신(조정을 장악한 동인의 군부)장군과 갈등이 시작되었다.
조선군 최고통수권자인 선조 임금이 5년간 한산도에서 은거한 이순신을 영웅은 크녕 동인들이 전쟁중에도 전권을 놓치 않으려는 발악으로 보고 “칠천량 해전의 대패를 본즉, 우리 수군은 워낙 부실하니 차라리 권율 장군의 육군과 통합하라.” 명령한다.
적국을 탐지하라니까 김성일은 거짓말을 하고 전쟁이 나자 또 죄인이 중책을 맡아 인사를 좌지우지하고,
한 2년 이면 전쟁이 끝나고 전공을 염두에 두고 인사를 하는 듯하기도 하다.
(호남의 국가 주도권을 상실시킴)
항명하고 쿠데타를 할 수 있었던 이순신 장군,
왕 명을 따르는 배설장군이 역모로 몰린 것은 동인군부에 탄핵되었음을 뜻한다.
을미년 4월 난중일기
초이틀(갑진) 맑음
종일 공무를 보았다.